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말이 달린다.
나는 왼손으로는 고삐를, 오른손 으로는 휘날리는 앞머리를 쓸어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언제 봐도 참 넓단 말이야."
드넓은 평원이다.
광활한 대지. 시야를 가로막는 숲이나 산맥은 보이지 않고,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은 탁 트여있다.
보기만 해도 가슴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은 경관.
"이 맛에 말 타지."
남부 대륙 서부의 초원지대는 추 운 기후에 별다른 자원조차 없어 그리 큰 가치가 없는 땅이다. 하지만 이 탁 트인 경관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내가 중얼거리며 말을 몰 고 있을 때였다.
"한지훈! 긴장 풀지 말게!"
바로 옆에서 따라오고 있던 인물 이 그리 외쳤다. 그에 나는 시선을 돌려 그쪽을 바라본다.
"이미 우리는 서부전선에 진입한 상태다. 언제 적과 조우할지 몰라. 긴장해야 하네!"
볼로냐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베 르겐이었다. 그는 예의 킬마크가 빽 빽이 아로새겨져 있는 전신갑주를 입고 내 옆을 따라오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 있어. 슬슬 긴장해야 하지."
이틀 동안 내리 달려, 일천의 기사와 구천의 기병들을 이끌고 서부 전선에 당도했다.
즉, 전투지역에 진입한 상황. 이제부터는 전투에 대비해 긴장을 유 지해야 하니.
나는 통신 수정구를 집어 들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전 병력에게 전파한다. 전투태세다. 병장기 꺼내들고, 기사는 마나 를 순환시켜라. 곧 적과 조우할 거다."
내가 그리 말한 직후.
스르릉. 철그럭, 철컥.
배후에서 뒤따르는 기병과 기사 들이 장검을 뽑아들고, 기병창을 들어 을렸다. 그들이 곧 있을 교전에 대비해 기세를 끌어올린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적이다."
저 멀리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피 어오르고 있다. 분명 이쪽을 향해 돌진 중이던 트웨인 기병들일 터.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군단 전투지휘술. 활성화."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르고,
['스킬 : 군단 전투지휘술' 이 활성화 됩니다.]
스킬이 발현되었다.
* * *
"돌진! 돌진하라!"
"제국 놈들을 갈아버려라!"
트웨인 기병대가 나아간다. 그 수가 무려 이만. 그들이 나아가는 길에 흙먼지가 두텁게 일어나고, 말 발굽 소리가 우르르 울린다.
트웨인 군단장들 중 하나, 갈리사는 앞을 노려보며 읊조린다.
"한지훈이라."
방금 전. 그는 누르비테에게 어떤 소식을 들었었다.
- 한지훈이다. 놈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 갈리사. 막아라. 2만 기병들을 이끌고 놈을 쳐라.
한지훈을 막으라는 누르비테의 명령.
그에 갈리사는 휘하 기병들을 이 끌고 나섰고, 이렇게 한지훈을 마주하게 되었다.
갈리사는 앞을 노려본다. 아직 거리가 꽤나 먼 상태였지만, 기마민 족 특유의 우월한 시력 덕분에 선 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한지훈. 제국의 악마."
확실히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 기는 놈이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은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들고 있는 장검에 어린 오러광은 격렬하고도 선명했 으며, 꽤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정체 모를 위압감이 느껴진다.
분명한 강적. 허나 갈리사는 전혀 기죽지 않는다.
"데키타놈도 실망이군 그래. 허접 한 제국 놈에게 당하다니!"
내심 제국군을 깔보고 있었기에.
그가 여태껏 마주해왔던 제국군 군관이란 놈들은 모두 실망스러웠다.
기마능력은 형편없었으며, 마상전투 실력 또한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더해 전투에 임하는 자세 또한 여러모로 나약했으니 .
허술하고도 빈약한 군대. 그것이 갈리사 군단장이 생각하는 제국군 인 것이다.
"저놈도 내 앞에서기만 하면 금세 꽁무니를 내빼겠지."
그렇기에 갈리사는 한지훈을 얕 봤다. 다른 제국군 군관들처럼, 막상 전투에 진입하면 기세를 읽고 도망칠 것이라 여긴 것이다.
허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두두두두두.
갈리사가 이끄는 기마군단이 전 진하고, 한지훈이 이끄는 기병대 또한 다가온다.
그리고 갈리사는 무언가 꺼림칙 한 기운을 느꼈다.
'…위압감이.' 한지훈의 존재감이 점차 선명해 졌다.
멀리서 어렴풋이 느껴졌던 위압 감. 그것이 한지훈이 접근할수록, 그의 모습이 보다 선명하게 보일수록 그 기세를 키워가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순간 갈리 사는 고민해본다.
'후퇴해야…!'
정말 찰나에 불과한 고민이었다. 그가 차마 의식하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짧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
허나 그 찰나의 고민 때문에 갈리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 후퇴를 고민했다고? 이내가 ?!"
인생 처음으로 한 고민이었다.
그 어떤 강적을 마주했을 때도. 싸우다 죽기를 각오할지언정 도망 칠 생각을 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
한지훈의 모습을 보자 난생 처음 으로 도주를 고민하게 되었다.
"제기랄!"
갈리사는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그는 순간 자신이 겁먹었단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한평생 물러섬 없는 것이 자신의 자랑이었거늘, 그저 멀리서 접근하는 놈의 모습을 보고 퇴각을 고민하다니.
인정할 수 없다.
갈리사는 발악하듯 외쳤다.
"돌진! 돌진이다!"
부웅. 그가 커다란 기병창을 들어 올려, 어느새 근접한 한지훈을 향해 겨누며 지시한다.
"상위 전사들이여! 너희들이 기사들을 상대하라! 적장은 내가 맡 지!"
"… 알겠습니다! 갈리사!"
두두두두두두.
갈리사가 달려간다. 그리고 마주 달려오는 한지훈. 그 뒤로 보이는 건 기사와 기병들.
하지만 다른 잡졸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갈리사는 오직 한지훈만을 놀려보며 오러를 돋웠다.
화르륵.
일어나는 청염.
장중한 오러의 파동이 일어 그의 전신을 순환한다.
그리고 곧 접전의 순간.
"오오오오오오!"
갈리사는 웅혼한 함성을 내지르 며 기병창을 내뻗었다.
한지훈과 갈리사의 교차. 이 잠깐의 교차 뒤, 낙마하는 것은 한지훈이리라. 그는 그리 믿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배신당했다.
번쩍.
푸른색 궤적이 순식간에 쇄도해 온다.
* * *
나는 검을 휘두른다.
콰아앙!
많은 오러를 담아 휘두르지는 않는다. 그저 놈에게 중상을 입힐 정도로, 세심히 조율해서.
녀석의 옆구리를 베어버렸다.
퍼억!
"끄아아아아아!"
적장, 갈리사가 옆구리를 부여잡 은 채 낙마했다. 핏물이 후드득 튄다.
나는 왼손으로 얼굴에 튄 피를 훔치며, 나직이 읊조렸다.
"죽이진 않았다."
이번 협상만 잘 끝난다면 트웨인 은 내 아군이 될 놈들이다. 적어도 장수급인 놈들은 죽이고 싶지 않다.
두두두두두.
나는 말을 타고 가며 계속해 검을 휘두르고, 적병을 처치했다.
전진하는 와중 크게 외쳤다.
"돌파! 돌파하는 것에 집중하라! 대열에서 절대 이탈하지 마!"
착각해서는 안된다.
내 목적은 트웨인 놈들을 최대한 많이 죽여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는 것이 아니다.
놈들을 돌파하고, 누르비테의 앞 까지 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 목표였으니 .
"각하의 명령을 따릅니다!"
"대열에서 이탈하지 마라!"
"각 전대장! 부하들을 챙겨라!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세심히 조율해!"
휘합 병력들이 뒤따라온다. 나는 적병의 무리들을 해치우며 돌진해 가는 와중, 눈동자를 굴려 트웨인 놈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갈리사께서 당하셨다!"
"망할! 어찌해야…."
"일단 장군님부터 챙겨!"
트웨인 전사들의 모습은 그들 답 지 않게 혼란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찰나의 순간에 최고지휘관이 당해버렸으니 .
피식 웃었다.
'트웨인. 소수의 장수들이 군을 이끄는 기형적인 구조지.'
트웨인의 지휘구조는 다소 원시 적이다.
제국의 경우에는 군단장이 당하 면 차석인 부군단장이, 부군단장 또한 당한다면 그 후임자인 참모장이 군단의 지휘권을 계승한다.
유사시 상황을 대비해 군단의 지휘우선권을 미리 다져놓은 것이다.
하지만 트웨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군단장이 당하면 그것으로 최고 지휘권은 소멸. 그이후는 측근 놈 들이 서로 분분히 움직일 뿐이다.
너무나도 허술한 지휘체계. 때문에 트웨인에게 있어 최고지휘관의 부재는 너무나도 치명적이다.
그리고 방금 전 나는 놈들의 최고지휘관을 무력화시켰고, 그렇기 에…
"제국 놈들을 추격하라! 갈리사 님의 원수를 갚아라!"
"갈리사 님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이 멍청한 놈아!"
"후퇴, 후퇴하라!"
놈들의 지휘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지리멸렬하구만."
지금 트웨인 놈들은 연계가 무너 지고, 중간 지휘권자들이 서로 제각 기 움직이고 있다.
누구는 이쪽을 추격해오고, 누구는 갈리사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가 며, 누구는 병력을 이끌고 전장을 이탈하고 있으니 .
전혀 통솔이 되지 않는 상태.
우리를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
"나중에 트웨인이 제국 아래로 들어온다면. 저 쓰레기같은 지휘체 계부터 다듬어야겠어."
나는 그리 말하며 말을 몬다.
두두두두두두.
내가 이끄는 기사들과 기병들이 갈리사 군단을 돌파. 계속해 기동한다.
다음은 누르비테다.
"갈리사 군단이 와해되었다고?!"
- 그렇습니다!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급한 트웨인 전사의 목소리. 그의 말이 이어진다.
- 갈리사 군단은 와해! 병력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통솔할 수 없습니다.
"… 망할."
"제국 놈들. 바로 돌파해버리다 니. 예상보다도 돌파능력이 출중하 군."
"갈리사 그 무능한 놈이! 2만으로 1만조차 막아내지 못하다니! 그 게 무슨…!"
트웨인의 지휘 천막에 모인 여러 장수들이 목청을 높였다.
한지훈이 병력을 이끌고 등장했다. 그에 누르비테는 갈리사를 보냈고, 그가 한지훈을 막아내기를 기대했다.
허나 막지 못했다. 그러기는커 녕….
- 갈리사께서는 중상을 입어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본인이 당해 군단이 와해되었다.
물론 제국 놈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잠깐의 돌파라 하나, 그럼에도 일만으로 이만과 교전을 벌인 것이 니. 못해도 수천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을 터.
- 제국 놈들의 기세가 전혀 줄어 들지 않습니다! 놈들이 계속 기동 합니다!
허나 그들의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부터라는 듯, 사기를 드높이며 어딘가를 향해 달 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딘가는 다름 아닌.
"한지훈. 나를 노리고 있군."
누르비테가 있는 이곳, 트웨인의 지휘 천막이 될 것이었다.
수정구 앞에 앉아있던 누르비테 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우리 트웨인의 약점을 노렸어. 현장의 최고 지휘권자가 탈락한다 면 이하 군단이 마비되지. 놈은 그 점을 파고들고 있다."
누르비테 또한 이전부터 깨닫고 있던 약점이었다.
트웨인의 지휘체계는 조잡했다.
병사들부터 참모와 장교들까지 세세하게 계급과 권한을 부여, 지휘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제국군과 달리. 트웨인에는 정해진 지휘권 계승 순서가 없었다.
만일 지휘관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어 무력화 된다면, 그이하 지휘체계가 흐트러져 붕괴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지훈은 지휘관들을 노리고 있다.
놈은 갈리사를 낙마시켜 갈리사 군단을 무력화시켰으며, 이제는 누 르비테가 있는 이곳 지휘천막을 향 해 돌진해오고 있는 상황.
위험하다.
만약 누르비테마저 당한다면, 트 웨인군 전체의 지휘가 흔들려 각 부대는 사분오열되고 만다.
그렇기에 측근 장수들이 조언했다.
"누르비테! 몸을 피하십시오!"
"다른 천막을 준비하겠습니다. 그곳에서 군을 이끄십시오. 우리의 위 대한 한이시여."
몸을 피하라고. 지휘천막에서 다른곳으로 이동해 트웨인군을 이끌 라고 말이다.
합당한 요청이었다. 그 어떠한 일이 있다 한들 지휘권의 붕괴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이니.
허나,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누르비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을 집고, 갑주를 입었다. 그가 투 구를 뒤집어쓰며 말한다.
"한지훈. 확실히 놈은 강한 무력을 지녔지. 하지만 나 또한 약하지 않다."
트웨인 민족은 약한 이를 따르지 않는다. 그들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강함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트웨인의 군주, 누르비테는 트웨인에서 가장 강대한 무력을 지니고 있는 이.
그 또한 가진 능력에 자신이 있었고. 그렇기에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누르비테였다.
"놈만 처치한다면, 제국 놈들의 사기를 꺾어놓을 수 있겠지."
펄럭. 누르비테가 천막 밖으로 나와 걸어가며 읊조린다.
그가 시선을 돌려 북쪽을 바라본다. 방금 전 갈리사 군단이 무너졌 던 방향.
그쪽을 바라보자 보인다.
"저기 오는군."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뿌연 연기. 수천의 말발굽이 일으키고 있는 모래먼지다.
"한지훈."
제국의 악마. 놈이 자신을 노리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그가 나직이 지시한다.
"누르비테 군단. 전투를 준비하라."
이번 전투결과에 따라 전쟁의 판 도가 정해질 것이다.
누르비테는 한지훈에 맞서기 위해 출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