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쿠르르르르….
어둑한 지하 공간. 커다란 굉음 과 함께 진동이 일었다. 천정에 자리해 있던 먼지가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그 떨어지는 먼지를 온몸에 뒤집 어쓰며, 한 인영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 오는군. 한지훈. 나의 '그릇'이여.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크라함이었다.
흑마법사 학파 볼라바아의 종주. 한지훈의 대적자이자,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격 높은 인물.
그의 혼잣말이 나직이 이어진다.
- 녀석이 이곳까지 오는 속도가 예상보다도 빠르군. 하긴, 그 한지훈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봐 야겠지.
쿠르르르르….
다시금 진동. 재차 떨어져 내리는 먼지들. 크라함의 암흑색 로브위에 회색 부스러기가 풀석 쌓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크라함은 손을 뻗어 먼지를 털어내려 하지 않았다. 다만 우두커니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을 뿐.
클클클, 크라함이 입가를 비틀어 웃는다.
- 허나 네놈들이 아무리 서둘러 봤자다. 예정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네놈들뿐만이 아니니. 나 또한 다소의 손실을 감수한다면, 일정을 앞당길 수 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배후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그의 심복인 두인영이 자리해 있었다.
- 롬, 베이먼.
롬과 베이먼. 크라함 그 자신이 손수 대량의 흑마나를 부여해 빚어 낸 특별한 암흑기사들.
크라함이 그들에게 지시한다.
- 이유적 안에 배치한 모든 흑마법사들을 당장 이곳으로 불러 모아라.
- …크라함 님, 설마.
그에 무언가 직감한 것일까. 잠시 주춤하는 두 암흑기사.
크라함이 질척한 미소를 지었다.
- 내가 뭘 하려하는지 대충 알고 있는 것 같군.
- 정녕 실행하실 생각이십니까.
- 그래.
- 오랫동안 손수 길러온 휘하들 입니다. 희생시키기에는 아깝습니다.
- 희생이 아니다. '수확'이지.
크라함이 손가락을 까딱인다. 자신이 서 있는 지면을 향해서.
- 다시 말하지. 다음 기회는 없다. 내가 베푼 모처럼의 자비를 무시하지 말도록. 전 흑마법사들을 이곳으로 모아라. 당장.
- …알겠습니다.
부스스스스….
롬과 베이먼이 검은색 안개가 되어 사라진다. 이제 그들은 그의 주인인 크라함의 명령에 따라, 이곳 유적에 있는 모든 흑마법사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다시금 찾아온 적막.
크라함이 작게 중얼거린다.
- 그동안 모아온 것이 아깝지만, 놈이 벌써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이상 이 방법밖에는 없지.
그가 커다란 스태프를 드높이 치 켜들었다.
지면에 웅혼한 크기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적색 광휘가 이 커다란 지하공간을 그득 메워갔다.
쿠르르르르…!
직후 치솟는 흉험한 기운.
크라함이 무언가 이변을 일으키 고 있다.
나와 엘프 전사 삼천 여명은 비밀계단을 따라 지하로 진입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신속하게.
내가 앞장서고 엘프들이 뒤따른다.
전진해 가는 와중,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가 지하 유적인가. 더럽게 큰데."
코르자카 공화국 대의사당 아래 에는 유적이 자리해 있었다.
과거 역사 이전, 인간의 기록으로조차 남아있지 않아 잊혀진 시절 의도시 유적.
말 그대로 도시였다.
태양이 내리쬐이는 지상이 아닌, 어둑하고 습한 지하에 세워진 도시 말이다.
"… 엿같이 음침한 곳이야."
그리고 그 도시유적의 분위기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습하고 축축한 공기. 하늘이 없어 가슴을 답답하게 옥죄어오는 밀 폐감. 퀴퀴하고도 비릿한 냄새가 후 각을 자극하며, 불길한 기운이 온 사방을 그득 채우고 있다.
나는 쯧, 혀를 찼다.
"이 꼴을 보아하니. 유적은 이미 오염되어있는 상태 같은데."
이전 시나리오의 기억이 있기에 알고 있다.
본래 유적의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다. 그저 방치되어 있었을 뿐, 이 토록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릴 정도 로 침식된 상태는 아니었다.
헌데 이토록 진한 혹마나의 기운 이란.
크라함과 흑마법사들이 이곳을 탐색하며 충분히 오염시켰다고밖에 볼 수 없다.
두리번두리번.
나는 사방을 경계하며 앞서갔고, 옆에서 따라오던 마게브가 문득 알 려왔다.
"한지훈 님. 탐색마법을 발현했습니다만, 별다른 적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러네. 흑마법사 놈들이 코?기도 보이지 않아."
고개를 끄덕여 녀석의 말에 긍정했다.
확실히, 분위기는 흉흉했으나 이상하게도 적이 보이지 않았다.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곳 지하유적에 적어도 수백의 흑마법사가 도사리고 있어야 할 터인데.
수백은커녕, 단 하나조차 보이지 않고 있으니 .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크라함 놈은 제 부하들을…."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추측이 있는지, 마게브가 입을 열었다.
잠시 입을 열고는,
"…아니. 설마, 크라함이 아무리 미쳐도 그렇게까지 할 리는… 하지만…"
우물쭈물. 말하기를 주저했고,
"아니요. 아무래 생각해도 그건 아니군요. 잠깐 실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결국 열었던 입을 도로 닫아버렸다.
답답한 행동거지.
나는 쯧 혀를 찼다.
"이상한 놈."
말하려면 속 시원하게 말하던가. 왜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닫는 건 지 모르겠다.
그때 내 언짢은 표정을 본 것인 지 마게브가 황급히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한지훈 님께선 전시나리오를 기억하고 있지요."
"그래. 잘 기억하고 있지."
기억할 수밖에 없다.
모니터 너머, 그토록 몰입해서 게임을 진행했었으니까.
지금은 그저 엿같은 기억이지만.
마게브가 이어 묻는다.
"그렇다면 이 앞에 있을 '유물'의 정체. 잘 알고 계십니까?"
"유물의 정체라…."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대답했다.
"환상종의 잔해."
"… 환상종의 잔해? 그게 뭡니까?"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대충 아는 만큼만 설명해주지."
이래봬도 나는 블랙 오케스트라를 클리어했던 유저다. 덕분에 유물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걸어가며 설명한다.
"아주 머나먼 옛날,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 같은 지성체들이 없을 태초 무렵. 환상종이 대륙을 활보하는 시대가 있었다. 놈들은 하나하나 가 아득히 높은 격을 지니고 있는 고위 생명체였지."
날개를 펼치면 태양을 가리고, 지면을 구르면 산맥이 생기며, 꼬리 를 휘두르면 바다가 갈라진다 하던 가.
솔직히 믿기진 않지만, 태초에는 그 정도로 대단한 괴물들이 살아서 대륙을 활보했다 한다.
환상종이란 그 무지막지한 괴물 들을 일컫는 말이었고.
"유물이란 그 환상종의 보존된 잔해를 말하지. 그 환상종의 잔해가 있다면 보다 완벽한 세계검을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애당초 세계검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을 절삭할 수 있는 정점급 아티팩트. 이 이상 가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초시대에 존재했던 반신급 존재의 잔해라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완벽한 세계검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크라함은 그 잔해를 노리고 이곳 코르자카 공화국으로 온 것이고.
"흐음…."
처음 듣는 이야기일까. 마게브가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꽤 흥미가 동할 이야기이 긴했다.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같은 지성 체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태초의 시대.
거의 반신에 준할 정도로 무지막 지한 괴물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륙을 활보하던 시대가 있었다니.
허나 정작 이 정보를 얻을 당시 에는 그리 흥미롭게 느껴지진 않았다.
모니터 너머. 그저 흔한 판타지 게임의 세계관이겠거니, 하며 주의 깊게 알아보지 않고 게임에 집중했 던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았을까.
'블랙 오케스트라는 게임이 아니 라 현실이었지.'
그저 재미를 위한 판타지 전쟁 게임이라 여겼었는데 . 정말 있는 세상이었을 줄은.
문득 어떤 충동이 속에서 올라온다.
'…좀 더 알아보는 게 좋겠어.'
이곳 블랙 오케스트라의 세계관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사실 지금까지는 그저 눈앞의 임무에 급급해 전투에 몰입한 감이 없지 않았다.
허나 이제 나는 이전과 달리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움직이게 되었다. 장성의 자리에 도달했으며, 작위를 얻었고,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앞으로는 이전과 달리 좀 더 계획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 세계관을 자세히 알아두는 것이 게임을 클리어 하는 것이 도움이 되 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엘리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엘프여왕 엘리스. 이전 시나리오 의 기억을 온전히 지니고 있는 그녀라면 태초시대에 대해서도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물어본다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언젠가 중앙대륙을 방문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하지만,
"일단은 전투에 집중해야겠지."
잊으면 안된다. 이곳은 지하유 적. 언제 어디서 흑마법사 놈들이 등장할지 모른다.
나는 감각을 재차 돋워 전투에 대비했다.
저벅, 저벅. 철그럭, 철컥.
엘프들을 이끌고 계속해 전진했다. 그러자 다시금 주변의 풍경이 변화해간다.
점차 좁아지는 길목. 내려앉은 천장. 불쾌한 공기가 더욱 진해지고, 비릿한 혈향이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온다.
"… 잠깐, 바람?"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의아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기에.
시선을 돌려 주변에서 있던 엘프, 타냐에게 말했다.
"타냐.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
내 말에 그녀는 의아한 듯 물어 온다.
"바람이 무슨 상관이지?"
이 멍청이.
바람이 불어오는 의미조차 파악 하고 있지 못하다니.
나는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이곳은 지하공간이야. 대류현상 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런데 바람 이불고 있지."
"… 아."
마침내 깨달은 것일까. 타냐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지하공간은 밀폐되어 있다. 공기는 죽어서 고여있으며, 냄새는 어딘 가로 흐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헌데 바람이 일었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이곳에서 대류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인 즉,
"어딘가에서 마법이 발현되고 있겠지."
그것 외에는 이유가 없다.
마법이 발현되며 공기가 뒤흔들 리고, 그 영향으로 바람이 형성되어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까지 비릿한 혈향이 넘어온 것이다.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가면 된다는 건가."
그 말대로다.
틱.
타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몇올 뽑았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정열적인 붉은색. 제한된 조명 때문에 흐 릿한 시야임에도 선명하게 잘 보인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그러자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지,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외쳤다.
"엘프 전사들! 적의 흔적을 찾았다. 가능한 최대한의 속도로 이동하 겠다!"
바람이 불고 있다. 흑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하고 있다.
과연 무슨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것일까.
'느낌이 불길해.'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는 다소 여유로웠다.
크라함이 이곳 코르자카 공화국에 도착한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과거 게임에서, 녀석이 유물을 지키는 결계를 파훼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알고 있었기 에.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헌데 지금 이 순간 놈은 마법을 발현하고 있다.
어째서?
아직 놈이 결계를 파훼할 만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터인데.
설마.
'더 빠르게 결계를 파훼할 방법 이 있었다는 건가.'
단순한 직감이지만, 확신이 들었다.
놈은 만만치 않은 적이니까.
만약 놈이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유물을 얻는다면, 그렇다면 어떤 일 이 일어날까.
으득. 이를 갈았다.
"힘들어지겠지."
그렇게 놔둬서는 안된다.
"… 서두르자!"
콰앙!
나는 지면을 밟고 달려 나갔다.
혈향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서.
점차 크라함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