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그동안 나는 시스템 관리자라는 놈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 할 때마다 녀석이 방해해 왔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눈앞의 홀로그램을 천천히 읽어 본다.
워낙 극한의 가속 상태였기에, 전투 중임에도 읽을 시간은 충분했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시스템 관리자의 개입 안내창.
크라함을 세계의 적으로 규정한 것인지, 혹은 기존 시나리오를 따라 가기 위해 이곳에서 내가 이겨야 한다고 여긴 것인지.
시스템 관리자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
가진 포인트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실행했다.
그 결과는 보다시피….
['스킬 : 제국 검술(상급)'이 '엑스트라 스킬 : 집중'과 반응합니다!]
['스킬 : 제국 검술(상급)'이 '아티팩트 : 카탈리의 반지'와 반응합니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상향 됩니다.]
['스킬 : 제국 검술(상급)' 이상향됩니다]
스킬과 아이템들끼리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엑스트라 스킬과 검술 스킬의 성능이 상향되었다.
[유저의 '격'이 일시적으로 상승 합니다!]
내 격이 일순간 상승했다.
과거 한스 요한바르첸과 전투할 때 느꼈던 전능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구쳤다.
오러의 출력을 높여본다.
화르르르르륵!
가열 차게 타오르는 나의 오러. 오러의 색은 어느 순간엔가 바뀌어 있었다.
청아한 푸른색에서.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론 변화는 고작 오러의 색이 바뀐 것만으로 멈추지 않았다.
'느껴진다.'
새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분명 시야가, 청각과 촉각이, 후 각마저, 집중스킬에 의해 모조리 퇴 화해버렸음에도.
주변의 상황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전방에서 경악하고 있는 크라함 의 모습. 녀석의 떨리는 목소리. 이쪽으로 달려드는 두 명의 암흑기사. 그리고 배후에서 멍하니 내 등 뒤 를 바라보고 있는 엘프 전사들까지.
시야가 미치지 않음에도 선명하 게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다.
그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깨 달을 수 있었다.
'상급 검술이란 이런 것이었어.'
원시적인 육체 감각기를 사용하지 않고, 주변의 마나를 읽어 상황을 파악하고 있게 된 것이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개사기잖아.'
너무나 흡족했기에.
하급 검술이 그저 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었고, 중급 검술이 검에 오러를 실어 운용하는 것이었다면.
상급 검술은 육체감각을 초월해 마나로서 주변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장악하는 경지였다.
나는 눈을 감아본다.
그러자 시야가 완전히 사라졌음 에도. 오히려 주변의 모든 것이 더욱 선명하게 파악되었다.
- …롬! 베이먼! 시간을 벌어라!
크게 외치는 크라함.
그리고 이쪽으로 쇄도해오는 놈 의 두 수하. 암흑기사인 롬과 베이 먼이다.
좌측과 우측, 각 한명씩. 내 양쪽 팔다리를 노리고 사선을 그리며 짖 쳐 들어온다.
이전의 나였다면 꽤나 위협적인 적이었다. 놈들은 크라함의 측근답 게 퍽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 으니까.
하지만 격의 상승을 이룬 나에게는 피라미만도 못한 잡졸에 불과하다.
검을 휘두른다.
당장 파공성은 일지 않았다.
검날이 공기가 터져나가는 것보 다도 빠르게 허공을 갈라버렸기 때문에.
대신 선명하고도 화려한 황금색 광휘가 화려한 검로를 그렸다.
그 직후, 퍼어억! 후드득.
두 암흑기사의 목이 떨어져 허공 으로 치솟았다. 검은색 핏물이 비산 한다.
놈들의 표정을 읽어본다.
- 뭣….
그저 멍한 표정.
놈들은 자신들이 이토록 쉽게 당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을 터다.
나는 놈들의 머리통이 채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지면을 밟고 도약했다.
콰앙!
앞으로 쇄도해 가는 내 육신.
크라함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 한지후우우운!
그에 반응하는 크라함.
놈이 스태프를 치켜들었다.
- 네놈은 나를 이기지 못한다! 절대로!
과연 그럴까.
나는 검날을 곧게 내뻗으며 나아 가고, 그와 동시에 놈이 마법을 발현했다.
- 나는 이곳에서 죽을 운명이 아니란 말이다!
콰르르르르르르!
수없이 많은 검은색 마탄이 돌진해가는 나를 행해서 쇄도해온다.
얼마나 많은 양을 갈겨댄 것인 지, 마치 먹구름처럼 우르르 몰려온다.
저것에 맞는다면 내 몸은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겠지.
아무리 격이 상승하고 스킬을 상향시켰다 한들, 내내구 능력치는 그대로였으니까.
물론, 맞지만 않는다면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수직을 그리며.
공간을 가르는 황금색 궤적. 그리고 그 직후 들려오는 장중한 파 공성.
콰콰콰콰콰쾅!
마탄세례가 반으로 찢어발겨져 소멸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달려가 고 있던 상태.
놈과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 …망할!
놈이 재차 새로운 마법을 발현했다.
이번에 발현한 마법은 공격마법 은 아니었다.
번쩍!
점멸. 놈이 뒤로 물러났다. 기껏 가까워진 거리가 더더욱 멀어진다.
쯧 혀를 찼다.
'귀찮게.'
이래서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은 꽤나 짜증나는 일이다.
멀리서는 마탄 세례를 갈겨대며 공격해 오고, 접근한다면 점멸마법 으로 도주할 수 있으니까.
거리를 벌린 녀석이 스태프를 치 켜들었다.
- 놈을 막아라, 이 쓸모없는 쓰레기들아!
쿠르르르르….
검은색 파장이 놈을 중심으로 웅흔하게 퍼져나갔다. 직후 들썩이는 대지.
아니. 대지가 들썩이는 것이 아니다. 지면에 쓰러져있던 무수히 많은 시체들이 움찔거리더니, 하나둘 일어서고 있다.
놈은 이자리에 있는 대량의 시체들을 움직여 자신을 보호할 셈이다.
'그래 봤자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수직이 아닌 수평. 검 날이 거대한 반월을 그린다.
검로를 따라 그려지는 찬란한 황금빛 궤적.
굉음이 지하를 진동시켰다.
콰르르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리며 내 전방을 가로막던 시체들을 순식간에 갈아버렸다.
푸확! 터져 나오는 피안개. 나는 놈들의 파편 무더기를 뚫고 계속해 달려가며,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콰르르릉! 콰콰광!
검날이 움직일 때마다 터져나가는 시체무더기. 가로막는 놈들을 배 제해간다. 썩은 핏물이 사방천지로 비산했다.
내 온몸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더럽게 불쾌하다.
하지만 이깟 핏물이 찝찝하다고 크라함을 놔줄 수는 없는 노릇.
놈을 향해 전진해갔다.
여태껏 보다도 훨씬 빠르게.
- 네놈이 아무리 그래봤자다! 일개 검사에 불과한 네놈은 나를 잡을 수 없다!
직후 다시금 스태프를 들어올리 려 하는 크라함.
놈은 점멸마법을 발현해, 재차 내 추격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흑마법사라. 정말 짜증나는 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녀석은 점멸마법을 발동 시킬 수 없었다.
내 뒤에 있던 엘프들이 그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한지훈 님! 크라함의 점멸을 막 겠습니다!"
내 배후에서 마게브가 외쳤다. 슬쩍 그쪽을 바라보니, 마게브는 회색 수정구를 쥐어들고 마법을 운용 하고 있었다.
저 수정구의 정체.
대충 알 것같다.
'흑마나 교란기.'
카렌 왕국과의 전쟁 당시, 마녀 바네사가 만들었던 물건. 그것을 마게브가 하나 챙겨왔었다.
흑마법사와의 결전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덕분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 뭣…?!
당혹하는 크라함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크라함 정도의 경지라면 저런 교란기 따위가 있다 한들, 그리 어렵지 않게 흑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혹마나를 교란시켜봤자. 그이상의 연산력을 보유했다먼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으니까.
허나 그렇다 한들 시전시간이 길 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 고.
그리고 이런 급박한 순간에 잠깐 의지연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말이다.
서걱!
내 검날이 크라함의 어깨를 절삭했다. 놈의 왼팔이 툭 끊어져나간다.
검은색 핏물이 퍽 튀어나온다.
- 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그때. 놈의 점멸마법이 발동되었다.
번쩍!
녀석의 잘린 왼팔이 바닥에 툭 떨어짐과 동시, 놈의 본체가 다른곳 으로 사라진다.
- 한지훈! 네노오오옴!
직후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본다. 역시나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많이 떨어진 곳.
놈이 암흑색 핏물이 주륵주륵 흐 르는 왼팔의 절단면을 감싸 쥐고, 으드득 이를 갈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 감히 네놈이! 나를! 언젠가 신이 될 이 몸을…!
꼴값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언젠가 신이 될 이 몸이라니. 저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 쪽팔리지도 않은 걸까.
아, 생각해 보면 신이 되긴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놈의 왼팔을 툭, 차며 말했다.
"병신이 되긴 했지."
그 신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내가 중얼거리듯 한 말을 들은 것일까.
- 이 몸을 모욕하다니!
놈이 스태프를 치켜든다. 단단히 빡친 것일까. 목소리에서 분노의 기 색이 넘실거린다.
저 상태에서 평정을 잃고 덤벼든 다면 내게 오히려 더 좋은 일이다.
흥분한 놈만큼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과연, 흑마법사라 한들 마법사는 마법사. 냉철한 사고를 지 니고 있다.
놈은 어리석게 덤벼들지 않았다.
- 이 치욕은 반드시, 철저하게 갚아줄 것이다! 한지훈!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주 하려 한다.
상급 검술에 이르러 마나에 민감 해진 덕분일까. 나는 지금 크라함이 무슨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는지 알 아낼 수 있었다.
'도약 마법.'
점멸이 아닌 도약이다. 놈은 이 지하유적에서 빠져나가, 밖으로 나 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놔둬서는 안된다.
지면을 밟고 녀석에게 돌진.
콰앙!
달려 나간다. 놈이 도약마법을 완성하기 전에 접근해, 놈의 목덜미에 검날을 박아 넣어야 한다.
하지만 힘들 것 같다.
'시체가 너무 많아.'
내 앞을 가로막는 시체들이 너무나도 많다.
비척비척 움직이며 진로를 틀어 막는 놈들.
녀석들이야 기사도, 마법사도 아닌 그저 움직이는 시체일 뿐이니. 그리 어렵지 않게 치워버릴 수 있지만.
지금은 잠깐의 시간적 손실마저 아쉬운 상황이다. 놈들을 치워버리 며 전진한다면 제시간 안에 도달 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크라함을 죽일 수 있을까.
내가 고민하는 그때였다.
"한지훈! 가세하겠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
그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타냐. 드디어 정신 차렸나 본 데."
붉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엘프 여검사가, 비교적 사령병사들이 적은 방향을 통해 크라함에게 파고들고 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움직이지 못 하고 있던 상태였다.
보다 상위의 격을 지닌 크라함에 게 위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나 또한 상위의 격을 달 성해 크라함을 일방적으로 몰아넣 고 있으니 , 공포가 희석되어 마침내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읊조렸다.
"동료가 있다면. 더 쉽게 잡을 수 있지."
그 동료가 엘븐가디언에 달한 강 자라면 더더욱.
그녀가 움직인다.
파앙!
푸른색 궤적이 그어지고,
- …빌어 처먹을 년!
쩌엉굉음과 함께 크라함의 캐스팅이 중지되었다.
타냐가 크라함에게 공격을 가했고, 그에 크라함은 도약마법을 취소 하고 방호마법을 두른 것이다.
타냐가 크라함을 상대하며 녀석의발목을 붙잡는 동안. 나는 계속 해 전진한다.
콰르르르릉!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지금은 효율보다는 속도를 우선 해야 할 때.
퍼버벅. 핏물이 터져 나오고, 가로막는 시체들을 치워버린다. 대량 의 오러를 쏟아 붓는다. 길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간다.
크라함을 죽이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무수히 많은 시체들을 넘어.
- …제기랄.
놈의 바로 코앞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크라함의 붉은색 안광이 희미하 게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