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달 려갔다.
점차 진해지는 혈향. 보다 농밀 하게 느껴지는 흑마나의 잔향.
"이토록 진한 혹마나라니… 도대체 어떤 마법을 발현했기에…."
마게브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마법의 진원지에 가까워져 갈수록 느껴지는 흑마나의 농도는 심상치 않았다.
저항력이 없는 민간인이라면 바로 미쳐버릴 정도의 흑마나가 주변을 온통 메우고 있다.
그나마 오러와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나와 엘프들이었기에, 미치거 나 타락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철그럭, 철컥, 철컥.
나와 엘프들이 갑주의 쇳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얼마나 달려갔을까.
"저기입니다! 한지훈 님, 저 문바로 너머에서 흑마법이 발동되었을 것입니다."
마게브가 우리의 정면에 있는 철 문을 가리키며 그리 외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저곳이 흑 마법의 진원지야."
문이 닫혀있음에도, 정체불명의 검은색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다. 너무나 진한 농도의 흑마나이기에 눈 으로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인 것이다.
분명 저 문 너머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 보아야겠지.
나는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릉!
단숨에 터져나가는 철문. 안쪽에 고여 있던 암흑색 기운이 확 밀어 닥치고, 그와 동시 우리는 내부로 진입해 그곳의 경관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 이건. 맙소사."
"시체가 이렇게나 많다니… 이게 무슨 …."
지면에 무수히 많은 시체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다.
탐사를 위해 왔던 이들이었을까.
로프나 곡굉이 등, 지하유적 탐색을 위한 장비를 갖춘 이들이 이곳저곳에 쓰러져 싸늘하게 식어가 고 있다. 후각을 자극하는 혈향이 너무나도 역겹다.
그렇게 내가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한지훈! 저기를 봐라!"
타냐가 외쳤다. 그에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보인다.
이거대한 홀 안에 오연히 떠올 라있는 붉은색 수정 기둥. 그리고 그곳의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단 하나의 인영.
그리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었다.
"크라함."
저 인영은 크라함이었다. 녀석이 아니고서는 저토록 불길한 느낌을 자아내지 못한다.
검은색 로브. 후드 안쪽에서 빛 나는 한 쌍의 붉은색 안광. 그리고 녀석의 주변에서 일렁이고 있는 암흑색 기운과, 소름끼칠 정도로 불길한 중압감까지.
그렇게 내가 녀석을 바라보고 있을 때.
- 한지훈. 드디어 도착했군.
크라함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쿠르르르르르…!
주변에 장중한 위압감이 쓸고 지나갔다. 공기가 진동했다. 소름끼치는 살기가 이 공간을 그득 메워나 간다.
"크윽…!"
내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강대 한 기운이 실려 있다. 피부가 저릿해진다. 무지막지한 위압감이 온 전 신을 짓누르는 것 같다.
- 딱 좋을 때 도착해줬군. 내 강화가 완성되고, 막 유물을 얻을 참 이니 말이야.
고작 음성에 불과할 지언데. 놈 의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릴 때마다 전투 의지가 마모되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녀석의 드높은 격이 실린 음성에 영혼이 뒤흔들린다.
- 여기서 네놈을 죽이고, 네 격 과 유물까지 손에 넣는다면. 나는 반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공포가 내 심상을 잠식해갔다.
등골을 타고 저주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정신이 점차 아득해진다.
그때였다.
"한지훈 님! 오러를 운용하십시 오!"
배후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마게브였다. 고개 돌려 녀석을 바라보니, 괴로운 표정으로 마나를 순환시키고 있었다.
그가 이어 외쳤다.
"크라함의 격이 너무나도 높아졌 기에, 필멸자인 저희가 위압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영혼이 침식되어 타락하고 맙니다! 오 러를 운용해 저항하십시오!"
그의 조언을 따랐다.
화르르르륵!
오러를 운용했다. 심장에서 시작 된 청아한 기운이 전신을 순환했다.
장검에서 맺히는 푸른색 불꽃.
푸른색 기운이 암흑색 안개를 점차 몰아내갔다.
- 저항할 셈인가. 네놈에게 승산 은 없거늘.
그러자 재차 들려오는 크라함의 목소리.
오러를 극성으로 운용한 덕분인지. 방금 전처럼 압도적인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불길하고도 불쾌했을 뿐.
철그럭.
검을 들어 올려 녀석을 노려본다.
"가만히 포기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아서."
- 그래. 네놈은 항상 그랬지.
고개돌려 뒤를 바라봤다.
엘프 전사와 마법사들이 경직되 어있다. 크라함의 무력에 위압되어 한발자국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엘븐 가디언인 마게브와 타냐만이 어느 정도 공포를 극복한 모습.
- 그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한 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어. 불굴. 그것이 네 본성이었다.
다시 고개 돌려 앞을 주시했다. 크라함이 오른손에 들린 스태프를 들어올렸다. 흑마법을 발동시키려 하는 듯한 동작.
후욱.
크게 심호흡하며 더더욱 오러를 끌어올렸다.
'뒤의 엘프들을 보호해야 한다.'
지금 크라함의 무력은 내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도대체 무슨 방법을 사용했기에 저토록 드높은 격에 도달한 것일까.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민은 나중에.'
지금은 눈앞의 크라함에게 집중 해야한다. 내 모든 잠재력을 끌어올 려야만 녀석에게서 이길 수 있으리라.
나는 정신을 집중했고,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스킬이 발동되었다.
작게 중얼거려본다.
"죽여 버린다. 크라함."
내 사고가 가속되어갔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마게브는 억지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두 명의 인영.
흑마법사 크라함과, 그에 맞서 대치중인 한지훈의 모습이었다.
"으윽…!"
마게브의 몸이 덜덜 떨린다.
크라함의 격이 너무나도 드높다. 그저 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잠식되어 , 몸이 굳어버 린 것이다.
마치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동물 들처럼.
마게브는 발악하듯 외쳤다.
"크라함! 저자는 미쳤어…!"
그가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주변을 살펴보였다. 그러자 이곳저곳 쓰러져있는 민간인들 의 시체 사이사이에, 보였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 쓴 흑마법사들의 시체가.
마게브는 확신했다.
"부하 흑마법사들의 마나를 흡수 하다니!"
크라함은 이곳 코르자카 공화국에 혼자오지 않았다. 최하 중급, 최고 최상급에 달하는 수백의 흑마법사들을 이끌고 왔다.
그리고 크라함은 이곳에서 그들을 모조리 '흡수'했다.
자신이 직접 육성한 수백의 흑마법사들을 전부 죽이고, 그들이 지닌 흑마나를 자신의 심장 속에 담아낸 것이다.
때문에 지금 크라함은 일시적으로나마 격의 상승을 이루어낸 상태.
'이길 수 없다…!'
그에 마게브는 절망했다.
비록 숫자가 일대 삼천에 달한다 한들, 크라함에게 있어 이곳의 엘프 전사들은 기껏해야 개미정도에 불과한 수준./그만큼 격의 차이는 치명적이었고,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이었다.
하지만 마게브의 절망은 아직 이른 감이 있었다.
"죽여 버린다. 크라함."
그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내가 있었기에.
마게브의 시선이 자신의 앞. 굳 건히 서 있는 한지훈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화르르르륵!
한지훈의 장검에서 푸른색 광휘 가 화려하게 타오른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집중 스킬이 활성화 되었다.
내 사고가 가속되어 간다. 시야 가 좁아졌다. 보이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이 발동되 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킬의 발동은 한번이 아니었다.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스킬의 중첩. 과거 한스 요한바 르첸과 전투할 때 사용했던 방법이다.
극한의 집중상태에 접어들었다. 내 사고가 더더욱 가속된다.
물론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머리가 타버릴 정도로 사고가 가속되어간다.
하지만 아직이다. 고작 이 정도의 가속으로는 크라함에게 이길 수 없다.
다시금 사고를 가속.
- 띠…링….
알림음마저 느리게 울린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시야가 극한으로 제약되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크라함의 붉은 색 안광뿐.
시야가 온통 회색으로 변하다 검은색으로 가라앉았다. 온 감각이 점차 사라져간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까끌한 장검 손잡이의 감촉도, 비릿한 혈액의 냄새도. 앞에서 무어 라 말하는 크라함의 목소리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전투의 감각만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마지막으로 가속.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이것이 내 한계다. 이 이상으로 가속한다면 내 머리가 타버려 백치 가 될 것이다. 그리 직감했다.
극한으로 가속된 사고 속.
나는 생각했다.
'포인트를 사용해야 한다.'
크라함을 이기기 위해서는 가진 모든 포인트를 사용해야 한다.
헌데 어디에 사용해야할까.
사실은 아직 정하지 못했었다.
어디에 포인트를 투자한다 한들, 저토록 드높은 격을 달성한 크라함을 이길 거란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기에.
그러자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이변이 일어난다.
['스킬 : 제국 검술(중급)'을 상향 합니다.]
분명 나는 아직 어떤 결정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상향에는 200pt가 필요합니다.]
[유저의 능력치가 모자라 스킬의 모든 성능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홀로그램이 제 멋대로 떠올라 점멸한다.
마치 이것을 상향하라고 추천이 라도 하는 것처럼, 시스템이 내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거절할 수 없습니다.]
[수락]
['스킬 : 제국 검술(중급)' 이 '스킬 : 제국 검술(상급)'으로 상향되 었습니다!]
스킬이 상향되었다.
내 머릿속에 이형의 지식이 흘러 들어온다.
['스킬 : 제국 검술(상급)'이 '엑스트라 스킬 : 집중'과 반응합니다!]
['스킬 : 제국 검술(상급)'이 '아티팩트 : 카탈리의 반지'와 반응합니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상향 됩니다.]
[스킬 : 제국 검술(상급)' 이상향됩니다.]
[유저의 '격'이 일시적으로 상승 합니다!]
어째서인지.
절대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 …무슨.
크라함은 경악한 눈으로 바로 앞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는 무수히 많은 인파가 자리해 있다.
무려 삼천에 달하는 엘프 전사 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있는 한 인간 사내.
검은색 머리카락과 암흑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 한지훈.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냐, 한지훈!
그리고 그 청년에게서 무언가 이 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푸른색으로 번들거리던 오러의 빛이 점차 그 색을 변화시키더니, 곧 찬란한 황금색으로 화했다. 자신 의 기운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웅흔한 위압감이 끓어올라 이 공간을 스멀스멀 장악해갔다.
그때 크라함은 무언가 발견할 수 있었다.
- 설마, 네놈! 그 반지는…!
한지훈의 왼손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 화려하게 타오른다. 녀석 에게 무언가 이형의 기운을 가열차 게 불어넣고 있다.
저 반지의 정체.
크라함은 잘 알고 있다.
그야, 전생의 그가 직접 보았던 물건이었으니까.
- 카탈리의 반지! 어째서 그걸 네놈이 가지고 있는…!
카탈리의 반지.
전 엘프여왕 카탈 리가 평생 동안 지니고 있던 물건.
아주 오랜 시간동안 세계수의 자연력과 마나를 한껏 머금어, 일순간 이라면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티팩트다.
그것을 한지훈이 장비하고 있다.
그제야 크라함은 깨달을 수 있었다.
'반지와 스킬이 반응해, 놈의 격 이상승했다!'
솔직히 말해, 크라함은 본인의 힘을 과신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수백에 달하는 흑마법사들의 마나와 정기를 취해 일시적으로나마 격의 상승을 이루어냈다. 하찮은 일개 필멸 자들이야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 혼자서 한지훈은 물론, 그 뒤의 나머지 엘프들까지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만큼 격의 차이는 절대적이었 으니까.
하지만 한지훈 또한 격이 상승했 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롬! 베이먼! 시간을 벌어라!
크라함은 방금 전자신이 발현하 려하던 마법을 멈추고 스태프를 거 둬들였다.
지금 것보다 훨씬 강력한 마법을 운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저 한지훈 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으리라. 그리 여긴 것이다.
- 알겠습니다. 크라함님.
- 주인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법을 캐스팅하 기 위해서는 약간의 여유시간이 필요하다.
콰앙!
크라함의 명령에, 주변에 은신해있던 롬과 베이먼이 돌진해갔다.
노리는 것은 한지훈. 막 격을 상승시켜 웅혼한 기세를 발하고 있는 적이다.
두 줄기의 검은색 궤적이 앞으로 뻗어 나아갔다. 돌진하는 롬과 베이 먼의 잔영이었다.
그 궤적이 막 한지훈의 바로 코 앞까지 당도했을 때.
번쩍!
한줄기 황금색 궤적이 허공을 갈 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