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주, 죽여줘…."
적막한 집무실. 한 소년이 그리 중얼거리며 도장을 들어 올렸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도장을 내려찍는다.
콰앙!
분풀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커다란 소음을 내가며 도장을 내려찍는 소년.
그가 한탄하듯 중얼거 린다.
"일이 너무 많아…."
콰앙! 소년이 내리찍는 도장 소리가 다시금 집무실을 울린다.
소년의 이름은 랑스 라이젠. 한지훈의 양자이자, 이곳 루벤 영지를 대리통치하는 영주대 리였다.
그가 썩은 동태같은 눈으로 테이블 위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이러다 과로사 하겠어."
랑스의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그정도로 그가 처리해야 할 일 은 너무나도 많았다.
드워프들의 예산 요청, 영지의 발전현황, 이주민 수용계획, 상비군 의 증강, 광산의 개발과 도시확장계 획, 무역결제서류, 그리고 크고작은 자잘한 보고서들까지.
아무리 그를 도와주는 행정관들 이 있다 하나. 마지막으로 내용을 확인하고 결제하는 것은 그였다.
그 막대한 양의 일을 아직 채 성 년이 되지 않은, 이제 막 청년이 되어가는 그가 처리하는 것은 확실히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한지훈의 아래, 이 영지의 영주대리 자리가 아니라 면 갈 곳도 없는 것을.
랑스가 커다란 결재도장을 들어 올린다.
콰앙!
그가 그렇게, 마치 분풀이를 하듯 도장을 찍어대고 있을 때였다.
"영주대리님!"
벌컥! 집무실의 문을 열고 누군 가가 들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루 벤의 수석 행정관, 헨리 돌턴이었다.
그가 집무실 책상까지 걸어가 말 한다.
"영주대리님. 급히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만."
"…일이 더 추가되겠군요."
헨리의 말에 랑스는 울상 지었다. 그도 그럴게, 보통 그의 갑작스 러운 등장은 새로운 일감이 늘어나는 것을 뜻했으니 .
허나 이번에는 아닌 듯했다.
"아닙니다! 영주대리님, 영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영주님이?"
랑스는 눈을 크게 떳다.
나는 커다란 4두 마차를 타고 달렸다.
잘 닦인 넓은 대로를 따라, 제국 군 군단장 깃발을 펄럭이고, 흙먼지 를 일으키며. 마차가 달려간다.
마차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나의 영지 루벤. 구 요한바르첸 공국령 서부 끝단에 있는 변경마을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급속도로 발전 하고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나는 마차에 탄 채 내 영지의 발전한 모습을 멀리서 볼 수 있었다.
"… 이야. 잘도 이렇게 컸네."
마차의 차장 밖으로 루벤의 모습 이 보인다.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극도로 팽창한 루벤 마을의 모습.
아니, 저걸 어떻게 마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토록 멀리 있음 에도 자연히 그 규모에 감탄하게 되는데 .
이 정도면 최소한 도시라 불러야 할 정도다.
두두두두두.
내가 타고 있는 마차가 달려가고, 곧 도시의 정문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자,
"정지! 정지!"
"용건과 신분, 그리고 통행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병사들이 달려 나와 문을 가로막 는다. 나는 차장 밖으로 목을 내밀 어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내 영지군이었다.
그리고 그들 영지군의 모습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상태였다.
균율이 잡힌 듯 굳세 보이는 눈동자, 꼿꼿하게 펴진 허리, 질 좋은 경갑과 투구, 그리고 잘 벼려진 창 칼까지.
과거 허접쓰레기의 표본이라 볼 수 있는 그 가난한 영지군은 더 이상 없다.
이제 이자리에 있는 것은 제국 정규군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잘 단련된 군대 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보아하니 랑스와 마이사가 영지 관리를 잘 해내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내가 흡족한 시선으로 영지군을 바라보고 있자니,
"용건, 신분, 그리고 통행증을 제시해 달라 했습니다!"
병사들이 차장까지 다가와 그리 외친다. 그에 나는 싱긋 웃으며 단검을 보였다. 군단장 단검이었다.
그것을 본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이건…'?"
보아하니 내가 내민 단검의 정체 를 모르는 것 같다.
하긴. 일반 백인장 단검도, 천인장 단검도 아닌. 군단장 단검이다. 저런 일반 영지군이 볼 기회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군단장 단검이다."
"뭣…?! 그렇다면, 혹시 성함 이…."
"한지훈 라이젠. 처음 보겠지만 너희 영주다. 여기 귀족 증명서도 보여주지."
품속에서 작위 증명서까지 꺼내 보여주니, 병사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저, 정말 영주님이십니까?!"
"영주님! 영주님께서 돌아오셨 다!"
"병사들 당장 모여 사열해!"
병사들이 외치고, 곧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들의 수가 대략 수백 명 가량.
"각하! 저희가 영주성까지 호위 하겠습니다!"
"당장 길을 비켜라! 영주님의 행 차시다!"
"길을 비켜라!"
그들이 목청을 돋우며 호위하고, 대로를 거닐던 사람들을 치워버렸다. 그에 나는 허허 웃었다.
"이야. 의전 한번 제대로인데?"
도시를 확장한 만큼, 영지군의 병력과 수준 또한 끌어올렸던 것일 까. 내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제법 각이 잡혀있었다.
그렇게 나는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에 탑승한 채 천천히 도시 중앙으로 갔다. 가는 와중 차장 밖으로 도시 내부의 모습을 살펴본다.
역시나 흡족한 미소가 올라온다.
"정말, 제대로 발전했는데 ."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도시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빽빽이 들어차있는 수많은 건물 들. 크고 널찍하게 뻗은 대로. 주변을 거니는 대량의 인파.
이 광경을 보아하니, 대도시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중견도시 급 은 될 것도 같다.
그렇게 나는 마차를 타고 도시 중앙구획으로 갔고.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저기 영주성에서 헐레벌떡 달려 나오는 갈색머리의 소년. 아니, 그 세 성장했는지 소년인지 청년인지 모를 녀석.
"랑스."
녀석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물론 등장한 것은 랑스 혼자뿐만 이 아니었다.
"한지훈!"
두두두두두!
저기, 다른 방향에서 커다란 백색 전투마를 타고 달려오는 한 여인.
역시나 내가 없는 사이 성장한 것일까. 그녀 또한 어느새 소녀티를 벗고 기다란 황금색 머리카락을 기 르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마이."
마이사 슈베츠. 그녀 또한 내가 영지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 인지 마중 나오고 있다.
그들이 내 마차 앞에 도착하고, 나는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오랜만이다. 마이, 랑스. 그동안 잘 지냈냐?"
나는 내 영지에 돌아왔다.
* * *
"그동안 영지 관리하느라 수고했다."
나는 랑스와 마이사를 데리고 영주성으로 들어왔다. 새삼스러운 눈 으로 영주성을 살폈다.
영주성 또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것인지. 규모가 꽤 커져 있었다. 그리고 여러 화려한 장식과 내부시설들까지.
돈 꽤나 썼을 것 같다.
이전의 영주성도 없이 관사에서 기거할 때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
문득 랑스가 물었다.
"헌데 영주님, 어째서 곧장 도약 마법진으로 오시지 않고 마차로 오 셨습니까? 불편하셨을 텐데."
사실 영주성에는 비콘이 보란 듯이 설치되어 있다.
그렇기에 나는 단번에 영주성으로 올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내 영지 좀 둘러보고 싶어서."
멀리서부터 안까지, 영지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나 발전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자 했던 것이다.
단순히 서류상의 성장만으로는 피부에 잘 와닿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수고스럽게도 도 약마법으로 근처 제국군 군영으로 이동한 뒤, 군단장 마차를 빌려 타 이곳까지 왔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그래도 더 확실하게 영지 상황을 알게 됐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영지의 상태는 몹시 좋았다. 사람들의 얼굴 에는 보람과 행복이 그득했고, 거리는 제국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내 말에 랑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놀랐습니다. 갑자기 동 문에서 영주님께서 왔다고 하기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당황할 게 뭐 있다고."
"병사들은 영주님 얼굴도 모른단 말입니다. 거수자인 줄 알고 실례를 범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신분확인 잘만 하던데 뭘."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들에게 물었다.
"좋아. 그럼 이제 내게 알려줘. 내 영지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시의 겉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이미 끝냈다. 이제는 본격적인 보고 를 받아, 영지의 현황을 파악해야 할 때.
"먼저 랑스부터."
내 말에 랑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는, 품속에서 서류뭉치를 꺼내들며 말했다.
"영지의 발전은 순조롭습니다."
그가 서류뭉치를 펼쳐 하나하나 보여준다.
언젠가 내가 영지에 왔을 때 보고하기 위해 만들어둔 것일까. 꽤나 잘 정리되어있는 보고서였다.
그가 내게 보고해 온다.
"인구수는 30만에 달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피난민들을 받아들 여인구가 늘고 있습니다. 드워프들 이 끝없이 건물을 지어가고 있지만, 짓기가 무섭게 피난민들이 들어와요."
"허, 30만이라…."
30만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루벤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인구가 고작 1만을 넘니 마니 하고 있었는데 .
30만이라.
인구가 무지막지하게 늘었다. 그만큼 제국 북부의 피난민들이 많았다는 뜻이겠지.
랑스의 말이 이어진다.
"도시는 끝없이 확장 중이고, 광산 또한 계속해 발굴작업 중입니다.
드워프들의 공방과 조병창 또한 끝없이 확장하는 중이고…모든 것이 상승중입니다. 물류량, 인구수, 소득, 영향력. 그 모든 것이요."
"오……"
감탄해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훑어보니 정말 성장세가 심상치 않다. 아무리 제국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 한들, 그리고 드워프와 희귀자원 광산의 이점이 있다 한들. 이 정도 성장세는 나로서 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속으로 생각한다.
'역시. 랑스를 받아들인 건 잘한선택이었다.'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에서 뛰어난 행정관으로서 그 능력을 증명해 냈던 랑스였다. 과연 인재는 떡잎 부터 알아본다는 것인가. 녀석의 수완 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했다.
"피난민들은 주로 드워프의 공방 과 북부 광산, 그리고 농업에 종사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농지를 개척 해 대량의 작물을 재배하고 있지 요."
"일자리는 어때? 받아들이는 피 난민들에게 모두 일거리를 줄 수 있나?"
"네. 솔직히 말해, 일자리야 얼마 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요. 드워프 공방과 광산에서도 노동력은 있으 면 있을수록 좋다 하는 데다가, 인근 지역의 마물들은 모두 밀어버렸 으니 농지 확장 또한 수월하고…일 자리는 전혀 걱정 없습니다."
"정착한 피난민들의 상황은? 혹시 불만을 가질 만한 일이 있나?"
"전혀 없습니다. 단언할 수 있어 요. 오히려 현 생활에 몹시 만족하고 있습니다. 뭐, 꼼짝없이 삶의 터 전을 모두 잃어버려 집 없이 떠돌 이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집과 일자리를 주었으니 . 만족할 수밖에요."
치안과 일자리, 경제, 공업, 인구 증가와 식량. 그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인다.
역시 랑스는 일을 너무 잘한다.
앞으로도 잘 부려먹어야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려 얌전히 앉아있던 인물에게 물었다.
"다음은 너다. 마이."
마이사 슈베츠. 슈베츠 왕국의 후계자이자, 지금은 내 영지의 영지 군을 관리하는 이.
"영지군은 어떻게 되었지?"
그녀가 지금까지 이룬 성과를 들을 차례다.
그에 마이사는 잠시 고개를 끄덕 이고는, 내게 보고해 왔다.
"영지군을 확충에 확충을 거듭했다. 더해 훈련 또한 정기적으로 실시해 질과 양 모두를 늘렸다. 특히 나 질은 제국 정규군 수준, 혹은 그이상을 노리고 있지."
"음. 그럼 지금 영지군의 총원 수는?"
"도합 9천 명. 보병 천인대 여덟 개와 기병 열 개 연대를 편성했다. 지금은 인구유입에 맞추어 계속 증원하고 있지."
"9천의 영지군이라."
30만 명 인구수에서 딱 적정한 정도의 군사규모다.
현대였다면 인구수 대비 너무 많은 군사이지만, 이곳은 마물이 활보 하고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세상. 인구수 대비 3%의 군사가 가장 적정하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9천의 병사들을 운용해 인근지 역 마물을 모조리 소탕하고, 치안을 완벽하게 확립했다. 덕분에 이 근방 은 안정되어 있지."
"그 지휘는 네가 직접 했고?"
"당연한 소리를."
나는 시선을 돌려 마이사의 모습을 다시금 살폈다.
확실히 그녀는 그동안 내가 못 본사이 성장해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심적으로도.
육체적이야 키가 더 커지고 머리카락이 길었다. 이제는 앳된 소녀의 모습에서 탈피해, 점차 여인의 외양을 띄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이사는 육체적 성장보 다는 정신적 성장이 더욱 두드러지 고 있었으니 .
나는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눈빛이 더 깊어졌다.'
마이사 슈베츠. 과거 블랙 오케 스트라에서 내 앞길을 가로막던 대적자. 여인의 몸으로 거대한 연합군을 이끌던 대장군.
과연 그 마이사라는 것인가.
그녀의 존재감이,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가 더욱 진해져 있었다.
눈빛은 현기를 머금고 있었으며, 시선은 날카롭게 가다듬어졌다. 은 은한 카리스마가 주변을 압박했다. 별것 아닌 손동작 하나, 목소리의 울림 하나하나에 권위가 스며들어 있다.
아마 그녀는 9천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지휘해, 마물을 소탕하 며. 능력을 키워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전과 달리 보다 진한 카리스마를 지니게 되었겠지.
"그래. 잘 했다, 마이. 훌륭히 영지군을 성장시켰어."
즉 마이사는 이미 어엿한 지휘관 이었다.
물론 아직 군대와 군대와의 전투는 해본 적이 없기에, 어찌 보면 반푼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적절한 교육과 경험이 주어진다면 금세 훌륭한 지휘관으로 성장할 수 있을 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적당한 나이 가 되었지."
"내 나이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한지훈."
"마이. 수도에 갈 생각 없냐?"
"수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 마이사. 나는 그녀에게 씩 웃으며 말한다.
"제국 수도 사관학교에 가라."
"… 뭐?!"
마이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