260화.
세계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온 세상의 마나와 자연력을 순환 시키는 영물. 그 크기는 하늘을 떠 받치듯 거대하며, 풍기는 분위기는 웅혼하면서도 신기하다.
나와 니디아는 천천히 걸어 세계수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거대한 뿌리 부분에 거의 도달할 무렵.
나는 미리 마중나와 있던 인물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지훈 씨."
안대를 쓴 인물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호수색 머리카락.
피부색은 창백하리라 여겨질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마치 밤하늘에 떠오른 달빛처럼 은은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올랐기 때문에.
[엘리스]
[전 엘프 여왕]
과거 시나리오에서 내게 대적했 던 적이나 , 현재는 자신의 격까지 소모해가며 내 목숨을 구원해줬던 이.
황제와 더불어 나의 가장 커다란 조력자.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엘리스. 그녀가 내 앞에 있다.
저벅, 저벅.
나는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다.
"여기 앉으세요."
그러자 그녀가 손짓했다.
미리 준비해둔 것일까. 꽤나 커다란 탁자가 세계수 뿌리 앞에 자리해 있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착석했다.
곧장 본론을 물었다.
"세계의 진실이란 걸 들려주겠다 고 하던데."
엘리스가 나를 이곳 중앙대륙으로 부른 이유.
나는 곧장 그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기에 지체하지 않고 이자리에 왔다.
내 말에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보 이는 엘리스.
"한지훈 씨. 아니, 이름 없는 별."
그녀는 안대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일까. 그녀는 안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선을 이쪽으로 마주쳐왔다.
'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 세상을 파악하는 것인가.'
나는 그리 추측했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문득 물어왔다.
"그대는 이 세계가 뭐라고 생각 하시나요?"
"이 세계라…."
다소 뜬금없는 물음이다.
하지만 답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블랙 오케스트라.'
내가 플레이 했던 게임.
"이 세계는 게임 속 세상이야."
나는 지금 블랙 오케스트라의 세계관 속에 있다.
제국, 연방, 그외 다양한 국가들. 네임드 NPC들. 퀘스트와 시나리오. 드워프와 엘프를 비롯한 아종족들. 전쟁.
모두 게임에서 겪었던 것과 똑같다.
이 세상은 게임 속 세상이다.
내 추측이 맞았던 것인지.
"맞아요. 게임, 그러니까 한지훈 씨가 있던 세상의 하위 세계에 불과하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허나 전부 맞춘 것은 아니었던 것일까. 그녀가 몇 마디 말을 덧붙 인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어째서 한지훈 씨 차원의 하위 세계가 있게 되었을까요? 한지훈 씨에게는 정말 이 세상이, 그저 유희 속 세상이라고만 여겨지셨나요?"
그저 유희 속 세상이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순한 게임 속 세상은 아니지.'
블랙 오케스트라의 세계관은 정 교하고도 광활하다.
다수의 대륙. 수많은 국가들.
유닛 개개인이 자유의지를 가지 고 있으며, 저마다 사명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그저 흔한 전략게임 속 세상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세세하다.
그녀의 말이 덧붙여졌다.
"이 세계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상이에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요."
"목적이라. 그게 뭐지?"
"그건…."
그녀가 대답하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 * *
- 러셀. 네놈은 이 세계가 어떤 세계라고 생각하나?
"어떤 세계냐니. 그게 무슨 말이지. 크라함."
통령의 통신 수정구에서 목소리 가 흘러나온다.
질척하고도 기분 나쁜 목소리. 흑마법사 크라함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 말 그대로다. 이 세계. 네놈의 주변을 둘러싼 공간. 이 차원을 뭐 라고 생각하는거냐.
"…세계. 차원이라. 종교적인 이야기라도 할 생각인가? 창세기라도 읊어야 할 것 같군."
- 그딴 종교 따위는 집어치워라. 러셀.
러셀은 미간을 찌푸렸다.
연방의 통령인 그에게 이러한 모 욕은 처음이었으므로.
크라함의 말이 이어진다.
-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의 하위 차원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이지.
"목적이라면?"
러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고,
- 이 세계의 목표는. 상위 차원 의 영혼을 불러들여, '신'을 길러내는 거다.
크라함이 답했다.
"신을 만드는 거라고?"
"네. 맞아요. 신."
그녀의 대답에 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너무나도 생뚱맞은 말이었기 때문에.
이 세계의 존재 목적이 신을 만들기 위함이라니.
전혀 예상하지도, 그리고 믿기지 도 않는 소리였다.
만약 이러한 말을 하는 인물이 내부하이거나 동료였다면, 단숨에 개소리 하지 말라며 일갈했을 터다.
하지만 눈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해오는 인물은 엘리스.
한때 모든 엘프의 여왕이었고, 전 지성체들 중 가장 드높은 격을 지니던 인물이었으니 .
나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하나의 세계에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존재. 만휘군상 모든 것을 파악하고, 죽음과 삶마저 결정 짓는 이 세상의 주인. 모든 지성체들은 이러한 존재를 일컬어 '신'이라고 부르죠."
참고로 나는 무신론자다.
종교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도, 의지하지도 않는다.
허나 눈앞에 엘리스는 신에 관한내용을 퍽이나 진지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한지훈 씨. 당신이 이 세상에 끌려 들어온 이유가 이때문이에요. 그대는 상위 차원에 있을 적, 그 어떤 유저들보다도 막대한 영향을 이 세계에 끼쳤고 그렇기에 신 후보자로 이 세상에게 간택된 거예 요."
즉, 내가 지구에 있을 무렵.
그 어떠한 유저들보다도 높은 점수를 냈고,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 를 신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는 것 이다.
"한지훈 씨. 당신의 성장이 무한 한 것이 이 이유에요. 본디 상위차 원에서 온 그대의 '그릇'은 무한하 니까. 그만큼 드높은 격을 지닌 존재였으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는 문득 떠올렸다.
"유저 보정. 포인트."
이 세계에 끌려 들어온 내가 받는 보정. 그리고 퀘스트를 완료할 때마다 주어지는 포인트.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포인트를 수집할 때마다 나는 강해지고 보다 중요한 존재가 되어갔다.
일개 병사에 불과하던 내가 어느덧 야전사령관이 되었고, 개인으로 선 지성체 최강의 무력을 달성했다.
유저 보정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할 일.
추측해본다.
'어쩌면. 포인트라는 것은 내 그릇을 채우던 격이 아니었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말이 안된다.
포인트를 수집하면 할수록 강해 진다니. 지구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가 아닌 블랙 오케스트라의 세계관이었고, 오직 신을 키워내기 위해 만든 세계라 하니.
나는 추론했다.
'포인트를 무한하게 얻어간다면. 언젠가 신이 될 수 있는 게 아닐 까.'
아마도 맞을 것이다.
포인트를 모아 능력치를 강화한 다면 인간으로서 내 한계가 점차 해금된다. 일개 인간 이상의 무력을 발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포인트를 무한하게 수집해, 끝없이나 자신을 강화한다 면?
언젠가는 신이라 불릴 정도로 드 높은 능력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이름 없는 별. 사실 신 후보자 들은 많아요."
아직 알려줄 것이 남아있는 것인 지. 그녀가 입술을 열어 말을 이었다.
나는 복잡하던 머릿속을 정돈하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 온다.
"그대가 시나리오에서 부딪혔던 인물들. 그대와 대적하고, 협력하 며, 그대 못지않은 활약을 펼쳤던 영웅들. 별자리를 가진 영혼들. 그 들 또한 신격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지요."
별자리를 가진 영웅들이란, 네임 드 NPC를 일컫는 말일 터다.
당장 눈앞에 있는 엘리스, 그리고 엘븐 가디언 니디아부터. 전생의 대장군 마이사 슈베츠, 이전 시나리오에서 내 가장 강력한 아군이었던 크라함, 대적자의 운명을 타고났던 한스. 그외 무수히 많은 영웅들까 지.
그들 모두가 신격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무한한 그릇 이 없어요. 상위차원의 존재가 아닌, 하위차원의 존재이니까요."
있는 것은 자격 뿐.
신이 될 수 있을 정도의 크나큰 잠재력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신이 될 수 없어 요. 아니, 될 수는 있겠지만. 일개 지성체가 겪을 수 없을 정도의 막 대한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지만 도 달할 수 있지요. 거의 불가능한 일 이라 봐야겠죠."
무한한 그릇도, 신이 되기 위한시나리오도, 유저 보정과 포인트의 강화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네. 이미 말했다시피. 한지훈 씨 에게는 무한한 그릇이, 그리고 세계 의 가호가 있으니까요."
엘리스가 단호히 말했다.
"당신이 신격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에요. 이름 없는 별."
"한지훈이 신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
러셀은 크라함의 말을 가만히 듣 고는, 그리 답했다.
솔직히 믿기는 힘든 말이었다.
한지훈이 상위 차원의 존재였고, 이 세계는 한지훈을 신으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라니.
허나 크라함의 말을 믿기 힘든 것 이상으로 한지훈의 능력이 너무나도 범상치 않았다.
"그래서. 그토록 강대한 무력과, 끝을 모르는 지략을 가졌다고?"
- 그렇다.
통령은 정보국을 운용해 한지훈 이라는 인물의 일생을 살폈었다.
과거 공국전쟁시절부터 이어저온 전훈들. 가파르게 성장하는 무력. 압도적인 지략.
비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결코 불가능한 성장 속도였으니 .
하지만 크라함의 말대로, 한지훈 이 정말 상위 차원의 존재이고 이 세계 자체가 그의 앞을 인도하고 있다면.
이치에 맞는다.
- 놈은 이 세계의 주인공. 모든 사건은 녀석을 중심으로 일어나며, 으레 이야기 속 주인공이 그러하듯 결코 패배하지 않을 운명을 타고났 지.
크라함이 그리 강조했다.
한지훈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 다고.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 며,
- 이 세계 자체가 녀석의 편이다. 이미 세계의 각본 자체가, 놈이 신위를 얻는 것으로 확정되어있는 것이다.
언젠가 신이 될 것이라 확정되어 있다고 말이다.
그에 러셀은 턱을 쓰다듬으며 읊 조린다.
"각본이라…."
사실, 러셀의 얼굴에는 아직도 미심쩍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운명론이로군. 그다지 믿음직한 이야기는 아닌데."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있고, 자신들은 그 정해진 시나리오에 등장 하는 각본들에 불과하다니.
그 누가 믿을 만한 이야기이겠는가.
허나 크라함의 이야기가 너무나 도 흥미로웠기에, 그리고 그 어떤 종교에서도 내세우지 않던 이야기 였기에.
계속해 들어보려 하는 러셀이었다.
그가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 조연들이 아무리 발악한들 예정된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단 말인가? 크라함."
- 그렇다. 본래대로라면 말이다.
"방법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
그의 물음에, 클클클 웃는 크라 함. 수정구에서 질척하고도 기분나 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 방법은 언제나 있지. 이 빌어 먹을 세계의 각본이 확정되었다 한 들 우리 지성체들이 발악할 여지쯤 은 남아있으니 .
러셀은 크라함의 목소리를 귀담 아 듣고, 크라함은 나직이 말해왔다.
- 유물을 찾아야 한다.
"유물이라면."
- 각 대륙에 잠들어있는. 과거 환상종들의 핵들이지.
유물. 러셀 통령도 들어본 적 있는 것이었다.
과거 신화시대.
지성체가 등장하지 않고 환상종 들이 지상을 지배했을 무렵, 그들의 핵이 남아 보존된 것.
그 어떤 대마법사도 감히 다룰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힘이 잠들 어있다 들었다.
- 모든 유물을 찾아 세계검을 만든다면 그 어떠한 것도 절삭할 수 있다.
크라함의 목소리가 점차 강해진다.
- 세계의 각본, 관리자의 개입.
이 세상의 법칙, 이미 확정된 지성 체들의 운명까지! 모조리 절삭해 개변시킬 수 있다!
마치 저주하는 듯, 혹은 가슴속 깊숙이 박힌 울분을 토해내는 듯, 그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쳐왔다.
과연 크라함은 어떤 인생을 살아 왔던 것일까.
그의 목소리가 통령의 정신을 뒤 흔들었다.
직후 크라함이 목소리를 가라앉 히고는, 나직이 제안했다.
- 내가 도움을 주겠다. 나와 연합해 한지훈에게 대항해라. 패배가 확정된 운명에 맞서 싸우는거다. 러 셀.
자신과 연합하라고.
동맹을 맺자고 말이다.
- 예정된 신을 죽이고. 우리가 신이 되어 이 세계 자체를 통치한다.
크라함의 음울한 목소리가 통령 의 집무실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