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카렌이 멸망했군."
석양이 내려깔린 드넓은 평원.
한 청년이 커다란 전투마 위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며 그리 읊조렸다.
"제국 놈들. 제법이야."
청년의 모습은 너무나도 늠름했다.
짧게 깍은 청색 머리카락은 강인 한 인상을 주었다. 반면 초록색 눈동자는 언뜻 온화해 보였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내려, 그 의 몸을 바라본다면. 그 누구도 청년에게 온화해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태양으로 그을린 구릿빛 피부 위. 수많은 상처와 생채기가 나있다. 끝없는 격전으로 새겨졌던 여러 전상들의 흔적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누르비테 한.
초원의 왕국 트웨인의 왕이자, 출중한 무력을 지닌 전사였다.
왕은 동쪽을 멍하니 바라본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초원이 보인다. 내려깔린 석양으로 인해 붉게 물든 초원. 그 너머를 바라보며 왕 은 생각했다.
' 제국.'
저지평선 너머에 있는 국가의 이름이다.
커다란 영토와 비옥한 국토를 지닌 국가. 자신의 왕국이 지닌 이 척박한 대지가 아닌, 기름지고 온화 한, 농사가 가능한 영토.
'가지고 싶다.'
청년은 그 땅이 탐났다. 그렇기에 동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였다.
그렇게 누르비테가 우두커니 서 있을 때였다.
"한!"
다그닥, 다그닥.
누군가가 말발굽 소리를 내며 초원을 가로질러왔다. 누르비테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씩 미소 지었다.
"데키타. 무슨 일인가?"
다가온 이의 정체는 자신의 측근 데키타였다. 일만의 기병과 수천의 기사를 지휘하는 이.
데키타가 누르비테의 바로 옆까지 와 정지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한! 그 소식 들었습니까?! 카렌 왕국이 멸망당했습니다!"
"나도 들었다."
누르비테는 품속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내보였다. 통신 수정구였다.
"방금 전. 협상동맹의 군주들과 통신하며 들었다. 제국군이 수도까지 밀어닥쳐 라피엘을 죽이고 왕궁을 불태웠다고 하는데 ."
"괜히 급하게 달려왔군요."
"아니. 마침 잘 왔다. 할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누르비테는 꺼내들었던 수정구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어 갈무리했다. 그가 시선을 돌려, 북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데키타. 네가 북쪽으로 가라."
"한!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런 누르비테의 지시에, 데키타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재 트웨인과 제국 서부군과의 전투는 백중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데키타가 이끄는 일 만의 기병과 수천의 기사들이 빠진 다면?
"저희 트웨인은 지금의 전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간신히 백중세를 이루는 지금 전 황에서 데키타 군단의 이탈은 치명 적이었다.
당장 전선 이곳저곳에 빈틈이 생길 것이고. 그렇다면 제국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게될 터.
데키타는 그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허나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데키타. 너는 혹시 한지훈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나?"
"한지훈이라면. 혹시,"
"그래. 한지훈 라이젠. 제국의 전쟁영웅이라는 녀석이다."
누르비테가 전투마의 배를 가볍게 찼다. 그에 천천히 걷기 시작하는 전투마. 그가 고삐를 몰아 본영 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뒤따라오는 데키타.
누르비테의 말이 이어진다.
"듣자하니, 개인의 무력은 무지막 지하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대단하다고."
"저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제국 의 악마 아닙니까?"
"맞아."
한지훈의 이름은 이미 트웨인에서도. 아니, 이번 제국 침공에 참여 한 협상동맹의 네 개 나라 모두에서 유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로잡은 제국의 포로들이 하나같이 지껄여댔 으니까.
언젠가는 한지훈이 자신이 있는 이곳 서부전선까지 와,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고.
"한지훈은 아마도 이곳. 서부전선 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누르비테는 한지훈이 서부전선으로 올 것이라고, 그가 이곳에서 자신들과 싸우게 될 것이리라 추측했다.
그에 데키타가 묻는다.
"직감입니까?"
"그래. 직감이다."
"… 그렇군요."
아무런 논리 없이 그저 직감으로 이루어진 추측. 하지만 데키타는 군 말없이 누르비테의 말을 수긍했다.
그의 직감은 날카로웠으니까.
항상 그러했다.
누르비테가 적이 매복해 있을 것 이라 직감한 곳에 적이 있었고, 적의 진형 중 취약할 것이라 여긴 장소는 진정으로 취약했다.
그렇기에 그의 측근들은 하나같 이 누르비테의 직감을 신뢰했다.
머나먼 과거 서부대륙에서 ?겨 날 때. 수도 없이 그와 그의 측근 들을 살렸던 것이 바로 다름 아닌 그의 직감이었으니 .
"한지훈은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전투를 방해하겠지."
그런 그가 한지훈이 이곳으로 오리라 직감했다.
벌써 두 국가의 군주를 처치한 그다.
요한바르첸 공국의 헤임스 요한바르첸 공작, 그리고 카렌 왕국의 라피엘 데이고르 카렌.
다음차례는 누르비테 그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 대비해야한다.
누르비테가 지시했다.
"데키타.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라. 제국 놈들이 이곳에 도달하 기 전까지. 끝없이 소모시켜라."
만약 제국 북부군 놈들이 전력을 온전히 보존한 상태로, 전선에 도달 한다면?
트웨인은 끝장이다.
그렇게 놔둘 수 없다.
때문에 누르비테는 그들 북부군이 이곳 전선에 도달할 때까지, 기 병을 통한 게릴라전을 통해 최대한 그들의 전력을 약화시킬 생각이다.
"제국 놈에게 우리 트웨인 기마 민족의 저력을 보여줘라."
"… 알겠습니다. 한, 우리의 위대 한 정복자이시여."
데키타와 그가 이끄는 군단이 북부로 향한다.
* * *
이후 나는 영지의 이곳저곳을 살 폈다.
내정의 상태와 영지현황을 파악했다. 영지군과 공방을 점검했다. 바네사를 위한 공방 또한 설치했고, 도시의 발전계획 또한 정비했다.
2주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나는….
"이제 돌아가시는군요. 한지훈 님."
군영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초장거리 도약 마법진 위에서, 천천히 앞을 바라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내 측근들.
영주대리 랑스와 영지군 최고지 휘관 마이사부터. 행정관들, 드루바를 비롯한 드워프 족장들, 그리고 바네사와 영지군 지휘관들까지.
내 영지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이 들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는 것이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잘 놀았고. 나중에 다시 시간이 생기면 찾아오지."
"노시다니요. 일하신 것 아닙니까? 오랜만에 얻은 휴가인데. 그동안 영주일만 하신 것 같아서 마음 이 아픕니다."
"아니. 이게 나한테는 쉬는 거야."
험난한 전장에서 벗어나, 이렇게 여유롭게 내정을 살피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휴식이었다.
뭐, 매일 이렇게 살라고 하면 좀 이 쑤셔서 못살 것 같지만.
"그동안 잘 해줬고,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줘. 나는 전장으로 돌아가 겠다."
점점 마법진의 세기가 강해지고, 웅혼한 마나의 파동이 일렁인다. 초 장거리 도약 마법진의 발동이 임박했다.
잠시 후. 나는 북부 제국 식민지 카렌 총독령으로 향할 것이다.
내 군단이, 나의 군대가 주둔해 있는 그 장소로.
나직이 읊조린다.
"전송."
번쩍!
환한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직후 스쳐 지나가는 부유감.
빛무리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지고, 나는 눈을 떳다.
그러자 단숨에 바뀌어져 있는 주위 경관.
"군단장 각하! 귀환하셨습니까?"
"베르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베르너 알크미르. 내 군단의 부군단장이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내 군단 지휘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환하게 반짝이고 있는 비콘.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장교와 참모들.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서류 와 전술지도들까지.
저벅. 나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 한다.
"방금 전 휴가에서 돌아왔다. 부 군단장. 그동안 특이사항들을 보고 해다오. "
"네! 군단장 각하. 보고드리겠습니다."
베르너가 척 경례하더니, 서류를 집어들고 내 옆을 따라오며 말한다.
"인사과정을 끝냈습니다. 군단장 각하께서 직접 지시하셨던 엘락 백인장의 천인장 진급, 그리고 카일 십인장의 백인장 진급. 두 가지 진급 안건 또한 무리 없이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좋아."
영지로 향하기 전. 엘락과 카일 의 승급을 지시해뒀다.
나는 전투중 상관의 전사로 인해 현지임관 했지만, 지금은 전쟁이 끝 난 뒤의 평시상태. 백인장 이상 장 교들의 인사과정은 제국 국방성 인사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승인절차가 지금 완료 되었다. 엘락과 카일은 무리 없이 진급심사를 통과했고. 이제는 진급 식만 남은 상황.
저벅, 저벅. 베르너가 내 옆을 따 라오며 계속 보고한다.
"보급, 인원충원, 부대 재정비. 모두 완료했습니다. 푹 쉬어 사기 또한 충만합니다. 저희군은 언제든지 기동할 수 있습니다."
"미리 말했던 대로 비축물자를 충분히 풀었겠지?"
"매일 술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나눠주고, 부대가 재정비되는 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했었다.
카렌과의 전쟁이 끝난 기념이기 도 했고. 내지휘를 충실히 따라준 병사들에 대한 포상이기도했다.
내 군단의 병사들은 근 이주일 동안 늘어지게 놀고먹었으며. 전투 의지를 되찾았다.
만전의 상태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단장 각하. 제국 국방성에서 전쟁계획서가 내려왔습니다."
"계획서라."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베르너가 서류 하나를 내민다. 그것을 받아 읽어갔다.
재차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음 상대는 트웨인이구만."
트웨인. 남부대륙 서부 초원지대 의 기마민족. 스스로를 초원의 왕국 이라 부르는 이들.
국력은 카렌이나 람셀에 비해 훨씬 미약하지만. 강한 이들이다. 병력의 대다수가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적은 수에 비해 강한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다.
피식 웃었다.
"뭐. 심심한 상대는 아니네."
그래봤자 과거 게임 속에서 내게 패배한 이들이다. 질 거란 생각 따 위, 전혀 들지 않는다.
저벅, 털썩.
계속해 걸어 내 집무실 문을 열고, 자리에 착석했다. 그곳에 앉아 지도를 바라본다.
지도는 남부 대륙 전체를 표시해 놓은 지도. 나는 지도의 서부지역을 주시한다. 그간 서부전선의 전투현 황이 보였다.
막대한 기동력으로 몰아붙이는 트웨인의 기마병력. 견고한 방어력 과 지역 장악능력으로 방어선을 구 축해가는 제국군.
전선은 정체 상태였으며. 크고작 은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결정 적인 승리나 패배는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이상황에서 우리 북부군의 일부 가 진출한다면.
단숨에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상황에서 어찌 기동해야 보다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놈들을 효과적으로 몰 아넣을 수 있는지.
나는 잠시 지도를 바라보고는, 베르너에게 물었다.
"베르너. 서부 트웨인으로 향하는 북부군 전력이 어느 정도지?"
"저희 군단을 포함해 5개 군단입 니다. 각하."
"그렇군."
북부군은 도합 13개 군단으로 이 루어져있다. 그리고 그 모든 병력이 다른 전선으로 곧장 기동하지는 않았다.
3개 군단은 카렌에 주둔해 치안을 확립하며 잔당을 소탕할 것이고. 5개 군단은 서부 트웨인 방면으로, 나머지 5개 군단은 동부 람셀 방면 으로 향한다.
내 13군단은 서부 트웨인 방면으로 향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베르너. 서부 방면으로 기동할 단장들에게 통신 돌려. 진군 계획을 짜야겠지. 군단장 회의를 열 거다."
"알겠습니다! 군단장 각하."
베르너가 수정구를 들어 올리고 통신을 시작했다. 이제 그는 다른 군단장들을 불러 모을 것이고, 나는 타 군단장들과 회의해 진군계획을 만들 것이다.
다시금 시선을 내려 지도를 바라 본다. 역시나 바라보는 것은 서부전 선. 붉은색 화살표가 긴박하게 움직이는 그 장소들.
문득 떠올려본다.
'트웨인.'
사실, 나머지 협상동맹들의 국가 들 중 그나마 호감이 가는 국가였다.
초원의 왕국. 기마민족으로 이루 어진 유목국가. 강력한 기병들로 막 강한 전투력을 뽐낸다.
나는 그들의 수장. 누르비테 한 이라는 인물을 알고 있다.
[누르비테 한]
[트웨인의 군주]
["네가 한지훈이군. 과연 범상치 않은 인물이로구나."]
일국의 군주라기엔 그리 품위 있어 보이는 인물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전쟁을 즐기는 전사.
커다란 옥좌 위에 앉아 근엄한 표정을 짓기보다, 전투마를 타고 달리며 함성을 내지르는 걸 더 선호 하는 인물이다.
누르비테는 강했고, 정열적이었으 며.
그의 최후는 장렬했다.
[누르비테 한]
[트웨인의 군주]
["오오… 제국의 군대는 강하구나. 병사들은 강인하고, 장교들은 충성하며, 장군들은 유능해. 개중 자네는 특히나 유능하군."]
["자네처럼 대단한 인재들이 소속되어 있는 것이 바로 제국군이다. 처음부터 질 싸움이었어…."]
내 기사단을 상태로 마지막까지 분투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낸 다음 에야 녀석을 몰아넣을 수 있었다.
놈 하나를 죽이는데 기사단 2개 전대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만큼 놈은 강했다.
[누르비테 한]
[트웨인의 군주]
["패배를 인정하지. 내 목을 취하고, 영토를 가지거라."]
["하지만 부하들은 살려다오. 저들은 내 뒤를 따른 것밖에 잘못이 없다. 모든 것은 전쟁을 일으킨 내 책임."]
["부디 내 목으로 끝내주게."]
그는 마지막, 처형 직전. 내게 요구했었다.
순순히 본인의 목과 영토를 내어 줄테니 부하들을 살려달라고. 오직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녀석의 요청을 묵살하고, 부하들까지 모조리 죽 여 버렸다.
후환을 남기기 싫었기 때문에. 이미 끝난 전쟁, 완전히 정리해버리 려 했던 것이다.
허나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다를 거다.
'누르비테 한. 초원의 왕.'
놈은 그저 전사다.
다른 국가의 군주들과 달리, 정치와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전투의 희열과 승리의 성취감 뿐.
솔직히 말해, 군주라는 자리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전사로서는 남부 대륙에서 최고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니.
나직이 중얼거려 본다.
"기병대장. 슬슬 얻어야 할 때가 되기도 했지."
녀석이 탐난다.
그렇기에 결정했다.
"내 세력원이 하나 더 늘겠군."
이번 전쟁에서 쓸 만한 인재를 하나 영입할 것이다.
전 트웨인의 군주라는, 이색적인 경력을 가진 인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