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239화 (239/390)

239화.

크라함은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 를 지닌 사내.

- 한지훈.

전시나리오에서는 아군이었으나, 현생에서는 적이 되어버린 인물이다.

한지훈의 모습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주변 공간을 장악해 가는 장엄한 기세. 우묵하게 가라앉아 이쪽을 쏘 아보는 검은색 눈동자. 전신을 휘감 은 찬란한 황금색 광휘까지.

신성하고도 위대해 보이는 외양 이다.

크라함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 승산은 없군.

눈앞의 한지훈과 대비되게 크라 함의 몸은 만신창이었다.

그릇 없이 무리하게 많은 힘을 담아,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는 육체. 잘린 왼팔에서 줄줄 흐르는 검은색 핏물. 흐트러져 가고 있는 흑마나.

크라함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한지훈을 바라본다.

- 역시. 네놈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 이건가. 이길 수 없군. 준비는 완벽했다 여겼건만.

크라함은 승리를 확신했었지만, 패배하게 되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 시스템 관리자의 개입이라니.

크라함이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려 한지훈을, 정확히는 그의 바로 앞에 떠 있는 것을 바라본다.

본래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허 나 흑마법사들을 수확함으로써, 격 의상승을 일시적이나마 이루었기 에. 지금은 보였다.

시스템 홀로그램.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자신이 어찌 손 쓸 수 없는 보다 상위의 존재, 시스템 관리자.

클클클.

크라함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네놈은 시스템의 비호를 받는 주인공이고, 나는 일개 배역에 불과하니. 하지만 나라면, 나라면 네놈을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었지.

그간 크라함이 해 왔던 준비들은 결코 하찮지 않았다.

자기 대신 한지훈을 견제할 대적자들을 양산했다. 주인공의 격을 훼 손하기 위해 세계검을 만들었다. 흑 마나를 축적해 일시적으로 격을 상승시켰다. 계속된 활동을 통해 시나리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정도의 준비라면.

주인공의 운명을 타고난 한지훈을 제압하고 그의 격을 빼앗아, 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자만이었다.

- 설마 시스템이 개입해 올 줄이 야.

크라함의 생각 이상으로 시스템 의 개입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설마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한지훈에게 승리의 길을 짚어줄 줄은.

하지만 아직 크라함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 한지훈. 제안 하나 하지.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눈앞의 인물을 바라봤다.

검은색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 어쓴 흑마법사.

전신에는 시이한 기운을 휘감고 있으며, 후드 안쪽에서는 한 쌍의 붉은색 안광을 번들거리고 있는 사 내다.

"크라함."

전시나리오에서 내 믿음직한 동료였지만, 현 시나리오에서는 나의 적이 되어버린 이. 흑마법 학파 볼 라바아의 종주. 크라함.

녀석은 방금 말했었다.

"제안이라니. 무슨 개소리를 지껄 이려 하는 거지?"

제안할게 있다고 말이다.

물론 들을 생각은 없다.

"나는 너를 바로 죽여버릴건데 말이야."

철그럭. 검을 들어올렸다. 보다 진한 오러를 끌어올린다.

화르르륵!

검날에 어린 황금색 오러광이 더더욱 화려해진다. 찬란한 광채가 어둠을 몰아내갔다.

이제 이 검날을 놈의 심장에 박 아 넣기만 한다면, 놈은 죽어버릴 것이다.

헌데 아직 녀석은 포기하지 않은 듯하다.

- 세상을 주마.

그가 나를 유혹하려한다.

- 한지훈. 전시나리오의 우리를 떠올려 봐라. 흑마법사와 제국.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동맹이었지.

크라함이 천천히 팔을 벌렸다.

가드를 푼 것이다.

그의 붉은색 안광이 조금씩 강해 진다.

- 남대륙을 통일했고, 서부대륙 의 유목민족과 상인연합을 복속시켰다. 동부대륙 크루거 연방을 멸망 시켰다. 중앙대륙 엘프와 드워프들을 노예로 만들었으며, 북부대륙에 뭉친 연합군을 쓸어버렸다.

"… 쯧."

나는 혀를 찼다.

놈이 이야기하고 있던 내과거. 그다지 유쾌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다.

탱그랑!

놈이 오른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스태프를 놔버렸다. 그것이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 한지훈. 나는 너의 본성을 잘 알고 있다.

천천히, 오른손을 이쪽으로 뻗는 크라함.

마법을 운용하려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 너는 나와 동류다. 이 세상의 암흑. 타락한 영혼을 가진 추악한 존재! 정복과 파괴, 학살에 희열을 느끼는 악귀!

크라함이 뻗은 손을 가지런히했다.

악수하자는 제스처.

- 내 손을 잡아라. 네게 세계를 주겠다. 전시나리오의 내가 그러했 듯이. 다섯 개의 대륙, 수없이 많은 지성체들. 그 모두를 네 발 아래에 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소리."

더 이상은 들을 필요도 없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서걱!

크라함의 오른팔이, 어깨부터 잘 려나간다.

- 크아아아악!

검은색 핏물을 후드득 흩뿌리며 휘청거리는 크라함.

녀석은 이제 양팔을 잃었다.

"확실히 말해주지. 나는 흑마법사 와 협력하지 않는다. 절대로."

전시나리오의 내가 흑마법사와 협력했던 이유.

블랙 오케스트라가 단순한 게임 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었 기에. 등장하는 것이 실제 생명을 지닌 사람이 아닌, 0과 1로 이루어 진 데이터 쪼가리로 여겼기 때문에.

큰 죄악감 없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아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나는 너처럼 악인이 아니야."

블랙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게임 이 아니었다. 실제 세상이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진정 생명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지성체들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서도 어찌 흑마법사와 함께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검을 내질렀다.

이번에 노리는 것은 크라함의 가슴팍.

퍼억!

내 장검이 놈의 심장이 있을 곳에 틀어박힌다.

- 크아아아아아아아!

크게 비명 지르는 크라함. 놈의 몸에서 검은색 기운이 스멀스멀 홀 러나온다.

콰드득. 검날을 비틀었다. 크라함 이 지면에 힘없이 쓰러진다.

이어 말했다.

"나를 너무 멍청이로 아는데 . 네 놈이 내 '그릇'인지 뭔지를 탐내고 있는거. 모를 줄 알았나?"

나는 바보천치가 아니다.

크라함이 내 육체, 영혼, 혹은 '격'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

설혹 손을 잡는다 한들. 놈에게 좋을 대로 이용만 당하다 나중에 배신당 할 것이 뻔했다.

뭐, 애초 협력할 생각이 아예 없었지만.

"헛짓거리 하지 말고, 순순히 뒈 져라 크라함."

나는 검날을 완전히 헤집었다.

콰드드득, 우직, 콰직.

고깃덩이가 갈리고 뭉개지는 소리. 하지만 나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 잠깐. 어째서."

나는 검을 뽑았다. 별다른 저항 없이 쑥 뽑혀 나오는 내 장검. 검 날을 따라 검은색 핏물이 질척하게 흐르는 것이 보인다.

시선을 돌려, 바닥에 쓰러져있는 크라함의 육신을 바라본다.

방금 전 내가 헤집었던 놈의 오른쪽 가슴팍은 완전 걸레짝이 되어 있다.

이어 중얼거렸다.

"어째서 심장이 없는거지?"

방금 전 검으로 놈의 가슴을 찔렀을 때.

장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래라면 검날이 전진하며 놈의 갈비뼈를 부수고, 내부의 심장과 혈 관, 폐까지 난자하는 감촉이 그립을 타고 올라와야 하는데 .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몸속이 오직 검은색 핏물 로만 이루어진 것 마냥.

"설마."

나는 쓰러져있는 크라함의 후드 를 벗겼다. 그러자 어둠속에 가려져 있던 놈의 얼굴이 드러나고.

"염병."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놈의 얼굴이 너무나도 징그러웠 기 때문에.

크라함의 얼굴은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살이 녹아 흘러내렸고, 이곳저곳에 뼈가 보였다. 눈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눈구멍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붉은색 안광이 번 들거리고 있었을 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놈의 몸뚱이가 이토록 추해졌단 말인가.

그해답은 곧 알 수 있었다.

"육체의 격에 맞지 않게, 너무 대량의 흑마나를 받아들여서 몸이 붕괴하고 있는 겁니다. 뼈와 장기 따위야 이미 녹아 사라져있지요. 크 라함의 육신은 순전 흑마법으로 조 종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근처에 설명충이 있었기 때문에.

물론 마게브 이야기였다.

녀석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알려준다.

"그래서 크라함이 한지훈 님을 노린 겁니다. 한지훈 님의 '그릇'은 그 어떠한 것이든 담을 수 있으니 까요."

"…내 그릇이라니."

"본래 한지훈 님은 상위차원의 존재. 하위차원인 이곳에서는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습니다."

마게브가 마법을 발현하며 그리 말한다.

화륵.

그의 손아귀에 일렁이는 붉은색 화염구.

아무래도 마게브는 크라함의 사 체를 불태워 정화시키려 하는 듯하다.

"지성체, 고격의 존재, 반신, 신, 시스템 관리자…. 말 그대로 뭐든지 될 수 있습니다. 그릇에 그만한 힘을 축적하기만 하면 말입니다."

마게브가 화염구를 크라함의 사 체에 던졌다.

화르르르르르륵!

순식간에 크게 일어나는 불길.

- 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아직 숨이 붙어있던 것일 까. 크라함이 째진 비명을 내지른다. 놈이 버둥거렸다.

마게브가 이어 말한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한지훈 님."

그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모처럼 진중한 얼굴. 눈동자가 마주쳤다. 마게브의 푸른색 눈동자는 너무나도 청아했다. 그 눈동자 속에 있는 감정을 읽었다.

염려와 걱정.

그리고 약간의 불안.

"한지훈 님의 안위는 이 세계 그 자체입니다. 만약 크라함 같은 이가 한지훈 님의 그릇을 취한다면…"

"말 그대로.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거군 그래. 결국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고 말이야."

"맞습니다."

마게브가 긍정하고, 나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지면에서 불타고 있는 크라함의 시신을 바라봤다.

타탁, 타다닥.

타들어가고 있는 크라함의 시체. 점차 검은색 잿더미로 화해 소멸해 가고 있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대로 끝났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크라함을 죽였다. 놈의 양팔을 자르고, 가슴팍을 후벼파, 시체를 불태우기까지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한 이 찝찝한 기분은 무어란 말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됐다. 일단은…"

고개를 들어올리고, 기지개를 쫙 펴 피로감 가득한 몸을 풀었다.

우드득하고 들려오는 관절소리.

몸을 풀며 읊조렸다.

"이제 보상을 확인해야지."

내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서브 퀘스트 - '유물 탈취 저지'를 '완벽하게' 완수했습니다!]

[높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포인트 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정산 포인트 : 50pt]

[추가 정산 포인트 : 30pt]

(기존 보유 포인트는 0pt입니다.)

(남은 포인트는 80pt입니다.)

80포인트를 얻었다.

물론 홀로그램은 서브퀘스트 완료창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 띠링!

[업적 달성!]

['업적 : 대적자 처치'를 달성했습니다! 포인트가 수여됩니다.]

[정산 포인트 : 30pt]

(기존 보유 포인트는 80pt입니다.)

(남은 포인트는 110pt입니다.)

"좋아."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크라함을 죽여, 대적자 처치 업 적을 다시금 달성했다. 도합 110포 인트를 보유하게 되었다.

만족스러운 보상이다. 고작 하나 의 서브퀘스트를 클리어한 것에 불과한데, 단번에 세 자리수의 포인트를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포인트는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 이번 퀘스트에서 가장 중요했던 물건이 아직 남아있다.

시선을 돌려, 이어둑한 지하공 간의 정 중앙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커다란 수정이 우뚝 자리해 있었다.

"유물도 찾아야겠지."

그것은 다름 아닌 유물이 봉인되 어있는 수정이었다.

쩌적, 쩌저적.

수정은 계속해 금이 가며 부서져가고 있었다. 크라함은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결계의 파훼작 업을 진행했었고, 그 여파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크라함은 이제 죽어버렸 고. 결계는 거의 다 깨져간 상황.

그리 어렵지 않게 유물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피식 웃었다.

"크라함. 죽쒀서 개 준 꼴이네."

만약 녀석이 결계의 파훼를 하지 않았다면, 봉인을 해제하느냐 꽤나 품이 들었을 터인데. 크라함 덕분에 번거로움을 덜었다.

과연 저 수정 안에는 과연 어떤 유물이 봉인되어 있을까?

절로 기대가 되었다.

나는 수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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