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사관학교…?"
마이사가 멍한 눈으로 이쪽을 주 시한다. 차마 믿기 힘들다는 듯한 반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관학교다. 가서 장교가 되어 와라."
"한지훈. 그대가 자주 잊어먹는 것 같다만. 나는 남자가 아니다. 여자다. 여자인 내가 사관학교에 갈 수 있다 여기는 건가?"
"안 될 건 뭐야?"
나는 씩 웃었다.
"마이. 너는 모르겠지만, 제국 사 관학교는 여자도 갈 수 있다."
그리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었지만. 사실 제국 사관학교는 여성 도입교할 수 있었다.
당장 황가의 모든 인물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사관학교에 입교 해 장교육성과정을 거친다. 이는 황 가의 인물이 유사시 군을 지휘해야 할 상황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여자라 한들. 성적만 된다면 충분히 갈 수 있어. 더해 인맥과 친 문까지 얻을 수 있고 말이야."
제국 사관학교. 명실상부 제국의 가장 상위 교육기관 중 하나다. 간 다면 나름의 인맥과 친분을 취할 수 있다.
게다가 제국 수도 사관학교의 경우. 공작, 후작, 백작가 등 고위 귀족의 자제들이 주로 입교한다.
때문에 일반 귀족가문에서도 남성 후계자가 없다면 여성 자제를 보내기도했다. 성년이 되기 전에 쌓아놓은 친분은 때론 큰 힘이 되 니까.
물론 그런 여성생도들의 경우. 사관학교를 수료한다 한들 군직에 종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하여튼 없는 경우는 아니다.
"…사관학교라."
내 말에 턱을 괴고 고민하는 마 이사. 보아하니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인지라 고민하는 것 같다.
여기서는 등을 밀어줄 때.
나는 그녀에게 묻는다.
"마이. 재밌지 않았나?"
"재밌다니. 뭐가?"
"군을 지휘하는 것 말이야."
내 물음에 잠시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마이사.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수긍.
나는 싱긋 웃었다.
"그래. 재밌겠지."
군대를 지휘하는 것.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천생 지도자의 적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 위에 앉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통솔한다. 그녀의 손짓과 눈 짓, 목소리에 병사들이 반응해 움직 인다.
재미없을 수가 없다. 특히나 그녀처럼 막대한 재능을 가진 이라면 더더욱.
나는 과거 마이사의 모습을 똑똑 히 기억하고 있다.
[마이사 슈베츠][연합 중앙군 최고사령관]
["한지훈. 네놈은 여기서 패배한다."]
["네 용병술이 뛰어날지, 내지략이 뛰어날지. 한번 제대로 겨뤄보자 꾸나."]
전장에 오연히 서서 수십만 대군을 지휘하던 그녀의 모습.
모니터 너머 보인 그녀의 눈동자. 분명 이지적으로 차갑게 가라앉 아있었으나. 한편으로는 희열과 흥분 또한 머금고 있었다.
그런 그녀다. 그저 이곳에서 영지군을 지휘하는 것만으로는 만족 할 수 없을 터다.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언제까지 영지군으로 마물사냥이나 할 거냐?"
"… 전쟁터에 가라는 말인가?"
"그래. 영지군을 지휘하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거다. 네 적성에 도 맞을 거고 말이야."
진짜 전쟁에 비한다면, 영지군을 다루는 건 소꿉장난에 불과하다.
기병의 말발굽소리, 병장기가 맞 부딪혀 이는 쇳소리. 병사들의 고함 과 함성. 후욱 일어나는 모래먼지. 펄럭이는 깃발.
수만, 수십만의 병사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역사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전장이었고. 나 같은 군관이 살아가는 장소였다.
"마이. 사관학교로 가라. 그리고 전장으로 가라. 그렇다면 네 숙원을 이루는 것에도 만만찮은 도움이 될 거다."
"나의 숙원이라면."
"네 고국.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에 진지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숙원은 자신의 고국인 슈 베츠 왕국을 해방해 재건하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제국에서 높은 위치를 확보하고, 나름의 힘을 기르는 것이 필수 불가결.
"제국 군관이 되어라."
그녀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나 를 올려다본다.
마이사와 대화를 마친 뒤. 나는 영지에 어떤 인물을 불러들였다.
"바네사. 여기가 네 공방이다."
불러들인 인물은 바네사였다.
블랙 오케스트라에서 마녀라는 이명으로 불린 흑마법사이자 연금술사.
나는 내 영지 한켠에 그녀를 위한 공방을 만들었다.
"드루바의 공방 바로 옆이니. 서로 협업하는데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이곳이. 내 공방…."
바네사가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 러본다.
지금 나와 바네사는 새로이 지어 진 공방에 와있다. 그녀가 공방을 둘러보고,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 며 그 모습을 바라본다.
공방의 상태는 썩 훌륭했다.
크고 견고하게 지어진 창고 형태 의 건물. 작업대는 널따랬고, 선반 에는 온갖 희귀자원과 금속들이 꽉 꽉 차있다. 더해 여러 고품질의 실험기구과 공구들까지.
이 정도의 설비라면. 그녀가 연구 작업을 하는데 그리 큰 차질은 없으리라.
나는 이어 말한다.
"혹시나 조수가 필요하면 영주대 리 랑스에게 말하고. 잘 처리해줄 거다."
"… 생각보다 괜찮은 대우이네요."
보아하니 제법 만족해하는 것 같다.
한참 동안 공방을 둘러보던 바네 사. 그녀가 문득 내게 물어왔다.
"한지훈 씨. 어째서 제게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해주시는 건가요?"
어째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걸까.
나는 그녀를 지그시 주시하고, 그녀는 이어 말했다.
"이건 과한 대우 같아요."
"과하다니. 어떤 면에서?"
"막 들어왔을 때는 잘 몰랐지만. 여기, 이 선반에 쌓여있는 공구와 재료광물들."
그녀가 선반에 다가가더니, 올려 져있는 공구와 재료들을 만지며 말했다.
"이 공구는 드워프제 같고. 옆에 마나석은… 상급 흑마법사였던 저 도 몇 번 본적 없던 최상품이에요. 그리고 이 광물은 아마도…."
"미스릴이야.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건 아다만티움, 그리고 그 옆에는 오리…."
"그러니까!"
그녀가 다시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이하나하나가 막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귀물인데요?! 이것들을 제게 그냥 다 퍼준다고요? 연구나 하라고요?!"
"그래."
"이해가 안 가네요. 저를 뭘 믿고요? 이 물건들을 몰래 처분해 뒷 돈을 챙기기라도 한다면 어떡해 요?"
나는 피식 웃었다.
애초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것 이었다면 저런 말조차 하지 않았을 터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바네사. 나는 너를 신뢰한다."
"신뢰라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저를요? 게다가 저는 한때 흑마법사였어요. 인류의 적이었다고 요. 제 뭐를 신뢰하는 건가요?"
"네 증오."
나는 천천히 걸어가, 테이블 위에 놔두었던 회색 수정구를 쥐어들었다. 그녀가 제작했던 대 흑마나 아티팩트. 신호교란기였다.
그것을 매만지며 이어 말한다.
"바네사. 나는 네가 가진 증오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뜻 보기에 이지적인 외모를 가 진 바네사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그녀가 가진 크라함에 대한 증오는 상상을 초월했다.
'게임 속에서도. 끝까지 회유되지 않았던 인재였지.'
과거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 속에서. 나는 그녀를 회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량의 재물을 내놓았고, 권력과 명예를 약속했다. 공작이나 후작에 응하는 작위 또한 제안했다.
그만큼 그녀가 흑마법사 진영에 치명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막대한 재화를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회 유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회유되지 않았다.
평생 동안 복수를 꿈꾸고, 온갖 아티팩트를 만들어 연합을 지원하 던 인재다. 고작 재물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저 연구할 자금과, 연구를 진행할 장비만 있다면 더 이상 바라 지 않는 이. 오직 복수만을 위해 사는 존재.
그것이 바로 마녀 바네사다.
믿고 지원할 만하지 않은가.
나는 씩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바네사. 사실 이것들은 내가 지닌 재산에 비해서 티끌에 불과해."
"뭐라고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정말이야."
당장 내 영지에 있는 드워프가 이천. 더해 영지에는 희귀광물을 채 굴할 수 있는 광산이 있으며. 그 산출량 또한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게다가 제국군에게 납품하는 대량 의 병장기로 인한 막대한 수익과 제국 황실의 전폭적인 재정원조까 지.
내게 썩어 넘치는 것이 바로 돈 이었다.
그리고 나는 돈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아는 인간.
"바네사.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 든지 말해. 돈, 재료, 공구, 인력, 부지. 그 뭐든지 한도 없이 지원해 주마."
바네사를 무제한 지원한다.
그녀를 지원한다면 흑마법사에 대항할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추후 있을 대전쟁에서 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다.
아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녀가 문득 물어왔다.
"한지훈 씨. 당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뭐죠?"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라.
"흑마법사를 무찌르고 싶다. 그건 이해가 가요. 하지만 지금 한지훈 씨를 보니, 흑마법사의 세력을 모조리 쳐부수고 난 뒤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평소 내 모습을 보고 무언가 생각한 것이 있는 건지. 그녀는 내 목표가 흑마법사의 멸절이 아닌, 그이후의 것이라 여기고 있다.
정답이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바네사. 혹시 세계검이라고, 들어는 봤나?"
- 카렌이 멸망했고, 라피엘이 죽었다.
통신채널이 연결되었다. 연결된 채널의 수는 도합 세 개. 모두 협 상동맹 국가들의 군주들이었다.
그들 협상동맹의 군주들이 논의 한다.
-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카 렌이 멸망한 이상, 제국 놈들은 북부군을 다른 방면으로 돌릴 수 있을 터.
입을 열고 있는 것은 람셀의 군 주 마그니우트 3세였다. 대규모 보병군단을 운용하는 국가의 수장.
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 북부군이 카렌을 완전히 정복 했으니 . 다른 방면이 위태로워졌다. 놈들 제국 북부군이 타 방면으로 향한다면, 그쪽은 끝장이다.
그의 말대로. 지금 협상동맹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제국은 기어코 카렌을 멸망시켰고, 그에 제국을 압박하던 하나의 전선이 사라진 상황.
제국군은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하나의 야전군. 북부군을 남기게 되었다.
무려 20만에 달하는 대군이다. 그들이 다른 방면, 예컨대 동부의 람셀이나 서부의 트웨인 전선으로 향한다면. 그쪽 방면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협상동맹에게 몹시 위험한 상황 이었다.
- 지금 각 전선에서는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단 말이다! 만약 북부군이 타 전선으로 향한다면, 순식간에 밀려버리고 만다.
지금 전선은 팽팽한 접전 중.
퇴각에 퇴각을 거듭하던 제국군 이어느새 전열을 재정비. 반격에 나섰다. 그에 지금 전쟁은 밀고 밀 리는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고 있다.
과연 제국은 제국이라는 것인가. 그들의 국력은 거대했고, 군대는 강력했다.
무려 네 개의 전선이 펼쳐졌음에 도. 제국은 각 방면의 야전군들이 분투해 제국 본토 깊숙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동맹이 한 뼘의 땅을 빼앗으면, 다음날 그 한 뼘의 땅을 탈환하기 위해 제국군이 밀려왔다.
제국이 한 뼘의 땅을 빼앗으면, 다음날 그 한 뼘의 땅을 되찾기 위해 동맹이 몰려갔다.
영토를 뺏고 빼앗는 싸움의 연속. 협상동맹의 전쟁은 어느새 밀고 밀리는 백중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 북부 야전군 이 기동해 타 전선을 지원한다면?
단숨에 균형이 깨지게 될 것이다.
람셀의 군주는 그 균형의 파괴를 경계했다. 그렇기에 다른 동맹의 군 주들과 회의하려는 그였다.
그런 그의 말에, 누군가가 끼어 들었다.
- 확실히 심각한 상황입니다.
끼어든 이는 다름 아닌 코르자카 공화국의 대의원, 알비덴이었다.
막강한 해군력으로 제국 남부를 압박하고 있는 이. 그의 말이 이어진다.
- 제국 북부군 20만의 병력이 남게 되었으니 . 그들이 기동해 타 전선을 지원한다면… 그대로 균형 이 붕괴되어 우리 동맹측이 밀리게 되겠지요.
- 그러하다. 무슨 수가 없는가?
- 으음….
알비덴은 신음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뾰족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카렌이 멸망하고, 전력의 균형이 깨져버린 이상황. 어찌 해쳐나가야 할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알비덴이 입을 열었다.
- 외세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떠 합니까?
- 외세의 도움이라면?
- 예컨대….
잠시 말꼬리를 흐린 알비덴.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카렌이나 요한바르첸처럼, 흑마법사와 협조한다던지. 혹은 연방 과 손을….
- 외세와의 협력은 절대 안된 다!
그런 그의 말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음성.
- 흑마법사라니. 제국과 카렌의 전쟁에 엘프들이 참전했던 것을 잊 었는가.
이번에 입을 연 것은 트웨인 왕국의 국왕. 초원의 주인이라 불리는 사내, 누르비테 한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한다.
- 흑마법사를 개입한다면 필시 그들을 증오하는 엘프들 또한 전쟁에 개입할 터. 흑마법사와 손잡는 것은 결코 피해야 한다.
- …그렇다면. 연방과의 합동전 선은?
- 그것 또한 피해야 하는 일. 대륙 하나를 전부 차지할 정도로 탐 욕스러운 국가가 바로 연방이다. 그 들이 개입한다면, 설사 승전했다 한 들 우리 동맹이 가질 이득은 극히 줄어들게 되겠지.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 협상동맹만으로 제국을 이겨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 무모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 너희 코르자카는 불가능하겠지. 우리 트웨인의 전사들이라면 가능하다.
- 그만! 둘 다 평정을 찾으시오.
상황을 중재하는 람셀의 군주 마 그니우트 3세. 그가 한숨을 푹 내 쉬며 말한다.
- 제국 북부야전군 놈들은 카렌을 점령하고, 한동안 전후처리 작업 때문에 움직이지 못할 터. 아직 약간의 여유가 남아있다. 그동안 차차 생각해보면 되겠지.
- …알겠습니다. 마그니우트.
- 합당한 의견이군.
타 군주들은 그런 마그니우트의 말을 따른다. 그의 말이 타당하기도 했기 때문이었지만, 이중 람셀의 국력이 가장 큰 탓도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 제국 북부군이 기동하기 전. 각국은 대응책을 찾아보는 것으로 하지. 통신 종료. 동맹의 승리가 있기를.
협상동맹의 통신이 종료되었다.
북부군이 기동해 타 전선으로 향 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