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짙은 어둠이 내려깔린 야심한 밤. 본래라면 도시 전체가 적막한 정적 속에 잠겨들어야 정상인 시간 이다.
하지만 코르자카의 수도 카멜리는 정적에 휩싸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낮보다도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 고 있었으니 .
"아직도! 아직도 놈들을 찾아내 지 못한 거냐!"
수도 경비단장 멜란토는 그리 외치며 창밖을 바라봤다. 역시나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 빠져든 도시의 모습.
하지만 보이는 도시의 경관은 결코 어둑하지만 않았다.
이곳저곳에 병사들이 횃불을 들 고 순찰한다. 간간히 기병대가 시끄 러운 말발굽 소음을 내며 대로를 가로지르고, 수많은 교차로에 병사들이 배치되어 검문작업을 행하고 있다.
혼잡한 대규모 수색작업 현장.
멜란토는 으득 이를 갈았다.
"염병할 쥐새끼들. 어디에 숨어있는 건지."
지금 이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수 색작업에 차출되었다. 그리하여 도시 전체를 그들이 배회하며 숨어든 제국 놈들을 찾아내고 있는데 .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병력을 수색작업에 투입했음 에도 놈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그저 병력을 순찰시키고 있을 뿐. 별다른 전투행위 가 일어나고 있지 않는 상황.
그가 이어 읊조린다.
"도시 내부에 협력자가 있었던 건가."
수많은 공간을 철저히 수색했음 에도 놈들을 찾을 수 없다. 그 말 인 즉 미리 은신처를 준비해뒀다는 것일 터.
"… 일이 힘들어지겠어."
멜란토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수색작업을 속행한다 한들 놈들을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가 그렇게 창밖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바빠 보이는군. 멜란토 단장."
덜컥. 집무실 문이 열린다. 그에 멜란토는 고개 돌려 뒤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곳까지 올 만한 인물이 아님에 도, 누군가가 갑작스레 등장했기에.
"대의원님! 여기는 어인 일로…!"
코르자카 공화국의 대의원 알비 덴. 의원회의 정점이자, 사실상 군 주에 달하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이.
그가 멜란토의 집무실에 몸소 찾아온 것이다.
저벅, 저벅, 털썩.
알비덴이 스스럼없이 걸어가 접 대용 소파 위에 앉았다. 멜란토는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송구합니다. 대의원님. 미리 오 신다 연락을 하셨다면 의전을 준비 했을 터인데."
"이런 야심한 밤에 무슨 의전인 가. 그리 불편해하지 말게. 지시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이니. 일단 작전 지도부터 가져오게. 현재 수색이 어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군."
알비덴의 말에 멜란토는 곧장 집무실 한켠에 설치되었던 대형 지도 를 가져왔다.
본래라면 그의 부관이나 참모가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 이자리에는 오직 멜란토와 알비덴뿐. 그에 손수 지도를 준비하는 그였다.
멜란토가 지휘봉으로 지도를 겨 누며 입을 열었다.
"현재 모든 수도경비병력이 동원 돼 수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알비덴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 를 주시한다.
보이는 것은 온통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는 수도의 각 구 획들.
붉은색은 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구역이었고, 푸른색은 반대로 적 이 없으리라 여겨지는 지역이었다.
멜란토의 말이 이어진다.
"적들이 숨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획들은 모조리 수색이 끝냈습니다. 하지만…."
"전혀 흔적조차 찾지 못했겠군. 그렇지 않나?"
"… 맞습니다. 대의원님. 송구합니다. 다 제 부족입니다."
죄스럽다는 듯 사죄하는 멜란토.
허나 그런 그의 말에 알비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실 자네가 적 침입자들을 찾아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가 나빴으니까."
"상대라 하신다면…."
"보고듣기로는. 엘프 마법사 십여 명과 인간 기사 하나라고 들었다. 맞나?"
"맞습니다."
알비덴은 로브의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파이프 담배였다.
그가 파이프의 끝을 입가에 물며 말을 잇는다.
"크라함이 내게 알려주었다. 우리 수도에 잠입한 놈들, 꽤나 유명한 놈들이더군."
"유명하다면."
화륵. 작게 타오르는 성냥의 불꽃. 알비덴이 파이프에 쑤셔 넣은 연초에 불을 붙였다.
그의 입이 작게 움직였다.
"한지훈."
"…한지훈이라니. 설마."
"그래. 자네가 아는 그놈이다. 제국의 영웅으로서 명성을 떨친 군관 이 있지 않나. 평민이면서 오러를 각성해, 어느새 군단장이 된."
"허."
멜란토는 믿기 어렵다는 듯 헛숨을 내쉬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긴했다.
일개 병사나 기사도 아닌, 장성에 달한 고위 군관이다. 그런 그가 별다른 병력도 없이 오직 엘프 십 여 명과 함께 이곳 코르자카 수도에 잠입했다니?
무엇을 노리기에 녀석이 몸소 직접 이쪽으로 침투한 것인가.
알비덴이 후욱, 연기를 내쉬며 말한다.
"제국은 우리가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은 걸 이미 파악하고 있다."
"맙소사. 말도 안 됩니다! 흑마법사와 연합한 것은 철저한 기밀 아니었습니까?! 제국 측의 정보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한들. 군의 장성급 이상, 그것도 아주 일부만이 알고 있는 일을 놈들이 어떻게…."
"제국 놈들에게는 엘프가 있지 않나."
재차 푹 일어나는 회색 연기. 알 비덴이 말할 때마다 연기가 휘날려 허공을 유영한다.
그는 천천히 파이프를 내려놓고 는, 혀를 쯧 찼다.
"엘프의 마법적 능력은 우리 인류의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 놈들에 겐 정보를 얻을 수단이 있었을 거다."
"…확실히. 엘프의 능력이라면 야."
"재수 없는 뾰족귀 놈들. 놈들만 없었다면 이렇게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알비덴이 그리 말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지도를 바라본다.
그가 지도의 각 구획을 눈으로 훑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멜란토. 수색을 중지하라."
"진담이십니까? 대의원님."
"그래. 어차피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수색을 아무리 해봤자 이제 글렀다. 놈들은 은신처에서 숨어있어. 쉽사리 발견하기는 힘들겠지."
"… 알겠습니다. 수색을 물리겠습니다."
멜란토는 고개를 끄덕여 수락했다.
어차피 그 또한 더 이상의 수색 이별다른 효용이 없다는 것을 깨 달은 상황이다. 다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기에 계속 의미 없는 수 색을 지속했을 뿐.
알비덴이 이어지시한다.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을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보내라."
"어째서입니까?"
"그곳에 적이 노리는 것이 있으 니까."
알비덴이 손가락을 뻗어, 어딘가 를 가리킨다.
"도시의 남쪽 외곽. 3층짜리 고 성이 있다. 그곳에 좌표교란기를 설치해 두었다."
"좌표교란기…."
"놈들의 목표는 필시 좌표교란기다. 그걸 파훼해 지원군을 이곳 수도 안에 불러들이려는 것이겠지."
지금 수도에 침입한 적은 기껏해 야 십여 명. 헌데 그토록 적은 수 에도 불구하고 도시 전체가 떠들썩 해질 정도의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
헌데 만약 좌표교란기가 파훼되고, 엘프의 대규모 군대가 이곳 수도 안에 소환된다면?
그들 코르자카군 입장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막아야 한다. 수색을 취소하고, 성에 주둔 중인 방어병력을 더욱 충원하라."
멜란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대의원님."
"그래. 놈들은 분명 그곳을 노리고 있으니 . 반대로 말하자면 수색을 물려도 그곳의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면 보다 수월하게 제압할 수 있다. 적을 유인하는 거다."
확실히, 적의 목표를 알고 있는 이상. 방비할 수 있다.
그리고 알비덴은 적들이 좌표교 란기를 노리고 있다 여기고 있는 상황. 그곳의 방비만 철저히 한다 면, 언젠가 놈들을 제압할 수 있으 리라.
- 각하!
하지만 그들은 몰랐었다.
- 적이, 적이 출현했습니다! 예의 엘프 마법사와 인간 기사입니 다!
이제 와서 방비를 철저히 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었다는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수정구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휘하 참모 의 다급한 목소리.
멜란토가 입을 열어 물었다.
"꼬리를 드러냈군. 그래, 놈들이 출현한 장소는?"
- 침입자가 발견된 장소는….
잠시 숨을 고른 참모. 그가 이어 말한다.
- 도시 외곽 남쪽! 삼층짜리 고 성입니다! 놈들이 그곳에 등장, 해당 지역을 지키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과 교전 중입니다!
좌표교란기가 설치된 장소다.
멜라토, 그리고 알비덴의 얼굴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와 엘프 마법사들은 카탈리의 집에서 어둑한 새벽까지 편히 휴식을 취했다.
그에 엘프 마법사들은 소비했던 마나를 거의 절반가량 회복했고, 나 또한 숨을 돌리고 몸의 피로를 풀었다. 더해 쓸 만한 정보와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다.
정보는 좌표교란기가 설치된 위치, 그리고 그곳까지 은밀하게 갈 수 있는 길이었고. 아이템은….
"이걸 여기서 볼 줄이야."
걸어가는 와중 품속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 살펴본다.
피식, 씁쓸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걸렸다.
"이거 때문에 하마터면 게임오버 될 뻔했는데 . 이제 내가 사용하게 되었네."
내가 살피고 있는 것은 평소 나와 전혀 연관이 없을 법한 물건이었다.
장신구. 그것도 남성용이 아닌 여성용이다.
희귀 광물을 정성스레 제련해, 수준 높은 장인이 온 심혈을 기울 여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고급스러 운반지였다.
전 엘프 여왕 카탈리가 줬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아티팩트인 물건이었다. 그것도 꽤나 높은 수준 의.
이어 중얼거린다.
"보험이 생겼어."
이것이 있다면 비장의 한 수가 생긴 셈이다.
나는 왼손 검지에 반지를 착용했다. 들어간 반지는 신기하게도 저절로 오므라들어 착 달라붙었다. 꽤나 고급 아티팩트이기에 착용자에 맞 춰 자동으로 크기가 변하는 모양.
그렇게 내가 반지를 살피며 걸어 가고 있을 때였다.
"… 한지훈 씨. 좋은 물건을 받아 기뻐하시고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 만. 이제 곧 전투입니다. 긴장하셔 야 합니다."
내 뒤를 따라오고있던 마게브가 그리 말해온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지금 우리는 좌표교란기가 있는 장소를 향해, 은밀히 이동하는 와중 이었다.
카탈리의 정보공유 덕분에 비교적 안전한 길을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집 밖으로 나왔는데도 단 한번조차 검문에 걸린 적 도 없었으며, 결국 전투 없이 목적지 인근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저 고성 지하에, 좌표교란기가 설치되어있단 말이지."
작은 성이 보인다.
그리 큰 규모의 성은 아니다. 제국으로 치자면 기껏해야 남작 정도 의 하위 귀족이 살 법한 성. 더해 관리마저 엉망이라 벽 이곳저곳에 무너져 있어 너저분하다.
사실 성이라고 부르기보단 폐허 라고 불러야 더 알맞을 건물.
"경계 병력이 꽤 되는데 . 카탈리 의 정보가 정확히 들어맞았어."
그리고 그 폐허 주변을 수많은 병사와 다수의 기사들이 경비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런 다 무너져가는 폐성을 굳이 병력을 들여 보호하고 있다니.
분명 내부에 지켜야할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 그리고 그 지켜야할 것은 필시 좌표교란기일 것이다.
시선을 돌려 마게브를 바라본다.
"마게브. 보다시피 알겠지만, 더 이상 은밀하게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경계 병력이 너무 많아서 들키지 않고 침투할 수 없어."
나 혼자라면 가능할 것이다. 은 신 스킬을 상향시키면 되니까.
하지만 마법사들까지 이끌고 잠 입할 자신이 없다. 그들에게는 시스템의 보정이 없으니까.
때문에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행돌파 해야 해."
순수한 무력으로 저 무수한 무리 를 돌파해야 한다.
가능한 신속하고 확실하게 움직여야 하리라.
"…그렇군요. 일을 키우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요. 다른 방법 이 없으니 ."
마게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살짝이나마 굳어있다.
적진. 그것도 수도 한복판, 흑마법사가 언제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다. 그런 이곳에서 교전을 벌이다니 긴장할 수밖에 없는 노릇.
하지만 나는 긴장하지 않는다.
이것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을 수도없이 극복해냈었으니까.
"마법사들. 공격마법 캐스팅합니다. 마나를 공조하지요."
마게브의 말에, 배후의 엘프 마법사들이 하나둘 마나를 끌어올린다.
우우우웅….
은은히 퍼져나가는 마나의 잔향. 푸른색 광휘가 피어오른다. 주변의 공기가 점차 진동하기 시작했다.
"잠깐! 이건…."
"마법! 엘프의 마법이다!"
"조심해! 마법을 방호하라!"
"오러를 끌어올려!"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것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오러를 돋우 며 방호태세를 다져갔다.
허나 늦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갈겨."
번쩍!
환하게 터져 나오는 마법의 발현 광.
고위 엘프마법사 십여명이 동시에 시전한 공격마법이 우리의 전방, 고성 외곽을 경계하고 있던 적의 병력에게 작렬했다.
콰르르르르릉!
커다란 폭음이 일었다.
충격에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흙먼지가 후욱 올라온다. 피 안개가 퍽 터져 나와 불쾌한 소음을 사방 천지에 흩뿌린다.
잠시 후 후드드득 떨어져 내리는 적의 파편들.
나직이 읊조렸다.
"내가 선행하겠다. 앞길을 뚫어주 지."
마법사들이 크게 한 방을 먹여 놈들을 혼란시켰으니 .
이제는 내가 돌진해 길을 뚫어줘 야 할 때다.
"엘프들. 내 뒤를 따라와라."
파앙!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단숨에 죽어 쓸려나간 적 병의 시체들, 그리고 그사이사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기사들 이 시야에 잡힌다.
놈들을 돌파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힘없이 비척이고 있었으니까.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오늘 코르자카 공화국은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