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244화 (244/390)

244화.

"커헉…!"

콰당탕.

카디르가 바닥을 굴렀다. 놈의 등짝에는 붉은색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방금 전 내 장검이 낸 자상이다.

놈의 피가 질척하게 흘러 대리석 바닥을 적셔간다.

고통에 버둥거리는 카디르. 나는 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읊조린다.

"배신자는 죽여버려야 해."

어느 집단이든. 배신자는 숙청해 야 하는 법이다.

그것이 연방의 고위 첩자라면 더더욱.

퍼억!

놈의 심장에 장검을 박아 넣었다.

"쿨럭, 컥…."

카디르의 입가에서 핏물이 울컥 뿜어져 나왔다.

녀석의 버둥거림이 더욱 심해진다. 나는 가만히 놈을 내려다봤다.

제국 국방성 장관 카디르. 황제 다음으로 제국의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 이.

평소였다면 감히 내가 어찌 상대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드높은 지위에 도달한 이였다.

하지만 놈은 연방의 스파이였고. 이제는 내 장검에 심장이 꿰뚫려 있는 상황이었으니 .

지금은 숙청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나직이 읊조렸다.

"다음 시나리오에선 배신하지 마 라. 카디르."

다음 시나리오라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검날을 비틀었다.

우드득.

뼈가 바스라지고, 심장이 난자되는 감촉. 검날을 뽑았다. 그러자 한참이나 경련하던 놈의 신체가 축 늘어진다.

녀석은 절명한 것이다.

연방과 손잡고 나를 압박해 왔던 적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허탈한 최후.

내가 그렇게 놈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지훈! 이게 무슨 일인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중한 위엄이 서린 목소리. 그쪽 방향을 바라보자, 역시나.

황실 기사단을 이끌고 온 인물. 익숙한 황금색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어째서 카디르 장관을…."

"황제 폐하."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제국 황제 아르테니아였다.

그는 연회장을 둘러보는 와중, 소란소리를 듣고는 황실 기사들과 함께 이자리로 온 것이다.

서걱.

나는 카디르의 가슴팍에 꽂혀있 던 장검을 빼냈다. 주르륵. 검날을 따라 질척한 핏물이 흘러내린다.

황제에게 알렸다.

"연방의 첩자를 색출해 처치했습니다."

"첩자라니? 카디르가 설마 연방 의 간첩이라도 된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흔들리는 황제의 눈동자.

하긴 당황할 법하다. 난대 없이 그의 측근인 카디르가 연방의 첩자 였다니.

쉬이 믿기 힘든 사실.

허나 증거가 너무나도 확실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배 지를 집어들었다.

"이걸 보십시오."

"이건…."

직후 더욱 커다래지는 황제의 눈동자.

"연방 정보국의 배지. 이걸 카디 르가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여기, 카디르 와 나눴던 대화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니디아에게 눈 짓했다. 그러자 니디아는 고개를 끄 덕이고는,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음성 기록용 수정구였다.

그녀가 수정구에 담긴 음성을 재생했다.

- 한지훈. 연방에 귀의하라. 일개 군단장이 아닌, 야전군 사령관 자리 를 주지. 고위 작위와 남부럽지 않은 재산 또한 마련해주마.

그러자 길게 흘러나오는 어떤 인물의 목소리.

- 연방 통령께서 네놈의 능력을 높이 사셨다. 그분께서는 자네가 연 방군에 합류해 그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시길 원하시는군.

"맙소사."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일 터다.

다름 아닌 저 대리석 바닥에 쓰러 져있는 인물. 황제의 측근인 카디르 국방성 장관의 음성이었으니 .

나는 재차 강조한다.

"카디르 국방성 장관은 연방의 첩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자리에서 처치했습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군! 카디르 가 연방의 첩자였다니… 이게 무슨…."

깊은 한숨을 내쉬는 아르테니아. 그의 표정에는 혼란과 착잡한 감정 이 뒤섞여 복잡해 보였다.

차마 믿기도, 그렇다고 놈을 처 형한 나를 의심하기에도 힘든 상황.

한참이나 고민하던 황제가 고개 돌려 내게 말해온다.

"… 한지훈. 일단 자리를 옮기지."

아무래도 그는 나와 독대하고자 하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의 뒤를 따랐다.

"황실 기사들의 조사 결과가 나 왔네. 카디르의 자택을 수색했고, 연방 정보국 배지와 대화 기록의 진위 여부를 판독했네."

황제가 따로 마련한 응접실 안. 우리는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그가 가장 먼저 말한 것은 카디 르에 대한 조사결과.

나는 물었다.

"결과가 어떻습니까?"

"믿기 힘들지만. 카디르는 연방의 첩자였더군. 자네가 제출했던 증거는 모두 진품이었고, 저택에서도 연 방과 통신했던 암호문들이 대거 발견되었어."

황실 기사단은 기민하게 움직였 고. 이 잠깐 사이에 카디르가 연방 첩자였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 낸 듯하다.

역시나 제국군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엘리트인 황실 기사들은 유능했다. 일이 일어난 지 채 한 시간 이 되지 않았음에도 모든 조사를 끝마치다니.

황제가 한탄하듯 말했다.

"솔직히 믿고 싶지 않은 결과이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군.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해. 카디르는 나 를, 이제국을 배반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작 반나절 전만 해도 얼굴 만 면에 미소 짓던 인물이었는데 . 지금 그의 얼굴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내게 말해왔다.

"한지훈. 자네도 알고 있겠지. 연 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연방은 북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에서도. 그리고 이곳 제국 황궁에서 도 뒤에서 암약했었다.

하지만 놈들의 수작질은 모두 실패했으니 .

슬슬 전면에 나서려 할 터.

"놈들은 이곳 남부대륙을 노리고 있다."

연방은 침공해 올 것이다.

이미 완전히 통일한 동부대륙에서 충분히 힘을 기른 지금 남부대륙으로 진줄하려 하는 것이다.

황제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수정구를 건드렸다. 그러자 음성이 흘러나온다.

역시나 카디르의 목소리였다.

- 그리고 그 연방이 남부대륙을 침공해올 때가 머지않았다. 곧 제국 은 무너지고, 연방군이 밀어닥칠 거 란 말이다.

연방이 침공해 올 것임을 밝히는 놈의 목소리.

쯧. 황제가 혀를 차며 말한다.

"들려오는 정보가 하나같이 심상 치 않아. 연방에서 대규모 병력과 군량이 해로를 통해 람셀과 자치령 으로 수송되고 있다."

실제로 놈들의 침공준비는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람셀을 지원하는 한편, 대규모 병력을 남부대륙으로 파병하고 있었으니 .

"모든 정보가 연방의 제국 침공을 가리키고 있다. 놈들의 침공은 확실한 일이라 봐야하겠지."

연방의 침공은 확실한 일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방의 침공. 이전 시나리오에서 도 이맘때쯤에 이루어졌었지.'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에서도 그러했었다.

내가 제국군 군단장이 되고, 남부대륙을 거의 통일할 무렵.

연방군이 남하해 왔었다.

지금이 그 시기다.

놈들의 침공이 머지않았다.

이제 놈들은 대량의 군세를 이끌 고 내려올 것이다.

람셀에서 시작된 동부전선을 순식간에 밀어버리고, 제국의 중앙부 까지 쳐들어와. 대규모 회전을 수도 없이 일으킬 것이다.

이전 시나리오의 놈들이 그러했 듯이.

그렇게 내가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한지훈. 자네에게 물어보지."

문득 황제가 말했다.

물어볼 내용이 꽤나 중요한 내용 인 것일까. 그의 얼굴은 퍽 심각했다.

"자네라면. 연방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나?"

"연방이라…."

나는 천천히 고뇌해봤다.

크루거 연방. 동부대륙 전체를 일통한,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진 국가.

놈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만."

놈들은 강하다.

막강한 국력. 대량의 군세. 막대 한자본. 영토는 동부대륙 전체에 달하며, 무시무시한 수준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

전생의 나 또한 흑마법사의 조력 이 없었다면 패배했을 적.

허나 이번 시나리오의 나에게는 흑마법사라는 아군은 없다. 더해 난 이도 또한 엿같이 올라가버렸다. 시스템 관리자의 개입이라는 예측불 허의 변수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저라면 가능합니다."

놈들을 이길 수 있다.

나에게는 스킬과 능력치가, 포인트를 모아 상향시켜놓은 유저 보정 이 존재한다.

어디 그뿐인가.

이전 시나리오의 기억을 되살려 얻은 아군 또한 있다.

내 영지 루벤에 있는 나의 측근 과 세력원들. 더해 나와 우호관계를 다진 여러 인물들의 조력까지.

그것들이 있다면, 이길 수 있다.

"…그래. 허언은 아닌 것 같군. 하긴 허언할 리가 없지. 그 누구도 아닌 자네인데 말이야."

내 대답이 흡족했던 것일까.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황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르륵.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

"한지훈. 나는 사실 자네를 중앙 군으로 인사이동 시키려 했네."

황제는 그리 말하며 창가로 다가갔다. 나 또한 그를 따라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자 황궁 밖 제국 수도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새벽이 지나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 붉은색으로 환하게 물들어가는 제국 수도의 모습.

황제가 창밖 도심 전경을 바라 보며 말한다.

"자네가 그동안 고생했으니 , 중앙에서 휴식하며 세력을 가다듬으라는 의도였지."

휴식이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지만 상황이 자네를 쉬게 만들지 않는군."

지금 휴식 따위는 사치에 불과한 상황이다.

황제가 창가에서 시선을 때,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지훈. 자네의 북부 13군단을 동부전선으로 이동시킬 거다."

그가 말해오는 것은 13군단의 이전 소식.

씨익. 아르테니아가 웃는다.

"자네에게 독단 전행을 허가해주 지."

"독립 작전권을 부여해주시는 겁 니까?"

"그렇다네."

놀랍게도, 황제는 내게 독립 작 전권을 부여해주려 하는 듯하다.

상급자의 명령 없이 자율 행동할 수 있는 권한.

일개 백인대나 천인대 수준이 아닌, 무려 군단 단위에 독립 작전권을 부여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아직 황제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지훈 라이젠 후작.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줄 영지를 아직 말하지 않았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되었다. 보다 높은 작위 를 받은 만큼, 그에 맞춰 새로운 영지를 하사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 영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가 나직이 말해온다.

"이번 전쟁에서 연방군을 몰아내 고 람셀을 정복하게 된 뒤 한지훈, 자네는 제국의 공작이 되어 람셀의 총독직을 수행하게 될걸세."

"…그게 무슨?"

처음,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큼 너무나도 밑도 끝도 없는 소리였기 때문에.

하지만 이해하는 순간.

"말도 안됩니다!"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총독이라니요?! 일개 군관에 불과한 제??맡기에는 너무 과분한 자리입니다!"

람셀의 영토는 넓다.

지금은 제국 때문에 다소 위축되어 있다 하나. 한때 남부대륙의 열 강이었던 국가이다. 자연히 많은 수 의 인구와 드넓은 영토를 지닌 국가 중 하나다.

그리고 방금 전 황제가 한 말.

내게 람셀 총독직으로 임명하겠 다는 그의 말은, 말 그대로 과거 람셀령이라는 국가 전체를 내게 넘 기겠다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물론 완전히 내 영지가 되는 것 이 아닌, 어찌 보면 관리직이라 할 수 있는 자리였지만.

허나 그렇다 한들 그 위세가 일 국의 국왕에 상응할 정도로 대단한 자리다.

때문에 제국에서는 오직 황가의 인물들만 맡아왔던 자리.

고작 군단장에 불과한 내가 맡기 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자리다.

"받을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

그렇기에 나는 총독직을 사양하 려했다.

허나 아직 내게 할 말이 남아있던 것일까.

황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지훈. 이번 연방의 수작 때문에 더욱 확실히 할 수 있게 되었 네. 자네는 내 우군이야."

나는 고개 돌려 그의 얼굴을. 정확히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찬란한 빛을 품고 있는 황금색 눈동자. 그의 눈빛에는 나에 대한 신뢰가 진하게 서려있었다.

내 무엇을 보고는 이토록 신뢰의 눈길을 보내는 것인가.

금세 알 수 있었다.

'연방의 영입 제안.'

나는 연방의 영입제안을 걷어찼다.

연방의 야전군 사령관 자리와 막 대한 재화, 고위 귀족직, 그리고 주변 측근들의 신변으로 압박했음에 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 강성한 연방의 제안조차도 걷어찬 인물이었으니 제국에 대한 애국심은 의심할 필요가 없지."

황제는 나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한지훈. 나는 자네를 키울 것이네. 지금보다도 더욱 위대하게. 보다 찬란하게."

황제는 이전보다도 더더욱 나를 밀어주려는 듯했다.

솔직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은 후작이지만. 언젠가는 공작, 그리고 어쩌면 대공까지."

그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면 얼마나 드높이 올라갈지.

황제가 씩 웃으며 손을 내민다.

"나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자, 가장 믿음직한 친우여. 자네만 믿겠 네."

나는 잠시 그의 손바닥을 바라보고는,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우리 제국을 위해 헌신해주게."

연방과의 전쟁.

머지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