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통령각하. 보고드립니다."
넓고도 화려한 집무실 안. 정갈 한 제복을 갖춰 입은 군관 하나가 입을 열었다.
연방 정보국 사령관의 직책을 가 진 인물. 발쿠롬 에반스테일 후작이었다.
그가 커다란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이에게 어떤 서류를 내민다.
"제국이 마침내 코르자카 공화국 까지 복속시켰습니다. 이건 그 보고서입니다."
그에서류를 받아드는 한 청년. 은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인물이다.
연방의 통령 러셀 베티스 사인펠 드.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서류를 개 봉한다.
"그래. 코르자카 공화국까지 끝났 다고…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빠르 군."
펄럭.
러셀의 눈동자가 서류를 읽어간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점차 흥미로운 기색이 일기 시작한다.
한참이나 서류를 훑어보던 러셀 통령이 작게 미소지었다.
"대단하군. 한지훈. 설마 이런 식 으로 코르자카까지 정리해버릴 줄 이야."
대단하다던 통령의 감탄. 맞은편에서있던 발쿠롬은 미약하게 눈가 를 찌푸렸다.
통령은 결코 쉬이 누군가를 치하해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헌데 그가 적의 능력에 감탄하다니. 그를 보좌 하는 군관인 발쿠롬으로선 썩 유쾌 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통령은 그런 발쿠롬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무심하기만 하다.
팔랑.
통령이 서류를 넘겨가며 읊조린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야. 단 하나 의 전장조차 정리하지 못하는 장성 이사방천지에 깔렸거늘. 저자는 세 개의 전선을 모두 제압했어. 그것도 그때마다 다른 방식을 사용해서."
카렌왕국과의 전쟁에서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의 전력을 쓸어버렸다.
트웨인 왕국과의 전투에서는 우 월한 지휘능력과 가히 절정에 이른 기마술을 십분 활용해 적장을 굴복 시켰다.
코르자카 공화국에서는 엘프의 힘을 빌려 흑마법사와 의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다양한 방법으로 벌써 다수의 국가를 굴복시키거나, 합병시켰다.
그만큼 한지훈의 능력은 범상치 않았다.
전장을 누비는 개인으로서의 무력도, 군단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서의 카리스마와 전략적 안목도, 거기에 외부세력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외교적 능력까지.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우월했으니 .
러셀 통령이 작게 중얼거린다.
"마치 이 세상을 이미 한번 정복 해본 것만 같군."
한지훈의 행보가 너무나도 파격 적이었기에.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해 보는 러셀이었다.
피식. 그가 웃으며 말한다.
"뭐. 우리 연방이 있는 한 녀석 이 절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한지훈의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자는 제국에 소속되어 있다.
반면 러셀 통령이 이끄는 연방은 명실상부 이 세계의 최강대국.
동부대륙 전체를 통일한 연방이 라면, 제아무리 한지훈이라 한들 이 기지 못할 것이리라. 그리 여기는 러셀이었다.
그가 발쿠롬에게 묻는다.
"정보사령관. 내가 지시했던 일들. 어찌 되었지?"
"지시한 일들이라 하신다면."
"한지훈에 대한 공작 말이네."
이전에 러셀 통령은 발쿠롬에게 한지훈에 대한 작업을 지시했던 적 이 있었다. 지금 그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에 발쿠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준비작업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신다면.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러셀.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지시했다.
"실행하게. 지금 당장."
"명령을 따릅니다. 우리의 통령이 시여."
"가보도록."
덜컹.
발쿠롬이 집무실 밖으로 퇴장한다.
이제 그는 미리 제국으로 파견했 던 세작들을 운용하여 한지훈에 대 한 회유와 압박들 동시에 진행하리라.
러셀 통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한지훈 라이젠. 과연 네 선택은 어찌 될 것인가."
그가 발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간다. 창밖으로는 새벽의 적막 속에 가라앉은 그들의 수도가 보인다.
지평선까지 빽빽이 채워버릴 정도로, 무수히 많은 수의 건물들. 펄 럭이는 연방기. 도시의 이곳저곳에서 반짝이는 불빛들까지.
그가 야경을 바라보며 읊조린다.
"내 제안을 받아들여, 연방에 붙을 것인가. 아니면 거절해 제거당 할 것인가."
이번에 한지훈은 선택해야 할 것 이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제국을 배반하고 연방에 붙을 것인지. 혹은 거절해 싸울 것인지.
"뭐. 둘 모두 어찌되든 좋은 일 이지."
러셀에게는 아무려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의 선택에 어떠하던, 이익을 보는 것은 연방이었으니까.
제안을 수락해 한지훈이 연방에 붙게 된다면 러셀은 뛰어난 인재를 가질 수 있게 되고, 거절한다면 추후 남부대륙 정벌에 방해되는 인물을 미리 제거할 수 있으니 .
하지만 한지훈에 대한 미련이라 도 생긴 것일까.
"가급적이면 우리 연방으로 투신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러셀이 작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가 집무실에서 한지훈의 소식을 기다린다.
황궁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드넓은 연회장 곳곳에 그득 찬 여러 호화로운 진미들. 웨이터들이 술과 음료를 나르고, 황궁악단이 잔 잔한 음악을 연주한다. 귀족들이 분 주히 돌아다니며 사교활동을했다.
그리고 나는,
"역시 이런 자리는 불편한가? 한지훈."
"뭐, 그렇습니다. 황제폐하."
연회장 2층에 자리한 테이블 한 켠에서 황제와 독대했다.
황제가 와인잔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자네를 환영하는 자리이 니, 모습을 많이 비춰주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미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사실 여기 연회장 2층으로 올라 오기 전에 충분히 많이 돌아다녔다. 얼굴도 모르는 귀족들이 앞다퉈 자신을 소개해오는 통에 정신이 하나 도 없었다.
역시 나는 이런 사교자리에는 맞 지 않는다.
잠시 연회장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나직이 물었다.
"그래서 한지훈. 나와 독대해서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
아르테니아가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사실 지금 내가 요청하고자 하는 일은, 어찌 보면 제국에게 반기를 드는 것으로 해석될 요지가 있었다.
기껏 정복한 코르자카 공화국에 자치권을 부여해달라니.
그것도 엘프에게 대의원 자리를 맡겨달라니.
그렇게 내가 고뇌하고 있을 때였다.
"한지훈."
피식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아 르테니 아.
그가 와인잔을 천천히 흔들며 이어 말해온다.
"분명 코르자카 공화국의 전후처 리에 관해 할 이야기겠지. 그렇지 않나?"
"그걸 어떻게…."
"제가 말했거든요."
또각.
구두소리와 함께, 여성의 미성이 들려온다.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본다.
그곳에서는 니디아가 천천히 걸 어오고 있었다.
"한지훈 씨가 번거로우실까, 제가 미리 제국황제와 담판을 지어놓았 지요."
털썩. 테이블 한켠을 차지하는 니디아. 그녀가 위에 놓여있던 와인 잔을 들어올리며 말한다.
"사실 코르자카 공화국 공략에는 저희 엘프들의 지분이 있기도 했었 고요. 그래서…."
"내가 미리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국 황제와 협상했다 그건가."
"네. 맞아요."
싱글싱글 웃는 니디아. 그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내쉬었다.
시선을 돌려 황제를 바라봤다. 그런 내 시선에, 황제는 재차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우리 제국은 코르자카 공화국을 자치령으로 삼았다. 일단 은 제후국으로 편입되니, 우리 제국 에게 조공을 바쳐야 되겠지만. 내부 정치문제에는 손을 대지 않을걸세."
"정말입니까?"
"그래. 사실, 본래 코르자카를 자치령으로 운영할 생각이긴 했어."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자카 공화국은 섬나라다. 그런 섬나라를 대륙국가인 제국이 세 세히 관리할 순 없었다.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접근성은 다른 제후국이나 식민지들보다 뒤떨어졌고. 군대와 관료들을 파견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황제는 이전부터 코르 자카에는 자치권을 부여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엘프 여왕 대리 니디아가 요청해온 것이다.
"엘프가 그간 제국과 협력했던 공을 봐. 대의원 자리에 엘프가 가는 것 정도는 용인하기로 했네. 대신 우리 제국과 엘프가 더욱 긴밀 하게 협조하기로 약조했지."
확실히 엘프들은 알게 모르게 제국과 합을 맞추어 왔다.
제국 수도에서, 카렌 왕국에서, 그리고 코르자카 공화국에서.
엘프들은 흑마법사가 나타날 때마다 제국군과 함께 적을 토벌했다.
"그토록 제국에게 큰 도움을 주 었던 엘프다. 그에 대한 대가가 고작 코르자카 공화국의 자치권 정도 라면. 몹시 싸게 먹힌 것이지."
황제가 와인으로 입가를 축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니디아를 바라봤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군그래."
"응? 그건 아니에요."
내 말에 니디아가 단칼에 부정한다.
달그락.
그녀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황제가 한지훈 씨를 아끼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협상이었지요."
"그게 뭔 소리야?"
"한지훈 씨가 연관되어있지 않았다면, 황제는 아마도 제안을 거절했을 걸요? 어찌 보면 내정간섭이니 까요."
그렇긴했다.
제후국의 수장으로 엘프를 앉히 란 요청. 그 어떤 국가가 들어줄까.
"하지만 이 일에는 한지훈 씨가 연관되어 있고. 황제는 한지훈 씨를 신뢰하고 있었으니 , 밀어주려는 뜻 이겠지요."
"그런가…."
시선을 돌려 황제 아르테니아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픽 웃었다.
"한지훈. 내가 자네를 좀 많이 아낀다네. 그런 자네가 신뢰하는 엘프다. 적어도 우리 제국에 해로운 일은 없겠지."
"전쟁이 아니라 정치 쪽으로 저 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만."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정치와 사교에는 무지에 가깝다.
작위는 후작이지만.
아마 정치적인 수완이라면 일개 남작보다도 못하지 않을까.
"뭐. 그럴 수도 있지만. 허나 한지훈,"
드르륵.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서 며 말한다.
"자네는 스스로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군그래."
"스스로의 가치라 하신다면."
"만약 자네가 코르자카 공화국 전체를 달라 했어도 나는 들어줬을 거다. 그만큼 자네는 내게, 그리고 우리 제국에 소중한 존재가 되었 어."
황제의 말에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식민지 하나를 통째로 달라면 주었을 정도라니. 그 정도로 나란 존재가 이제국에 필요한 것 인가.
아르테니아가 씩 웃는다.
"그만큼 자네가 중요한 존재가 되었어. 그러니 필요한 게 있다면 내게 말해다오. 한지훈, 자네가 원 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들어 주지."
"너무 과한 대우 같습니다만."
"자네처럼 대단한 인물을 품으려 면 이 정도 공은 들여야지. 어쨌든, 해야 할 말은 끝났다. 나는 연회장을 좀 더 둘러봐야겠군. 편히 있게."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국에 중요한 존재라…."
이번 수도에 와서 뼈저리게 느끼 고 있다.
과거 병사로서 전장을 굴러다닐 때도, 장교가 되어 병력을 지휘할 때도, 군단장이 되어 전략단위의 대규모 전투를 다룰 때도.
나란 놈이 제국에 중요인물이라는 걸 결코 체감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저 그뿐.
허나 이곳 수도에서는 아니다.
"한지훈 씨. 당신은 제국의 영웅 이에요. 전 제국민이 믿고 따르는. 이제 좀 체감되나요?"
니디아가 그리 말한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그렇네."
개선식에서, 연회장에서, 그리고 황제의 입에서.
내가 제국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 다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 묘한 기분이다.
그렇게 내가 니디아와 자리에 앉 아있을 때였다.
"한지훈 경."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 그쪽을 바라본다. 역시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정갈한 제복차림을 한 고위 관료.
"카디르 국방성 장관 합하."
카디르 국방성 장관. 그가 갑작 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벅, 저벅, 털썩.
그가 자연스럽게 걸어와 테이블 한켠에 합석한다. 나는 물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한지훈.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네."
카디르는 그리 대답하고는, 품속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꼬나물었다.
화륵.
붙는 담뱃불. 회색 연기가 피어 오른다.
"먼저 말해두지. 이번에 자네에게 할 이야기는 제국 국방성 장관으로 서 할 이야기가 아니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게 뭔지 아나?"
달그락.
그가 작은 배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눈에 익숙한 배지다.
내 표정이 급격히 썩어들어간다.
"나는 연방 정보국 소속 세작이다. 자네에게 우리 위대하신 연방 통령각하의 제안을 들려주지."
국방성 장관 카디르는 연방의 끄 나풀이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거절하든, 말든. 자네 마음이야. 하지만 자네의 선택에 따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하게. 한지훈 라이젠 후작."
나는 카디르를 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