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 수도에 적병이 침투했다. 수는 약 십여 명.
- 확인된 인상착의와 몽타주를 각 부대에 배포했다. 모든 초병들은 참고해 침입자를 발견 즉시 보고할 수 있도록-.
- 검문검색을 강화하라는 수도사 령관님의 명령이시다.
비번인 경비대원들을 모조리 기상시키도록. 한동안 비상경계체제다. 십인대 단위로 모든 길목을 감 시해.
- 기사단. 각 전대에 정기적 순 찰을 명한다. 예비인원만 남기고 모조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수정구에서 다수의 음성이 어지러이 들려온다. 적 참모와 장교들의 목소리.
나는 그들의 교신을 듣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지금 우리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
수도에 숨어든 우리들을 색출해내기 위해 병력을 운용하고 있다. 그에 지금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적의 초병, 전투병, 심지어 기병 기사 할 것 없이 모조리 돌아다니 고 있어."
"완전 벌집을 건드린 꼴이로군요."
"그래. 우리가 수도 연안에서 그 난리를 피웠으니까. 저토록 민감하 게 반응하는 게 당연하지."
어그로를 너무 끌었던 게 문제였다.
당장 수도 연안에서 전투함과 전투했고, 쇄도해오는 발리스타를 모조리 쳐부쉈다. 주둔 중이던 지상군 병력까지 박살내며 이곳 도시 안으로 파고 들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토록 강대한 무위를 보인 적 이, 국가의 심장부인 수도 어딘가에 숨어있다니.
하루빨리 찾아내 제압하고 싶은 것이 적 사령관의 심정이겠지.
그렇기에 곤란하다.
"놈들의 좌표교란기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지도 못했는데 . 움직임을 들켜버리다니."
"일이 꼬였군요."
우리의 계획은 도시에 은밀하게 잠입. 좌표교란기를 파괴하고 병력을 소환해 놈들의 의사당을 점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밀하게 숨어들기는커녕, 초장부터 들켜버려 큰 관심을 끌게 되었으니 .
임무를 완수하기 훨씬 어려워진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방법은 있어."
언제나 답은 있다.
이 세상이 게임이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한들 돌파구는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것이 비록 턱없이 어려운 것이라 해도.
나는 시선을 돌려 누군가를 바라 봤다.
"카탈리."
전 엘프 여왕이자, 내게 막대한 증오심을 품은 인물.
한때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기대 를 가졌지만 철저히 배신당했던 이.
"그쪽의 도움이 필요해."
그녀가 협력한다면, 이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아직도 내게 악감정이 많이 남아있던 것인지.
"뻔뻔하구나 한지훈. 내게 도와 달라 할 염치가 있긴 하나? 하긴, 그토록 염치가 없었기 때문에 수많 은 인명을 죽여 없앴음에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었겠지."
그녀의 태도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뭐, 전생에 내가 한 짓을 알고 있으니 . 저런 태도가 이해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순순히 내게 협력했던 엘 리스가 비정상적인 반응 아니었을까.
허나 그렇다 한들.
"부탁이다. 카탈리."
임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이어 그녀를 설득했다.
"그쪽의 조력이 없다면. 코르자카 공화국이 완전히 날아갈 거야. 카렌 처럼 수많은 인명이 흑마법사에게 유린당하고 말거라고."
"인간이 죽는 게 나와 무슨 상관 이지?"
"그렇게 인간이 싫나? 무고한 인 명이 죽어 사라질 것이 뻔한 데 도'?"
"그래."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마법의 은혜를 전쟁과 타락으로 되갚는 배은망덕한 족속이 바로 인간이란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죽는 것쯤이야."
카탈리는 인간이라는 종족을 혐 오한다.
마법의 은혜를 베풀었지만 그들 이 악용했기에.
"마나로 지성을 발전시키고 문명을 부흥케 해 평화를 누려라. 내가 원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하지만 인간 놈들은 신성한 마나를 오직 전쟁과 남을 해치는데 사용했어. 심지어 흑마법이라는 사악한 마법 까지 탄생시켰지."
전쟁에서 살상을 위해 마법을 발전시켰고, 사악한 흑마법을 탄생시 켜 이 세상에 위해를 가했기에.
그녀는 인간을 혐오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에 대 한 모든 기대를 버렸다.
그녀에게 있어 인간이란. 한낱 마물 그이하의 존재나 다름없다.
"나는 네놈을 돕지 않을 거다. 한지훈."
때문에 그녀는 확고히 선언했다.
나를 돕지 않을 거라고. 흑마법사의 음모가 진행되는 것을 그저 방관할 것이라고 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던지.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춘다. 보이는 것은 카탈리의 얼굴. 눈가의 주름 사이 보이는 녹색 눈동자.
그녀의 동공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코르자카 공화국이 흑마법사 에게 집어삼켜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것은 간신히 참고 있다는 것을.
그야, 공화국은 그녀의 작품 이 었으니까.
자신의 작품이 망가져 소멸하는 것을 두고 볼 사람은 없다. 하물며 그것이 마지막 작품이라면 더더욱.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카탈리."
"코르자카 공화국. 네가 만들었다는거다 알아."
짧은 말이었지만.
파장은 적지 않았다.
"한지훈 씨. 그게 무슨 말씀이십 니까? 공화국을 스승님께서 세웠다 니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럴 리 없습니다. 저희 엘프는 중앙 대륙 밖 인류의 영역은 그저 관찰하고 방관할 뿐.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흑마법사가 나타난 게 아니라면요."
"하물며 나라를 세우다니? 말도 안 됩니다."
역시나. 마게브를 비롯한 동행 엘프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을터다.
코르자카 공화국을 건국한 것. 아주 먼 옛날, 그녀가 아직 인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을 적 행했던 일이었으니 .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다.
"카탈리. 어서 말해주지 그래. 네 가 이 나라를 건국했노라고 말이 야."
내 말에, 순간 카탈리의 동공이 더욱 거세게 흔들린다. 잠깐 드러났 던 표정은 당혹.
직후 그녀는 표정을 수습하더니 이쪽을 노려봤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 거지?"
게임 속 지식이 있다면 쉽게 간 파할 수 있는 사실이다.
나는 천천히 말을 잇는다.
"생각해보면 부자연스럽단 말이지."
"부자연스럽다니. 무엇이?"
"코르자카 공화국. 건국 초기에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라 들었다. 물론 지금은 다른 국가 들처럼 거의 귀족정에 가깝게 변모 했지만. 이전에는 확실히 달랐지."
군주정 국가가 이곳저곳 널려있는 이 세상에서, 공화정이란 극도로 이질적인 체제였다.
내가 알고 있기로 공화정을 채택 한국가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코르자카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시민이 투표해 의원을 선출하고, 그렇게 선출된 의원들이 모여 국정을 다룬다. 솔직히 말해, 말도 안 되는 체제야. 적어도 이 세상에서 는."
블랙 오케스트라의 세계관은 그리 상냥하지 않다.
이곳저곳에 출몰하는 마물. 팽창 하는 제국주의. 퍼져나가는 전쟁의 겁화.
평지에서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수탈하며, 산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마물이 나약한 인간들을 사냥한다.
자연스레 힘과 무력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한다.
사람이든, 국가든.
그런 의미에서 민주공화정은 이 세계관에서. 적어도 지금 시기에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정치체제였다.
"하지만 코르자카는 처음부터 민주공화정 국가로 건국되었지."
지구 최초의 공화국이던 고대 로 마조차 처음에는 왕조국가였는데 말이다.
코르자카 공화국은 처음부터 민주공화정 국가로 건설되었다.
비정상적.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공화정 국가를 아주 완벽하게, 아무런 잡음 없이 말이야. 누군가 압도적인 지성을 가진 인물이 체계적으로 설계한 것마냥."
"… 그래서. 그것을 설계한 것이 나다?"
"그래."
"허."
카탈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내가 공화국을 만들었다 간파했다? 그저 억측 아닌가."
"물론 다른 떡밥들도 많지."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를 할 적.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너는 유독 코르자카에 집착했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게임 속 카탈리의 행동은 명백히 이상했었다.
인간을 혐오하는 그녀였지만. 어째서인지 코르자카 공화국에서의 전투만은 반드시 참여했던 것이다.
마치 뭔가를 지키려 했던 것 마 냥.
당시에는 지키려한 것이 유물이 라 여겼지만. 지금 와서는 좀 더 다르게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하지 않은 가.
인간을 혐오하던 그녀가 어째서 이곳 코르자카 공화국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도 이토록 허름한 집에서 볼품없는 생활을 영위하며 말이다.
자연력과 마나가 풍부한 중앙 대륙에서 기거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터인데.
"인간을 혐오하던 네가 굳이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도. 공화 정이라는 생소한 정치체계가 별다른 잡음 없이 완벽하게 만들어졌던 것도. 네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이 보잘것없는 일개 열도 국가를 지키려 했던 것도."
그녀가 공화국을 만들었다면 그 모든 것이 설명된다.
"너는 네가 만들었던 공화국 그 자체를 지키고 싶어 했던 거야."
나는 말하고는 다시금 카탈리를 바라봤다.
더 이상 발뺌하려는 생각은 없는 것일까.
그녀는 시원스럽게 긍정했다.
"맞다. 공화국은 내가 만들었다. 내가 설계하고, 지도자와 시민들을 교육했고, 체계를 다듬어.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내려 했었지."
그녀의 말에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엘프들이 놀란 표정을 짓 는다.
놀랄 수밖에 없을 터다. 엘프가 아무도 모르게, 사소한 부분에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왔던 일은 간간 히 있었지만. 아예 국가 자체를 건설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적어도 그들이 아는 한 말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걸까. 카탈 리 가 천천히 눈을 감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나는 공화국을 지키려했다. 미 련이었지.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어. 내가 이륙해냈던 마지막 업적이 었으니까. 심지어, 그래봤자 한때에 불과했었지만. 완벽히 이상적인 국가를 이 손으로 이륙해 냈었으니까."
지금이야 다른 국가들처럼 거의 귀족정에 가깝게 변질되었지만. 이전에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민주주의국가나 다름없었다.
야만스러운 이 블랙 오케스트라 세계관 속 유일하고도 완벽한 민주 공화정 국가라니. 너무나도 뿌듯했 겠지.
물론 그것도 추억에 불과하지만.
"이대로 멸망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순순히 보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그 추억의 잔재라도 바라보며 여생을 지세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흑마법사와 나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지만.
그녀가 눈을 뜬다. 이번에도 보이는 것은 녹색 눈동자.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활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좋아. 내가 공화국에 집착하고 있는 걸 들킨 마당에 더 이상 발을 뺄 필요는 없겠지. 네놈을 도와주 마, 한지훈."
"고맙군 그래."
"좌표교란기를 파훼해야 한다 했 지.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짚이는 곳이 딱한군데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좌표교란기. 실상 아무데나 설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전혀 달랐다.
추측해본다.
"지맥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 보 군."
"정확해."
카탈리가 내 말을 긍정한다.
이 세상의 마나와 자연력은 끝없이 순환하고 있다.
지맥, 정확히 말하자면 지표면 아래 깊숙한 곳에 뻗어있는 세계수의 뿌리가 마나와 자연력을 순환시키고 있다. 기사와 마법사들은 그 순환된 마나를 받아들여 오러를 발현하고 마법을 시전한다.
세계수가 이 세상 마나문명의 근원인 것이다.
그 근원을 흐트러트려 외부에서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마나좌표 교란.
헌데 수도 전체를 교란시킬 정도 라면….
"세계수의 뿌리가 지나는 곳이 아니면 안 되겠지."
워낙 넓은 영역의 마나 전체를 흐트러뜨려야 하기에. 세계수의 뿌리가 지나는 장소가 아니라면 큰 효과를 보지 못할 터.
좌표교란기는 분명 세계수 뿌리 가지나는 장소. '지맥' 위에 있다.
카탈리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맞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거기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 더해 비교적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 까지 말이다. 이 몸은 거의 수세기 동안 이 나라에서 살았으니까."
카탈리는 좌표교란기가 설치되어 있을 지맥의 위치와, 그곳까지 갈수 있는 길마저 알고 있다.
즉 그녀의 정보제공만 있다면 보다 수월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는 뜻.
그녀가 이어 말한다.
"그 모든 걸 알려주마. 그렇다면 그대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좌표교 란기를 파훼할 수 있겠지. 하지만, 하나 약속해다오. "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는 걸까.
카탈리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이쪽을 주시하던 그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코르자카 공화국을 원래대로 되 돌려다오. "
"원래대로라면. 흑마법사들을 몰 아내달라는 건가?"
"아니."
카탈리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말 그대로 '원래'대로. 내가 처음 설계하고 만들었을 적의 공화국 말이다. 지금의 부패하고 탐욕스러 운 귀족국가가 아닌, 이상적인 민주 국가의 모습으로 되돌려달라는 거다."
즉 의원회의 부패한 의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체제를 정비해, 망가진 국가 그 자체를 고쳐달라는 것이다.
이전 건국기의 코르자카처럼 평화롭고 온화한 국가가 될 수 있도 록.
"그것만 약속한다면 정보를 넘기 지.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나서겠다."
"원래대로의 공화국으로 만들어 달라……"
나는 그녀의 요청을 듣고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 애매한 일이다.
나는 정복자이자 군인이지, 정치인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의 체제를 손대는 것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해 야 할 일.
내가 하기에는 전문성이 떨어진다. 잘 할 자신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답한다.
"확답은 못하지만. 노력은 해보 지."
나는 자신 없다고 내빼는 성격은 아니다.
그녀가 피식 웃는다.
"그래. 기대도 안했다. 노력해본 다라…. 그거면 됐다. 생각해보니까 웃기는군."
"뭐가 웃긴 건데?"
"학살자였던 네놈에게 공화국을 되살려달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 아닌가."
하긴 그렇긴 하다.
"일단 이걸 받아라. 나중에 필요 할거다."
잠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는,
"… 이건."
"기억에 있는 물건일 거다. 그렇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기억에, 그것도 아주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물건이었으므로.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