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배 내부의 선원들을 차례차례 처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가 떨어져 어둑해진 야심한 밤. 철석이는 파도 소리, 삐거덕거 리는 목제 갑판. 더해 내가 지닌 은신 스킬까지.
모든 조건이 내게 너무나도 유리 한 상황이다. 덕분에 나는 수월하게 적 초병들을 제거해 갈 수 있었고, 마침내….
"이제 대충 끝났네."
선장실까지 제압할 수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선장실 내부 의 모습을 살폈다. 포박되어 있는 십여 명의 인질들. 그들 사이에는 유독 고급스러운 복장을 갖춘 한 중년인이 있었다.
이 수송선의 선장이었다.
"쥐새끼처럼 숨어들어서 내 선원 들을 죄 죽여버리다니. 비열한 제국 새끼가!"
그리고 녀석은 지금 이쪽을 향해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꽤나 분한 것일까. 선장이 충혈 된 눈으로 이쪽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녀석이 으득 이를 악물며 말한다.
"네놈. 목적이 뭐지? 우리를 살 려둔 것을 보아하니 수송 중인 재 물을 노리는 것은 아닐 테고."
맞다. 여기에 실려 있는 약탈품 따위에는 관심 없다.
꽤 많은 양이었지만 그래봐야 내 게는 푼돈에 불과하다. 지금 당장 내 영지에서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니. 이까짓 약탈품 따위에 목메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수도 카멜리로 나와 일행들을 들여보내야 해서 말이야. 협력해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개소리!"
하지만 선장은 꽤나 충성심 있는 인물이었던 걸까.
"나를 죽여라! 우리 공화국의 적 에게 내가 순순히 협력할 것 같은 가!"
녀석이 발악하듯 크게 소리쳤다.
당장 포박당해 생명의 위기임에 도 끝까지 적에게 협력하기를 거절하다니. 군인으로선 퍽 훌륭한 인물 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녀석의 그 훌륭함이 제 명을 단축시켰다.
"그러면 죽어야지. 선장 나리."
서걱.
녀석의 목을 베었다. 미약한 절삭음이 인다.
"커헉… 컥…!"
울컥 쏟아져 나오는 핏물. 그와 함께 놈의 몸이 힘없이 고꾸라져 나무 바닥 위로 쿵 쓰러진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실 선장은 굳이 필요 없었어."
어차피 배는 직접 실무를 다루는 일반 선원들만 있으면 충분히 움직 일 수 있다.
선장이 이쪽에 협력했다면 살려 뒀겠지만.
전혀 회유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서, 선장님!"
"맙소사…."
"잔인한 제국 놈이!"
선원들이 경악성을 터트린다. 눈앞에서 자신들의 지휘관이 죽어나 가자 큰 충격을 받은 모양.
나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날 을, 녀석들 하나하나에게 겨누며 물었다.
"좋아. 선장처럼 죽고 싶은 놈. 더 있나? 지금 말해주면 좋겠는데 ."
"없는 것 같네. 포박은 풀어주지. 배를 수도로 몰아라. 이미 말해두지 만 반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네놈들 무기는 다 바다 속으로 던져버렸으니까."
물론 무기가 있다 한들 내 피부에 생채기 하나 입힐 수 없겠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놔 둘수는 없다.
내가 선원들을 하나둘 풀어주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것일까. 그들 이 문득 물어왔다.
"… 정말, 수도로 배를 몰기만 한 다면 살려주실 겁니까?"
"그래. 너희들이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계속해 포박을 풀어주며 이어 말했다.
"수도 부두에 일단 도착하면, 네놈들을 포박한 채 배 안에 방치해 둘 거다. 그러면 언젠가 다른 공화 국군에게 발견되어 풀려나겠지."
놈들의 포박을 모조리 풀었다. 선원놈들이 일어서서 두려움 가득 한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재차 강조했다.
"다시 말하지만. 살고 싶으면 헛 짓거리 하지 마라. 나도 너희를 죽 이고 싶지는 않아."
선원들의 표정을 보아하건데 당장은 내게 반기를 들 생각은 없는 듯 해 보인다.
하지만 사람 생각이란 금세 달라 지니, 일단은 두고봐야 하리라.
나는 코르자카 해군 수송선을 탈 취했다.
* * *
"한지훈에게서 연락은 없는가."
제국의 황제 아르테니아가 옥좌 위에서 그리 말했다.
그에 그의 옆을 보좌하고 있던 국방성 장관 카디르가 대답했다.
"예. 아직 별다른 보고는 없습니다. 현재 공작 중인 것으로 사료됩 니다."
"으음."
황제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알현실 한켠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지도를 바라본다. 언제나 바라보았던 전략지도.
그가 주시하는 것은 지도의 제일 하단, 남부 대륙의 끝단.
바다 너머 다수의 섬으로 이루어 진 땅.
"코르자카 공화국이라. 놈들이 설마 흑마법사와 손을 잡을 줄이야."
며칠 전. 아르테니아는 엘프와 한지훈에게서 어떤 소식을 들었다.
코르자카 공화국이 흑마법사 크라함과 연합했다는 소식.
그들은 단독전투를 요청했고, 황제는 수락했다.
엘프가 공화국과의 전쟁에 개입 하게 되었다. 한지훈이 그들의 초장 거리 도약 마법을 빌려 공화국으로 떠났다.
단 며칠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쯤 한지훈은 공화국 땅에서 수도로 진입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리라.
"흑마법사와 연합했던 세력 모두 가 멸망했거늘. 정말 어리석은 선택을 했어, 알비덴."
황제는 이번에도 한지훈이, 그리고 엘프가 훌륭히 이번 전쟁을 종 결시키리라 예상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막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엘프라는 종족의 지원. 더해 전장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 없는 한지훈.
그들이 뭉친 한 이번 전쟁 또한 예정보다도 훨씬 빠르게 정리되리라.
과거 공국에서, 그리고 카렌에서 그러했듯이.
그렇게 황제가 지도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폐하. 외람되옵니다만, 한 가지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문득 국방성 장관 카디르가 조심 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해보거라. 카디르."
그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가하고, 카디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폐하. 저희 국방성에서는 한지훈 의 힘이 커지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지훈의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카디르."
"말 그대로입니다. 한지훈 라이젠 의 힘이 너무나 팽창했습니다."
아르테니아가 카디르를 지그시 바라보고, 카디르는 그런 황제의 반응에 마치 강조하듯 힘주어 말했다.
"혹시 그자가 배신이라도 한다면. 저희 제국에는 큰 재앙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확실히 그러했다.
한지훈. 제국의 자랑스러운 영웅 이다. 현재 제국의 정신적 지주와도 다름없는 존재.
만약 그가 배신한다면, 제국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가 지닌 것이, 그리고 그의 존재감이 제국에 너무나도 강렬했기 에.
하지만 황제는 카디르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했다.
"한지훈은 그럴 인물이 아니네. 그의 충성심은 확실하니."
이미 아르테니아는 한지훈이라는 인물을 마음속 깊숙이 신뢰하고 있었기에.
허나 그럼에도 카디르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자의 충성심이 출중하다는 것은 온 제국민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
황제의 신뢰와는 별개로, 카디르는 국방성 관료였다.
그리고 국방성의 관료란 항상 수 많은 위험을 미리 예상하고 대비해 야 하는 존재.
그의 말이 이어진다.
"상상해보십시오. 만약 한지훈이 저희 제국을 배신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생각해볼 만한 우려였다.
한지훈 라이젠이 제국의 적으로 돌아선다면. 만약 반역이라도 일으 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실히 치명적이었다.
엘프와 우호관계를 다졌으며, 현재 제국군에 대량의 군장비를 납품 하고, 커다란 상단을 굴려 무수한 재산을 축적하고 있는 이가 바로 한지훈 라이젠이다.
더해 개인이 가진 무력은 이미 대륙 최강자의 자리를 지니고 있는 데다, 지닌 세력과 영향력 또한 몹시나 강대하니.
만약 그가 정말로 제국에 반기를 든다면 제국 그 자체가 쪼개질 수도 있다. 내전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카디르는 일개 군관인 한지훈의 힘이 지금 이상으로 커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가 가진 권한과 힘을 축소시 켜야 합니다. 이것이 저희 국방성 관료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폐하."
"으음."
카디르의 말에 아르테니아는 신 음했다. 그의 말이 영 허황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므로.
군주의 측근이 배신해 왕좌를 찬 탈한 이야기.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이 있어왔었으니 .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디르 의 말을 긍정한다는 듯이.
"확실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로 군. 카디르."
"그렇습니다. 폐하, 그러니…."
"허나,"
그럼에도.
"나는 그자의 충성심을 믿고 싶군 그래."
황제의 말에, 카디르는 고개를 들어 올려 아르테니아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태양처럼 강렬 한 황금색 눈동자.
너무나도 올곧았다.
그에 카디르는 직감할 수 있었다.
한지훈을 향한 황제의 신뢰는 아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황제 본인에게 해주었던 것들 이 너무나도 막대했기에.
아르테니아가 말을 잇는다.
"한지훈 라이젠. 그자가 없었다면 진작 이제국은 멸망했겠지."
황제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지훈은 이미 여러 번이나 제국을 위기에서 건져냈다.
흑마법사의 수도 침공이 그러했고, 사령마법의 해제가 그러했으며. 지금은 최전선에서 여러 적국을 상대로 무위를 떨치고 있다.
만약 한지훈이라는 인물이 이제 국에 없었다면.
이미 제국은 흑마법사의 손에 멸망하거나, 혹은 협상동맹에게 갈기 갈기 찢겨 정복당했을 것이다.
아르테니아가 씩 웃는다.
"나는 한지훈 라이젠 경을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이네. 카디르, 그리 알고 있게."
카디르는 황제를 지그시 바라본다.
아르테니아. 고귀한 황제. 그의 얼굴 표정에는 여전히 미약한 흐트러짐 하나 없다. 진정으로 자신의 측근을 신뢰하는 태도.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카디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다.
"…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소인 은 이만 물러가 보겠나이다."
"그래. 가서 일 보게."
황제가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인사 를 받고, 카디르는 천천히 걸어 알현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쾅.
커다란 문이 닫히며 화려한 알현실의 모습도 사라진다.
황궁의 복도, 카디르가 우두커니 서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일이 잘 안 풀리는데 . 오랜만에 연방에 연락해야겠군."
그가 주머니에서 배지를 꺼내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배지에는 크루거 연방의 정보국 마크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 * *
"저기가 공화국 수도 카멜리입니다."
한 선원이 앞을 가리키며 그리 말했다. 그에 나는 그쪽 방향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럽게 크네."
공화국 수도 카멜리에 거의 다 왔다. 덕분에 바다 위에서 그 도시 의 모습을 퍽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해안가에 접한 대도시.
도시 주변으로는 커다란 외벽이 빙 둘러싸고 있으며, 도시 연안에는 무수히 많은 군함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야심한 밤인데도 퍽이나 바빠 보이는 경관. 각 군함에서 일렁이는 마나등의 빛이 해수면 곳곳에서 반 짝인다.
나는 멍하니 읊조렸다.
"이제 저기로 잠입한 뒤. 좌표교 란기를 찾아 파괴해야해."
저 커다란 도시 어딘가에 흑마법사들이 설치해둔 마나 좌표교란기 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 파괴하는 것이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
나는 옆에서 있던 선원에게 말했다.
"신호 보내."
"네, 알겠습니다."
선박이 수도에 진입하기 전에는 미리 신호를 보내야 한다. 약속해놨 던 암호를 보여 적이 아닌 아군이 라는 것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신호의 종류는 두 가지였다.
깃발과 마나등의 빛.
환한 주간에는 깃발로, 그리고 어둑한 야간에는 마나등의 신호로 적아를 판별한다.
그리고 지금은 어둑한 야간. 마나등을 사용해야한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진입신 호를 보내겠습니다."
선원 하나가 수송선의 선두로 가 더니, 설치되어있던 마나등에 손을 뻗었다. 그가 마나등을 조작한다.
틱, 티틱, 틱, 틱.
푸른색 빛이 짧게 반짝이고 사라 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피식 웃었다.
"무슨 모스부호 같네."
사실 모스부호와 방식 자체는 거의 똑같았다. 불빛이 반짝이는 주기 를 통해 교신하는 것이었으니 .
수송선 마나등이 반짝이고, 그 신호를 받은 등대 또한 마나등을 규칙적으로 반짝여 회신한다. 수송 선 선박과 등대가 통신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잠깐.'
문득 꺼림칙한 감각을 느꼈다.
고개 돌려 마나등을 조작하고 있는 선원의 모습을 바라봤다.
녀석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 르고 있었다. 더해 입술을 씹어대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어떤 굳은 결심을 한 표정.
일이 꼬인 것을 직감했다.
"염병할."
검을 휘두른다.
서걱.
"크아악!"
붉은색 핏물이 치솟고, 마나 등을 조작하던 선원이 비명을 내지 르며 비틀거렸다.
퍽.
나는 녀석을 오른발로 걷어찼다.
내 발길질에 선원이 난간 밖으로 밀려나 추락. 바다에 빠진다.
이후 첨벙 하고 들려오는 물소 리.
"한지훈 씨!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내가 갑작스레 선원을 죽이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게브가 경악했다.
마나등을 조작하던 신호수를 아무런 전조 없이 죽여버렸으니 .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저 신호수 새끼가 배신했어. 방금 전 놈이 보낸 신호. 배 안에 침 입자들에게 장악된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저걸 봐라."
손가락을 들어 올려, 수도 연안 지대에 구축되어있는 수많은 탑들을 가리켰다. 그 탑 위에는 제각기 커다란 발리스터가 설치되어 있다.
으득 이를 갈았다.
"발리스타들. 다 이쪽을 조준하고 있잖아."
신호수의 통신이 끝남과 거의 동시. 시야에 보이는 모든 발리스타가 일제히 방향을 돌렸다.
발리스타들이 조준해오는 곳은 바로 이쪽. 우리가 타고 있는 수송 선이다.
녀석들이 하나둘 투사체를 장전하고, 기름먹인 천을 덮어 불을 붙 인다.
한 방이라도 맞는다면 이 수송선 은 단숨에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발리스타 뿐만이 아니었다.
"저기 전투선들도 우글우글 몰려 오는데 ."
시선을 돌려 해수면 방향을 바라 본다.
수도 인근에 수없이 많았던 군함 들. 그것들 중 전투함으로 추정되는 중형 선박들이 하나둘 방향을 돌리 기 시작했다. 놈들이 마스트의 깃발을 피고, 이쪽으로 전진해온다.
수도 앞바다에 나타난 침입자를 격퇴하려는 듯한 움직임.
후욱,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싸울 수밖에 없겠어."
예정대로 들키지 않고 수도 안으로 진입한다면, 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렸을 테지만.
항상 내가 하는 일이 그러하듯.
일이 쉽게 풀리는 법이 없다.
"엘프 마법사! 당장 장거리 공격 마법을 준비해!"
해상전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