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문을 열고 들어선 방안의 모습 은 참혹했다.
가히 광장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방안. 수십 개의 수정구들이 붉은색 마법진 위에 어지러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을 그린 액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혈액.
방 전체에서 진한 혈향이 진동하고 있다.
"기분이 더러운데."
시선을 돌려 방의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도 또한 불쾌한 경관이 자리해있었다.
피가 뽑힌 사람들의 시체가 아무 렇지 않게 그득 쌓여있다.
몇 명이나 될까.
최소한 수십 단위는 아니다.
수백, 어쩌면 천에 달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마치 쓰레기 처럼 쌓여있는 것이다.
내가 눈가를 찌푸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마게브가 천천히 다가왔다.
"놀라신 것 같군요."
"… 약간은."
고개를 끄덕여 그리 답했다.
그러자 마게브는 정말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비꼬는 것도 뭣도 아닌. 진심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군요. 한지훈 씨, 전생에서는 흑마법사와 연합해 세상을 멸망시켰다 들었습니다만."
그는 이전 시나리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게브는 전시나리오를 기억할 정도로 격이 높지는 않았지만. 내가 전생에 흑마법사와 함께 이 세계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가 나에게 묻는다.
"이런 광경쯤이야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흑마법사의 마법 대부분은 지성체를 제물로 바쳐 발현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확실히 그의 말 대로였다.
나는 이런 광경을 수도 없이 보았다.
저주, 파괴, 교란.
흑마법사가 다양한 종류의 대마법을 발현할 때마다. 그 재료가 되는 인간들을 공급해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나, 유저 한지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모니터 너머였었다.'
모니터 너머 흑마법사들이 흑마 법을 발현하는 장면. 많이 보았다.
현실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그저 단순한 게임이라고 생각했기에.
가상의 세상이라 확신했기에.
수많은 인간을 제물로 바쳐 흑마 법을 운용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서 무고한 양민들을 끝없이 희생시켰다.
당시에는 그저 잠깐의 불쾌함을 느꼈을 뿐. 이내 곧 익숙해졌다.
마치 호러영화를 보는 것처럼 약간 징그럽다는 감상 빼고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지구와는 또 다른 세상이었고.
그때 내가 저질렀던 죄악이 이렇게 실제 눈앞에 자리해 있다.
"…개같은."
나직이 욕지거리를 뇌까리고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환기했다.
과거 내가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생각에 빠질 여유는 없다. 지금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할 때.
나는 마게브에게 지시했다.
"시작하자. 마게브, 좌표교란기를 해체해 줘."
"그렇게 하지요."
마게브가 엘프 마법사들을 이끌 고 마법진을 둘러섰다. 그들이 손을 뻗어 해체마법을 시전한다.
푸르게 일어나는 청아한 기운. 그와 더불어 은은히 피어오르는 온 화한 자연력의 잔향.
바닥에 깔려 있던 붉은색 마법진 이 녹아 사라지고, 검은색 수정구들 또한 점차 회색빛으로 변해간다.
좌표교란 아티팩트의 해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 한지훈 씨! 드디어 통신이 연결되었네요! 성공하셨군요!
품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곳 수도에 도착했기에 한동안 끊겼 던 니디아와의 통신이 교란기가 해체되며 다시금 연결된 것이다.
그녀가 이어 말한다.
- 계획했던 대로. 당장 엘프 전사들을 보내드릴게요.
번쩍!
이어둑한 지하 공간 속, 환한빛이 터져 나왔다.
터지는 빛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번쩍! 번쩍! 번쩍!
청색 마나광이 쉼 없이 점멸한다. 시야가 순식간에 환해진다. 그리고 그 빛무리를 헤치며 기어 나 오는 수십, 수백의 인영들.
나는 그중 선두의 인물을 바라봤다.
"오랜만이야. 타냐."
"… 그래. 보아하니 임무를 제대로 완수했나 보구나."
붉은색 머리카락,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엘프 검사. 여왕과 세계수 를 지키는 엘븐 가디언들 중 하나.
타냐.
그녀가 수천에 달하는 엘프 전사 들을 이끌고 도착한 것이다.
철그럭.
그녀가 허리춤에 찬 장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한지훈. 그동안 수고했다. 이제 부터는 좀 쉬엄쉬엄해도 될 거다."
"쉬라는 말은 안하네?"
"너는 그 유물이라는 걸 찾아야 하지 않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고는,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한지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지?"
뭘 해야 하냐는 그녀의 말.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대의사당으로 갈 거다. 그리고 그곳을 청소해야 해."
이제 우리는 수천에 달하는 엘프 전사들을 이끌고, 코르자카 공화국 의 대의사당으로 향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피식 마주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전에 방해꾼을 처치 해야겠지. 타냐, 밖으로 나가자. 아마 적의 증원이 몰려와 있을 거다. 놈들을 먼저 밀어버리자고."
엘프 전사들이 합류했다.
- 띠링!
[서브 퀘스트 - '좌표교란기 파훼'를 '완벽하게' 완수했습니다!]
[높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포인트 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정산 포인트 : 50pt]
[추가 정산 포인트 : 20pt]
(기존 보유 포인트는 80pt입니다.)
(남은 포인트는 150pt입니다.)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적은 저 고성 내부에 있다!"
코르자카 공화국의 중앙 기사단 장, 레빈티아는 그리 외치며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가 이어 외친다.
"적의 수는 고작 십여 명에 불과하다!"
그의 눈동자가 앞으로 향했다.
불에 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고성이 보인다.
그리 큰 성은 아니다.
고작해야 삼 층 규모.
이곳 카멜리가 수도가 되기 전부터 있던,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방치되고 있는 고성.
저 성 안에 적이 있다.
쯧. 레빈티아는 작게 혀를 찼다.
'헌데 상부도 엄살이 너무 심하군. 고작 십여 명의 적을 처치하는데 우리 기사단 전부가 동원되다 니.'
그가 흘깃 뒤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무려 칠백에 달하는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저기 고성을 지키고 있던 세 개 전대를 제외한 모든 기사들이, 적의 추격섬멸에 동원된 것이다.
레빈티아가 작게 중얼거린다.
"쉬운 전투이다."
적의 전력은 고작 십여 명.
반면 이쪽은 무려 칠백의 기사.
상대가 될 수 없다. 적의 무력이 그 얼마나 강대하든, 심지어 제국의 영웅이라 추앙받는 한지훈이 상대 라 한들.
그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지금 그의 뒤에는 칠백에 달하는 대규모의 기사들이 도열해 있으니까.
개인의 무력이 제아무리 강하든. 집단의 힘 앞에서는 무력한 법이다.
그것도 평범한 병사가 아닌 오러 유저인 기사들이라면 더더욱.
"전기사! 고성을 포위하라! 각 전대별로 지정된 지역을 지키도록! 적이 출현하는 즉시 내게 보고하라!"
때문에 레빈티아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십여 명의 적에게 칠백의 기사가 패배한다 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적은 고작 십여 명이 아니었다.
- 단장님!
레빈티아의 귓가에 통신이 들려 온다. 휘하 전대장들 중 하나였다.
그의 보고가 이어진다.
- 적을 발견했습니다! 놈들은 고 성 정문 쪽에서 기어 나오고 있습니다!
적을 발견했다는 보고.
레빈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그래. 섬멸하도록. 다른 전대는 자리를 지켜라! 혹여나 다른 적이 또 다른 방향으로 탈출할 수도 있으니 . 경계태세를 다지고…."
물론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 단장님! 지원이 필요합니다!
- 후문 쪽에서 적이 출현했습니다!
- 5번 전대입니다! 남쪽 성벽을 넘어서 놈들0]
….
적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이곳저곳, 모든 전대에서 들려오기 시작했 기에.
- 단장님! 적은 십여 명이 아닙 니다! 엘프 검사들이, 끝없이 쏟아 져 나옵니다!
- 당장 보이는 것만 수백입니다!
- 지원! 지원이 필요합니다! 놈 들이 너무 강….
- 아아아악!
레빈티아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 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코르자카 공화국의 기사가 갈려 나간다.
* * *
엘프라는 종족은 강하다.
그들은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종족.
태어날 때부터 마나와 자연력에 친숙한 그들은 인간보다도 훨씬 오래 살며, 보다 우월한 잠재력을 지 니고 있다.
그런 엘프들 중에서도 특히나 무력에 특화되어 있는 이들이 바로 엘프 전사들이었다.
정령이나 마법을 배우지 않고, 오직 오러의 운용에 집중한 이들.
엘프 전사들은 일반 기사들보다 도 더욱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엘프 전사들이 무려 수천이 나이곳에 소환되었다.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살려, 살려줘…!"
"아아아악!"
고함과 비명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들려오는 것은 콰직, 서걱, 하는 절삭음과 파쇄음들. 코르자카 공화 국기사들의 갑주가 부서지고, 그들의 피륙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 이길 수 없다! 도망쳐!"
장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줄행랑 치는 기사들.
"염병할 뾰족귀 놈들! 죽어! 죽 어!"
악에 받쳐 마구잡이고 검을 휘두 르는 기사.
"커헉… 쿨럭…."
급소를 베여, 바닥을 기며 절명 해가는 놈들까지.
엘프 전사들 개개인의 무력은 코르자카 중앙기사단의 기사들을 능 가했다. 게다가 그 수도 무려 수천에 달하는 상황.
기사들은 순식간에 밀려 쓰러져 갔다. 잠깐의 접전 뒤, 그들 대다수 가죽거나 도망쳤다.
피식 웃었다.
"그동안 개고생한 게 믿기지 않 네."
수도에 잠입하다 발각되었고, 추 격을 피해 도망쳤다. 어찌어찌 정보 를 얻어 놈들의 좌표교란기까지 파훼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가.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엘프 전사들이 합류하자 이렇게 여유롭게 전장을 거닐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전투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한지훈. 적 기사들은 거의 정리 되었다."
촤악!
타냐가 검을 부웅 휘두르며 다가왔다. 그녀의 검날에 맺혀있던 핏물 이후드득 떨어져 지면에 내려앉는다.
타냐가 쯧 혀를 차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여기 카멜리는 코르자카의 수도라고 들었는데 . 기사들이 왜 이리 약하지? 그것도 의 회 직속인 중앙기사단이라 들었다 만."
그녀는 자신이 상대했던 기사들 의무력이 너무나도 약하게 느껴졌 기에, 의문이 생긴 듯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코르자카는 섬나라니까."
"섬나라인 게 무슨 상관이지?"
"섬나라는 지상군이 약할 수밖에 없어. 해군에 모든 자원과 인재를 집중시키니까. 저기 중앙기사단 놈 들을 봐. 의회 직속인데도 장비가 빈약하지 않아?"
코르자카 공화국은 섬나라였고, 그렇기에 지상군은 비교적 나약했다.
모든 외적이 바다를 넘어야만 쳐 들어 올 수 있기에. 주로 해군을 위주로 전력을 증강해왔던 것이다.
자연히 지상군은 소외될 수밖에 없을 터.
그것은 의회 직속, 중앙기사단이 라 한들 피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코르자카군은 기사, 일반보병 할 것 없이 약해 빠졌어. 베 테랑들은 모두 해군으로 가니까."
극단적인 인재와 자원의 집중. 그것이 코르자카군의 현실이었다.
해군은 제국군과 비교해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성하지만, 육지 전력은 나약하고도 비루한.
그 말인 즉,
"타냐. 의사당으로 진격하자. 놈 들은 약해.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거다."
가로막는 적들은 모두 나약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씩 웃으며 읊조렸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우리는 도시의 중앙, 대의사당 방향으로 진군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