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나는 꿈을 꿨다.
- 한지훈.
고개를 들어올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빛 한 점 없이 어둑한 공간. 오직 암흑만이 자리해있는 공간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질척하고도 기분 나쁜 음성.
-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붉은색 안광이 반짝 인다. 나는 곧장 말해오는 인물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크라함."
확실하다.
기분 나쁜 목소리, 꺼림칙한 존재감.
비록 그가 풍기는 기세는 이전에 비해 한없이 나약해졌지만. 나는 내 꿈속에 등장한 인물이 크라함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목소리가 이어 들려온다.
- 네놈은 내 몸을 완전히 파괴했고, 그동안 내가 모아온 격과 마나 를 모조리 소멸시켰지만. 허나,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붉은색 안 광. 더욱 밝게 타오른다.
- 내 영혼은 소멸시키지 못했다.
피식.
나는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죽은 놈이 꿈속에서 나오다니. 참 징글징글한 녀석이야."
직감했다.
이것은 내가 꾸고 있는 꿈이었지만, 평범한 꿈은 아니었다.
아마도 크라함의 사념 비슷한 무 언가가, 꿈속에 등장해 내게 직접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놈의 말이 이어진다.
-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한지훈. 네놈의 몸과 격을 빼앗아, 나는 언젠가 신성을 획득할 것이다.
저것이 녀석의 목적이었다.
유저인 내 몸을 빼앗고 격을 획 득해 막대한 양의 마나를 모아.
신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
허나 어림도 없다.
"몸뚱아리조차 없는 놈이 포부 하나는 대단하군그래."
나는 놈의 신체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놈의 수하들 또한 마지막 전투에서 희생되어 대다수의 세력이 전멸했다. 세계검 또한 파괴되어 사 라졌다.
지금 크라함이 가진 것은 아무것 도 없다.
세력도, 흑마나도, 수하도, 심지 어 자신의 신체조차 없이.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모종의 방법으로 보호했을 영혼뿐.
전시나리오에서 나와 함께 세계 를 멸망시켰던 놈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영락한 모습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크라함. 어째서 너는 신이 되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거냐."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네 정도의 경지라면. 충분히 신 따위가 되지 않아도 영생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전생의 동료였기 때문에 나는 놈 의 흑마법 경지를 잘 알고 있다.
크라함은 혹마법 학파 볼라바아 의 종주였다.
현재까지 토벌되지 않고 유일하 게 살아남은 흑마법사 학파.
놈은 장생한 엘프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이미 놈은 일개 생명체의 법칙을 완전히 초월했기에, 마음만 먹는다 면 영생할 수도 있다.
"그냥 어디 구석에 처박혀서 편하게 살 수도 있지 않나?"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안된다.
어째서 놈은 신의 자리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였다면 그저 영생을 즐기며 살아갈 터인데.
단순히 생명을 위한 집착이라기 에는 놈의 목적이 너무나도 드높다.
그에 놈이 대답한다.
- 신이 되어야만 내 운명을 초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설마 진짜 대답해줄 줄은 몰랐는데 .
놈의 말이 이어진다.
- 상위차원의 존재인 네놈은 모 를거다. 운명에 속박된 지성체의 삶. 얼마나 무기력하고도 덧없는지 를.
붉은색 안광이 몽롱히 흔들린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듯한 모습.
- 어둠이 되길 원치 않음에도 어둠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있다.
- 빛이 되길 희망했음에도 타락 할 수밖에 없었던 영혼이 있다.
- 시나리오에 의해 정해진 세상.
- 그리고 나는 세상에게 저주받 았다.
지금 크라함은 운명론을 말하고 있다.
블랙 오케스트라는 결국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세계에 불과했다.
내가 게임으로 즐겼던.
허나 지금은 현실이 되어버린.
- 네놈은 모른다.
- 내가 이 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 경지를 높여, 수없이 회귀를 반복하며 몇 번이나 절망했는지를.
가만히 놈의 음성을 들으며 추측 해본다.
아마도 크라함은 그저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려 했던 것이 아닐까.
흑마법사의 종주이자 세계의 적 이 될 운명을 바꾸기 위해, 신격을 얻어 시나리오를 초월하려 했던 것 이 아닐까.
놈의 말이 이어진다.
-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한지훈.
- 유저이자 상위차원의 존재인 네놈이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이 세상에 나타났다.
- 나는 네놈의 격과 그릇을 빼앗 아 신이 될 것이다.
붉은색 안광이 점차 흐릿해진다.
- 내 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날 것이다.
놈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시야가 암전했다.
"… 님! 한지훈 님!"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든다. 그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익숙한 인물. 초록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다.
"한지훈 님! 그만 좀 처 자시고 일어나시죠? 곧 수도에요."
"니디아. 내가 얼마나 졸았지?"
"대충 10분 정도? 그렇게 오래 졸지는 않았어요."
나는 마른세수를 해 정신을 차리 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나는 마차 안에 앉아있었다. 더럽게 크고도 호화로운 팔두마차 말이다.
그리고 팔두마차는 오직 제국 황제와 그 측근들만이 탈 수 있는 마차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도 역시나 익숙한 인물이 자리해있다.
"한지훈 라이젠 경. 너무 푹 자 더군. 피곤했나 보지?"
황금색 머리카락, 황금색 눈동자.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는 고귀한 외양의 미청년.
청년은 그 찬란한 눈동자를 이쪽 으로 향하며 싱긋 웃는다.
"하긴 피곤할 수밖에 없겠지. 바로 어제까지 그토록 고생했으니 말이야. 허나 제국 민중들이 전쟁영웅 인 자네를 환영하고, 승전을 축하하는 개선식 자리다. 피곤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주면 좋겠어."
"황제 폐하."
다름 아닌 제국의 황제, 아르테 니아였다.
나는 시선을 돌려 마차의 차장 밖을 바라봤다.
그곳에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설마 개선 행진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말입니다."
무수히 많은 병력이 보인다. 내 휘하인 북부 제13군단이 포함된 대규모 행렬이었다.
화려한 갑주를 잘 차려입은 채, 전투마를 타고 마차를 호위하는 황 실 기사들. 커다란 제국기를 드높이 치켜든 기수들과, 그들을 뒤따르는 병사들.
대량의 군세. 절도있는 발자국. 군악대가 울리는 웅장한 음악 소리.
우리는 개선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르테니아가 밖의 경관을 바라 보며 말했다.
"사실 진작에 개선식을 하려고 계획했었지. 하지만 자네가 너무 바 빠서 기회가 없었어. 우리 제국을 위해 뛰는 건 알고 있다만. 여유가 생겼을 때 수도에 얼굴을 비춰줬으 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나는 코르자카 공화국에서의 일 들을 모두 마치고 귀환했다. 초장거 리 마법을 통해 도착한 장소는 바로 수도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군사기지.
그곳에 황제와 니디아가 기다리 고 있었다.
이 커다란 팔두마차와, 대량의 군세를 데리고 말이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제국민들에게 확실히 인식시켜 야지. 전쟁이 제국의 승리로 기울었 다는 것을. 벌써 세 개의 국가가 멸망하거나 복속되었고 전쟁이 끝 나간다는 것을 말이야."
황제는 성대한 개선행진을 기획했다.
개선식.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군대를 치하하기 위해 여는 행사다. 그리고 개선식의 주인공은 대부분이 전쟁에서 커다란 공훈을 세 운전쟁영웅이 맡게 된다.
당연하게도.
이 개선식의 주인공은 나였다.
"자네의 이름은 전 제국민 중 모르는 이가 없지. 한지훈 라이젠. 자네가 직접 모습을 보여 전쟁에 지친 제국민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우리 제국의 강대함을 널리 알릴 기회다."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 카렌왕국은 제국의 식민지 가 되었고, 동부 트웨인은 제후국이 되었으며. 남부 코르자카 공화국 또한 얼마 전 정리되었으니 .
남아있는 적은 람셀밖에 없다.
전쟁이 거의 끝나간다. 제국의 승리가 가까워져 온다. 개선식을 열기에 충분한 상황.
나는 마차의 전방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성벽과, 똑같이 커다란 크기 의 성문이 보인다.
제국 수도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 그것이 쩌어억 열렸다.
문을 넘어서서 진입하는 팔두마차.
"자, 이제 수도에 진입하는군. 조금 시끄러울걸세, 한지훈."
황제가 그리 말하고, 직후 들려 왔다.
와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마차의 밖을 바라봤다.
보인다.
"아르테니아 황제 폐하 만세!"
"한지훈 라이젠 장군 만세!"
"위대한 제국을 위하여 !"
무수한 인파의 무리가.
그들이 마차를, 그리고 행군하는 군대를 향해서 열렬히 환호성을 내 질렀다. 군악대의 음악 소리가 함성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펄럭, 후드득.
이곳저곳에서 색종이와 꽃들이 날아왔다. 마치 비가 내리는 것 같다. 그만큼 날아드는 꽃과 색종이가 많았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대로를 따라 이동한다. 그러는 동안 잠시도 함성 소리와 꽃이 뿌려지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작게 중얼거렸다.
"대단하군요."
이토록 열렬한 환호라니.
내 중얼거림을 들은 것일까. 황제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대단할 수밖에 없지. 전 제국민 의 영웅이 된 자네가 마침내 수도에 돌아왔네. 환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유명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이전부터 계속 들어왔던 소리였 으니까.
평민 출신 병사로 시작해 지금은 백작위를 얻고 군단장에 도달한 입 지적인 인물. 무수히 많은 전장에서 끝없이 전공을 세워온 전쟁영웅이 자, 제국을 위기의 수렁에서 건져 올려낸 구원자.
"한지훈. 기분이 어떤가?"
한지훈 라이젠.
내 이름과 귀족 작위명이 합쳐진 기괴한 이름.
저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연 호하며 기뻐하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미소가 올라왔다.
"나쁜 기분은 아니군요."
새삼 뿌듯함이 느껴졌다.
이 염병할 게임 속 세상에 끌려 들어와서 얼마나 굴러다녔는가. 얼마나 많은 부상을 입고 고생했는가.
허나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나를 환영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고생들이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기분이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여덟 개의 말이 마차를 끈다. 호 위하는 황실 기사들. 뒤따르는 대량 의 병력. 좌우에서 환호하는 무수한 인파.
대로를 따라 나아간다.
그렇게 얼마나 왔을까.
"도착했군."
황궁 앞 대광장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전에 내 작위 수여식이 있었던 장소. 그곳에는 역시나, 커다란 강 단이 설치되어있다.
그리고 수많은 기사들과 제국 시민들이 강단 앞에 도열해 있었다.
마차는 연단의 바로 앞까지 나아 가 멈췄다.
덜컹.
문이 열린다. 직후 나는 다시금 익숙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아르테니아 황제 폐하, 그리고 한지훈 경."
"갈람프 단장."
갈람프 디 브리기테.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인물. 그가 화려한 전 신갑추를 착용한 채 우리를 기다리 고 있었다.
저벅, 저벅.
나와 황제, 그리고 니디아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러자 갈람프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한지훈. 자네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지. 오랜만일세. 저번 수도전투 이후로 처음인가?"
"그렇지. 오랜만이야."
이전과 달리 높임말은 쓰지 않았다. 이제는 나 또한 단장직을 맡고 있었기에서로 동급이었으니 .
갈람프와 악수했다. 그가 대견하 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안내한다.
"자, 위로 모시겠습니다. 황제 폐 하. 그리고 한지훈, 자네는 폐하의 뒤를 따라 올라가도록."
나는 갈람프의 안내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설치되어있는 강단의 위로, 계단을 타고 오른다. 시야가 높아졌다.
대광장에 모여있는 인파를 비로소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광장 전체가 꽉 차 있다. 사람들 이 발디딜 틈 없이 몰려들어 함성을 내지르고 있다.
그들이 연호하는 것은 역시나 황제와 내 이름.
"한지훈. 그동안 수고했다. 자네 덕분에 이 힘든 전쟁을 이겨낼 수 있었지."
황제 또한 몰려든 인파를 바라보고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그리 말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한지훈. 자네는 제국의 축복이 야. 자네가 있어 정말 다행이네. 그대가 없었다면 필시 제국은 위태로 웠겠지."
"과찬입니다."
"겸손이 과하군. 그럼, 이제 예정 된 절차를 진행해보지."
그가 연단에 올라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바로 옆에 도열해 있던 마법사가 수정구를 건넸다. 음성 증폭 아티팩트였다.
황제가 수정구에 마나를 흘려넣 으며 말했다.
- 지금부터, 루벤의 영주이자 제국 북부 제13군단의 군단장. 한지훈 라이젠 백작의 승작식을 진행하 겠다.
개선식 겸 승작식이 진행되었다.
나는 후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