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데키타는 멍하니 읊조렸다.
"…서부 대륙."
입에 담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곳이다.
자신의,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부족 트웨인의 본래 터전.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활한 초원, 내리쬐이는 태양, 밀밭은 햇쌀을 반짝이며 황금빛으로 빛나고, 흙 은 기름기를 머금어 윤기 나는. 그 들의 고향이다.
지금 자리잡은 황랑한 서부초원 과는 천지 차이인 장소.
한지훈은 방금 전 데키타에게 제안했었다. 누르비테를 설득해 제국 과 휴전한다면 추후 서부 대륙 정 벌을 지원하겠노라고. 그들 트웨인 이 고향을 되찾을 수 있게 하겠노 라고 말이다.
허나,
"개소리군."
데키타는 그리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조금만 생각 해본다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기 에.
"네놈은 일개 장성에 불과하다. 한지훈."
그 명성이 제국 황제와 필적하는 전쟁영웅이기에 한순간 잊어버렸지만, 한지훈은 일개 장성. 군단장에 불과하다.
물론 군단장이라는 직책은 그리 낮은 것이 아니다. 무려 이만에 달 하는 병력을 통솔하며, 전략 단위의 전투를 주도한다.
명실상부 고위 군관.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하물며 황제의 총 애를 받는 데다가 막대한 전공을 쌓아온 그이니, 그가 지닌 영향력은 결코 무시 못 할 터.
허나 그래봤자 일군의 장성에 불과하다.
"일개 군단장에 불과한 네놈이, 우리 트웨인과 협상할 권한이 있으 리라 생각하긴 어렵군."
제국은 황제 아래 각 부처의 권 한이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다.
전쟁과 국방, 군사를 총괄하는 국방성. 치안과 민심을 다스리는 내 무성. 외교와 해외교류, 그리고 무역을 다루는 국무성. 제국 내 모든 재정처리를 도맡는 재무성과, 마법 의 발전과 마법사들의 관리를 도맡는 마법성. 그리고 통치에 필요한 법체계를 운용하는 법무성까지.
그중 타국과의 외교는 온전히 국 무성 권한이었다. 국방성 소속이자 일개 군단장에 불과한 한지훈에게 트웨인과 외교를 다룰 권한 따위는 없는 것이다.
본래라면 말이다.
"그래. 그 말 할 줄 알았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지훈은 픽 웃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 서류를 봐라."
그가 꺼내든 것은 단 한 장의 서류였다. 고급스러운 황금색 도금이 반짝이는, 꽤나 화려한 서류.
그리고 그 서류의 가장 아래에는 어떤 인물의 직인이 박혀있었다.
"… 이건."
데키타는 서류를 들여다본다.
"황제 폐하!"
덜컹!
제국의 황궁. 커다란 알현실의 대문을 박차고 누군가가 급히 들이 닥쳤다.
그에 옥좌 위에 앉아있던 청년,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제국 황제가 고개를 들어올려 그쪽을 주시한다.
"무슨 일인가. 카를로스 국무성 장관."
알현실에 들어선 인물의 이름은 카를로스 필 샘버그. 제국 국무성의 장관인 인물이었다.
황제의 말에, 카를로스 장관이 옥좌의 앞까지 걸어가 고개를 조아 리며 말한다.
"폐하! 소식을 들었습니다!"
방금 전. 카를로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어떤 소식을 들었다.
황제가 한지훈에게 중요한 권한을 위임했다는 소식.
"한지훈에게 대 트웨인 외교권한을 넘기겼다는 소식이, 진정 사실이 옵니까?!"
다름 아닌 외교 권한을 넘겼다는 소식이었다.
제국의 황제 아르테니아가 한지훈에게 트웨인에 관한 외교권한 전권을 한시적으로 위임한 것이다.
카를로스의 물음에 아르테니아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렇다. 한지훈 라이젠 백작에게 트웨인에 대한 외교권한을 일시 위 임했다."
"어째서입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긍정하는 아르테니아의 말에, 카를로스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그리 외쳤다.
외교 권한. 분명 오롯이 제국 국 무성의 권한이었다.
헌데 그 외교권한의 일부를 한지훈에게, 그것도 국무성의 수장인 자신과 상의 한마디 없이 단숨에 넘 겨버린 것이다.
국무성 장관인 카를로스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당연한 일.
그에 아르테니아가 대답한다.
"자네의 기분이 상한 것은 충분히 이해하네. 그대의 권한이 침해당 한 것이라 여겨질 터이니."
"…하오면 어찌하여 ,"
카를로스는 황제의 결정을 도무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아닌 외교다. 그리고 외교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서류의 한 줄로도 거대한 이익이 좌우되며, 작은 오류로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헌데 그토록 중요한 외교권한을, 다른 인물도 아닌 군관에게 넘기다 니. 아무리 한지훈이 황제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는 인물이라 하지만 그리 신중한 결정이라 하긴 힘들다.
그런 카를로스의 의문에, 아르테 니아가 대답한다.
"한지훈이 나에게 그러더군."
그가 시선을 옮겨, 알현실 안에 자리해있는 커다란 지도를 바라본다.
지도는 언제나 보아왔던 남부 대륙의 지도. 이곳 제국과 다수의 열 강들이 표시되어 있는 거대한 군사 지도다.
하지만 황제가 바라보는 것은 남부 대륙이 아니었다. 아직 제대로 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해 빈 여백 으로 만들어져 있는 공간. 남부 대륙의 밖.
"서부 대륙."
황제는 서부 대륙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 제국의 힘이 이곳 남부 대륙에서 벗어나, 서부 대륙까지 뻗어 나가게 만들 것이라고. 그 발판을 위해 트웨인과의 외교 권한이 필요하다고 하더군."
"… 그게 무슨."
카를로스는 표정을 찌푸렸다.
너무나도 얼토당토 않은 소리였 기 때문에.
그가 입을 열어 말한다.
"폐하. 서부 대륙까지 제국의 힘을 뻗칠 것이라니. 힘든 일입니다."
아직 제국은 남부 대륙조차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물론 그리 머지않아 제국은 남부 대륙 전체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엘프의 조력, 그리고 흑마법사의 잠적. 네 개의 적성 열강중 하나인 카렌이 멸망해 제국 총독령이 되었 으며, 나머지 세 개의 전선은 안정 되어가고 있다.
더해 여유 있는 북부군이 동부와 서부를 향해 기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국은 그리 머지않아 확실한 승기를 쥐게 될 것이고. 결국 협상 동맹과의 전쟁은 제국이 승리하리라.
헌데 그렇다 한들.
"남부 대륙 전체를 통일한다 한들. 타 대륙 정벌은 몹시 힘든 일 입니다. 폐하."
대륙 내에서 패권을 쥐는 것과, 가진 힘을 대륙 밖으로 투사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미 동부 대륙 전체를 통일한 거대 국가, 크루거 연방마저 대륙 밖으로는 그리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 남부 대륙 정벌을 시도했고. 긴 전쟁 동안 고작 슈베 츠 왕국을 그들의 자치령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연방이라는 초강대국이 막대한재화와 수많은 인명을 소모해 이룬 결과라기엔 다소 초라한 것이 사실.
헌데 지금 황제는 제국이, 아직 남부 대륙조차 통일하지 못한 그들 이 언젠가 서부 대륙으로 진출할 것이라 하고 있다.
현실을 아는 카를로스로선 불가능한 일이리라 여기는 것이 당연할 터.
그런 그의 기색을 읽은 것인지, 아르테니아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카를로스. 물론 짐도 알고있네. 서부 대륙으로 제국을 진출시킨다 니. 아직 남부 대륙조차 통일하지 못한 지금 제국의 국력으로는 다소 힘든 일이지."
아르테니아 또한 알고 있다. 타 대륙 진출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는 믿어본다.
"짐에게 타 대륙 진출을 제안한 인물이 바로 한지훈 라이젠 백작이 라네."
한지훈. 자신이 신뢰해 마지않는 군관.
그는 여지껏 여러 뛰어난 업적들을 세워왔다.
귀족 우월주의 파벌을 궤멸시켰고, 제국 수도를 구원했으며, 흑마법사를 토벌하였다. 어느새 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제국의 적들을 착실 히 제압해 나가고 있다.
다른 군관이 타 대륙 진출을 입에 담았다면, 황제는 결코 그를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름 아닌 '그' 한지훈이 해온 제안이다.
"왠지 그런 직감이 들더군. 한지훈이라면 정말로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라면 가능하다. 황제는 한지훈을 신뢰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 그렇습니까."
방금 전 카를로스는 황제의 얼굴 을,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지훈의 이름을 입에 담은 황제의 눈동자에는 신뢰와 믿음이 가득했다.
자신이 무어라 한다 한들 결코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 터다.
카를로스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 * *
"좋아. 잘 되었네."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천막 밖으로 걸어나왔다.
걸어가는 와중, 시선을 내려 손 아귀에 들린 서류를 바라보았다.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는 화려한 서류 한 장. 그것의 가장 아래에는 제국 황제 아르테니아의 직인이 박 혀 있다.
피식 웃어본다.
"외교권한. 정말 줄 줄은 몰랐는데 ."
나는 데키타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그에게 가기 전에 황제에게 연락해 어떤 권한을 얻어 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트웨인과의 외교 권한.
트웨인과 전쟁 중인 기간에 한 해, 녀석들과 여러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냈다.
사실 정말 내게 외교권을 주리라 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군관이었 지, 국무성 소속 외교관료가 아니었 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흔쾌히 내게 외교 권을 위임했고. 덕분에 예상보다도 훨씬 쉽게 데키타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천천히 걸어 군단장 막사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한지훈."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돌려 바라보니 역시나 나와 적지 않은 친 분을 나눈 이.
"오스카."
오스카 디 로드게리스 후작. 그 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나는 나아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 추었다. 그가 다가와 피식 웃으며 입을 연다.
"소문 들었네. 한지훈."
"소문이라. 무슨 소문?"
"방금 전 트웨인 군관… 데키타 라 하던가?"
저벅, 저벅.
오스카가 걷기 시작한다. 나 또한 그의 옆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늦은 밤이 되었다. 달빛 이 강해 은색 조명이 군영 내부에 드리워진다.
오스카가 걸어가며 말한다.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왔지."
"그래."
"깨어나자마자 소란을 일으키던 녀석이 자네와 대화하자마자 얌전 해졌다더군."
오스카는 내가 데키타와 대화를 나누고 왔다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들은 듯했다.
"그리고, 이건 내 인맥을 통해 들은 이야기다만."
그리고 그가 알고있는 사실은 단순히 내가 데키타와 대화했다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 외교권한까지 얻어 냈었지. 서부 대륙 진출을 위한 발 판을 마련한다며 말이야."
"… 어디서 들은 이야기지?"
나는 놀라 그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황제에게서 외교권까지 부여받았단 사실. 민감한 정보다. 당연히 정보통제가 이루어 질 터. 본래라면 오스카는 몰라야 하는 일인 것이다.
헌데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채 하루가 안 지나서 말이다.
그는 어떻게 이런 민감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인가.
묻는 내 말에. 오스카가 픽 웃으 며 답한다.
"한지훈. 이래봬도 나는 후작가의 가주라네. 우리 로드게리스 가문의 정보망을 무시하면 안 돼."
자주 잊어먹지만, 오스카는 명망 높은 로드게리스 후작가의 가주다.
"국무성에도 우리 가문과 친분 깊은 인물이 많이 있다네. 그 누구 도 아닌 폐하 본인께서 일개 장성 에게 전폭적인 외교권한을 부여한 일이다. 나같은 상위 귀족들에게는 금새 소문이 퍼지지."
그런 그이니. 내가 황제에게 외교권한을 얻어냈다는 소문이야 그리 어렵지 않게 얻어낼 수 있었을 터다.
나는 쯧 혀를 찬다.
"그것도 정도껏이지. 폐하께 권한을 얻어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쪽까지 흘러들어간 건지."
그런 내 모습이 무엇이 그리 재밌다는 것인지. 오스카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한지훈. 자네는 제국의 영웅이 야.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모든 제국민들이 주시한다네. 소문이 빠르 게 퍼질 수밖에 없지."
그말인 즉. 내 이름이 너무나 유명하기에, 그만큼 이쪽의 소문이 빨리 퍼져나간다는 이야기다.
"한지훈."
문득 오스카가 그리 말하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 무언가 진 중한 말을 하려는 듯, 그의 눈동자 가 깊은 현기를 머금는다.
"한지훈. 내게 말해주게."
저벅. 오스카가 발걸음을 멈춘다. 그의 시선은 여전이 이쪽으로 향해 있는 상태.
"너는 지금 무언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
"… 음."
큰 그림 비슷한 걸 그리고 있긴하다. 하지만 시치미 떼본다.
"글세. 큰 그림이라니. 나는 그림 그리는 취미는 없다만."
"그렇게 모르는 척 해봤자 소용없다네. 한지훈. 나는 너에 대해서 잘 알아. 십인장부터 군단장이 된 지금까지. 쭉 자네를 보아왔으니까 말이야."
확실히 제국군 장성들 중 나란 놈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물이 바로 눈앞의 오스카였다.
십인장과 천인장 시절에는 오스카의 3군단 소속이었고, 군단장이 된 지금 또한 그의 군단과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
그가 천천히 말한다.
"확실히 자네는 무언가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어. 그것이 아니라 면 그동안 자네가 해온 일들이 말이 되지 않아."
오스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 려 하늘을 바라본다. 밝은 달빛, 선 명하게 박혀있는 별무리들.
"제국의 암적 존재, 귀족 우월주 의 파벌을 소탕했다. 황제의 강력한 신임과 황제파 귀족들의 지원을 얻 게 되었다."
오스카는 그 별무리들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다.
"자네의 영지 루벤. 처음에는 인구수 일만 남짓한 적당한 크기의 남작령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전쟁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30만이 넘는 도시로 키워냈지."
그가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내 발자취들.
"어떤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 지만. 엘프와 드워프들을 우군으로 영입했다. 너는 제국뿐만이 아닌 또 다른 아군을 가지게 되었지."
단순히 전장에서 활약했던 내용 이 아닌,
"카렌 본토 진격전 초창기. 전 흑마법사 바네사 또한 구출해냈다. 그녀를 회유해 흑마법사를 억제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연구중이라 하지."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세력을 드높이고 있는지. 어떤 이들을 세력 원으로 끌여들이고 있는지.
그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트웨인의 장군 까지 회유했군. 언젠가 트웨인마저 자네의 강력한 우군이 될지도 모르 겠어."
한동안 별자리를 바라보며 말을 잇던 오스카. 그가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다시 마주친 눈동자.
그의 감정을 읽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진한 호기심.
그만큼 오스카는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는 무언가 설계하고 움직이 고 있어. 이번 카렌과의 전쟁 때 부터 아니, 어쩌면 그이전부터."
내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어떤 계획이기에 이토록 많은 아군들을 영입하고 있는지.
한지훈."
그렇기에 그는 다시금 묻는다.
"자네의 목적이 뭔가?"
내가 뭘 노리고 있느냐고. 무엇을 위해 이토록 많은 아군을 만들어 세력을 일구고 있느냐고 말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내 목적이라."
처음 이 엿같은 세상에 떨어졌을 때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내 목적이 바뀐 적은 단 한번 도 없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본래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이걸 그대로 말해줄 수는 없는 일.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말 해본다.
"내 목적은 세계정복이야."
삼류 악당같은 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