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199화 (199/390)

199화.

"놈들이 몰려옵니다!"

데엥, 뎅, 데엥. 경종이 울렸다.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전투 를 준비한다.

하지만 모든 병사들이 전투태세 를 갖추는 것은 아니었다.

"… 맙소사."

개중에는 전투준비를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성벽 바깥을 바라보는 병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제국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거, 이길 수 있는 겁니까?"

성벽 바깥, 드넓게 펼쳐진 평원 위로 제국군의 군세가 몰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깃발을 휘날리고, 뿌연 흙먼지를 일렁이며 다가오는 제국 군 보병대.

저놈들의 수가 얼마나 될까.

5만? 10만? 어쩌면 20만을 넘을 지도 모른다.

드넓은 지평선을 뒤덮어버릴 듯 천천히, 허나 확실하게 밀고 들어오는 제국군.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 로 놈들의 각종 공성병기들이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병사들이 그 장엄하고도 압도적인 광경에 질려 차마 움직이지 못 하고 있다.

"… 제기랄."

카렌 수도군 사령관, 아지즈 조 브라니 후작이 나직이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그저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카렌 병사들.

그 한심한 꼬라지를 바로 앞에서 보았음에도, 아지즈 후작은 차마 그 들을 나무랄 수 없었다.

그 또한 밀려들어오는 제국군의 모습에 질린 것은 마찬가지였으므 로.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성벽을 사수하라는 엄명을 받았다.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움직여라! 이모자란 것들아! 독 전관! 자네들은 뭐하고 있나?!"

"당장 전투위치로 이동하라!"

"위대한 카렌을 수호하기 위한 전투다! 쫄지 말고 전투준비 해!"

"전투준비 한다!"

"카렌을 위하여 !"

독전관들이 검을 뽑아들고 병사들을 갈구기 시작했다. 그에 떨어지 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전투태세를 다지는 카렌의 병사들.

하지만 이자리에 있는 모든 카 렌의 병력은 알고 있었다. 이미 카 렌의 패망은 확정되었다는 것을. 승리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것을 말이다.

"후우."

아지즈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그리고 이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은 오늘 죽을 것이다.

부하의 목숨을 아끼는 상관이라 면 이런 승산 없는 전투에서 항복 할 것이다. 허나 아지즈 후작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 아지즈 사령관! 전쟁부 장관 딜라민 레바일데다. 위대하신 우리 의 왕, 라피엘 전하께서 자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셨다.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 성벽을 사수하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마라! 모든 병력이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성벽에서 물러 서지 않는 거다! 카렌의 기개를 보여라!

자신의 상관인 전쟁부 장관이, 그리고 군주인 카렌 국왕 라피엘이 마지막까지 성벽을 사수하는 것을 명령했기에.

사실 개죽음에 불과하다.

자신이 이자리에서 얼마나 노력 하던, 성벽의 함락과 수도 점령은 이미 확정된 일이었다. 그만큼 병력 의 격차가 압도적이었으니 .

냉정히 생각한다면 명령을 거절 하고 적에게 투항하거나, 혹은 도주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허나 아지즈는 도주하지도, 투항 하지도 않았다.

"전군! 전투준비!"

그의 마나어린 목소리가 넓게 퍼 져나간다.

으득. 아지즈는 이를 악물며 전 방을 노려봤다. 적의 군세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내 죽음을 바라신다면, 그렇게 하리다. 나의 주군이여.'

아지즈는 평생을 조국 카렌에 바 친 충신. 그는 마지막까지 충의를 지키려 한다.

그것이 천생 군관인 그가 여태껏 살아온 방법이었으니까.

카렌을 위하여 , 그리고 국왕 라 피엘을 위하여 . 마지막 목숨을 불사 지를 생각이다.

"카렌의 건아들이여! 마지막까지 싸워라!"

그가 검을 뽑아들며 그리 외쳤다. 그리고 발악하듯 오러를 뽑아냈다.

화르륵

타오르는 그의 검날. 푸른색 불길이 검신에 일렁인다.

평생 무를 수련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그답게, 발현된 오러광은 퍽 선명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마치 비웃기라 도 하는 듯.

쿠르르르르릉!!

창공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색은 붉은색. 화염을 상징하는 듯한 그 마법진이 점차 중첩되어가 며, 강렬한 기세를 사방천지에 흩뿌 린다.

너무나 강대한 기운을 일렁이는 마법진이었다.

아지즈가 발현한 오러광 따위, 순식간에 꺼트릴 수 있을것처럼 패 도적인 기세를 품은 마법진.

그의 오러광이 마치 태풍앞의 촛불처럼 미약하게 보인다.

아지즈는 저 붉은색 마법진을 발현하는 마법전투단을 하나 알고 있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그가 그리 읊조린 직후.

콰르르르르르릉!

무수히 많은 수의 붉은색 궤적 이, 창공을 가르며 쇄도해온다.

"장관이네."

나는 전방, 저 멀리 자리해 있는 거대한 성벽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붉은색 궤적들의 무리. 마치 불비가 떨어져 내리는 것 같다.

직후 일어나는 것은 커다란 폭발 의무더기.

콰콰콰콰콰쾅-!

붉은색 폭광이 퍼퍼퍽 터지고, 몇초 후 뒤늦게 폭음이 고막을 강 타한다. 진격하는 와중 일어났던 흙먼지가 훅 밀려 뒤로 날아간다.

충격파에 흔들리는 대지. 펄럭이는 깃발.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온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은 언제 봐 도 믿음직스럽다니까."

시선을 돌려 내 진영의 우측, 제피르를 비롯한 라브리에 전투마법 단이 자리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들이 푸른색 오러광을 일렁이 며 마법을 발현하고 있다.

폭렬폭풍 마법. 제피르와 휘하 전투마법사들이 포션을 물처럼 마 셔가며, 대량의 마나를 운용하고 있다. 놈들의 성벽에 무수한 폭발이 터져 나온다.

물론 저 성벽을 타격하는 것은 라브리에 전투마법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세르베야 전투마법단! 드라이퍼 스 전투마법단! 라브리에를 이어 광역마법을 발현합니다!"

"투석공격! 착탄 성공적입니다. 각도 조정을 하지 않고 계속 공격 하겠습니다."

다른 전투마법단들이, 그리고 미리 설치해뒀던 트레뷰셋들이 원거리 공성공격을 가하고 있다.

성벽에서 무수히 많은 수의 폭음 과 괴성이 터져 나온다. 바위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외벽을 두들기고, 균열을 만든다.

적에게도 전투마법사들이 있는 건지, 나름대로 방호마법을 운용해 저항하려 하지만 무용.

애당초 놈들의 주력 전투마법단 들은 옛적에 죄다 전멸해 버렸다.

저기 카렌 수도에 남아있는 전투 마법사들은 이미 퇴역한 예비역이 었거나, 혹은 아직 전투마법사로 써 먹기 힘든 햇병아리들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성벽은 걸레짝이 될 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에 도열해있는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제 1파. 급속 전진시켜."

"군단장 각하. 벌써 1파를 전진 시키란 말이십니까?"

"아직 성벽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좀 더 상황을 보시고 전진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참모들의 조언은 합당했다.

어차피 압도적인 우위를 지닌 전 장이다. 느긋하게 움직여도 상관없을 터. 성벽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 움직여도 적당히 괜찮은 전공을 세울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적당한 수준의 전공 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아니. 지금 병력을 전진시키는 것이 제일이다."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에서 수많 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무수히 많은 대도시를 점령했던 나다.

저 성벽이 언제 부서지는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당장 1파를 전진시켜. 남문 쪽 다른 군단장들에게도 호응해 1파를 전진시키라 전파하고."

"… 알겠습니다. 군단장 각하."

참모들은 미심적은 눈을 하면서 도 내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물론 다른 군단장들의 말이었다 면 끝까지 뜯어 말렸겠지만. 그 데 이비드 북부사령관까지 도상연습에서 이긴 나이니. 일단은 따라주는 것 같다.

씩 웃었다.

"공성전은 타이밍이 생명이지."

모든 전장이 다 그렇지만. 특히 나 전략단위의 전투에서는 타이밍 이 생명이었다.

놈들이 가장 당황하고 통솔이 깨 질 시기, 그때를 노려 병력을 투입한다면 최대한의 성과를 낼 수 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미니맵을 살 피며, 계속해 지시한다.

"제 2파. 속도 올려. 일정 간격을 두고 1파의 뒤를 따른다."

"명령을 따릅니다."

제파식 전술을 운용한다. 가진 병력이 최대한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투입시기를 조율한다.

쉬운 일이다. 이까짓 거 게임에서 주구장창 해왔던 것이니.

"3파 급속전진. 그리고 엘프 전사들도 출격시켜."

"명령을 따릅니다!"

병력이 대열을 이루며 전진한다. 전장을 바라보니 오스카를 비롯한 다른 군단장들도 일단은 나를 믿는 것일까. 내 전진에 호응해 병력을 밀어 넣고 있다.

그렇게 병력들이 얼마나 성벽에 접근했을까.

"각하! 제 1파가 적의 활공격 사정권 안입니다! 이쯤에서 병력을 멈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 마법사들이 아군 공격대에 응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멈춰야 합니다!"

1파의 병력이 충분히 접근한 건 지, 적의 화살과 마법공격이 시작되었다.

놈들이 활을 마구잡이로 쏘아대고, 공격마법을 갈겨대며 저항하고 있다. 제국군 병사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져간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는다.

"전진속도 늦추고, 계속 접근해. 멈추진 마라."

"각하! 어째서…!"

"이제 보면 알 거다."

내가 그리 말한 직후.

쿠르르르르르….

성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흙먼지가 후욱 일어나고, 굉음이 울렸다. 드높이 솟아있던 성 벽이 하나둘 부서져 야트막한 언덕 으로 화해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딱 맞췄네."

공성전에서, 방어군이 가장 당황 해 통솔이 깨질 시기가 언제일까.

그건 바로 성벽이 무너질 때다.

방금 전 성벽이 무너지며 저곳은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었다. 이제 놈 들은 잠시 동안 제정신을 못 차릴 터.

헌데 바로 그때, 우리가 곧장 밀 어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놈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간단하게 쓸려나갈 것이다.

"놈들이 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무너진 성벽 잔해를 타고 넘어 진 입한다. 모든 제파, 전속 돌진하라."

"… 맙소사."

참모들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본다.

"군단장 각하."

그들 중 내 가장 가까이에서 있던 이, 부군단장 베르너 알크미르가 나직이 물었다.

"설마 저 성벽이 무너질 때를 예상하고 병력을 미리 전진시킨 것입 니까? 적이 혼란에 빠질 때보다 쉽 게 놈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나는 베르너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씩 웃으며 지시할 뿐.

"자, 이제 우리도 전진하지. 참모 부, 내 뒤를 따라라. 현장에서 지휘 하겠다."

나는 전투마의 배를 박찼다.

무너진 성벽 잔해를 넘어, 제국군의 병력이 도시 내부로 진입한다.

"쿨럭! 쿨럭!"

아지즈는 기침을 하며 성벽 잔해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뿌연 시야.

성벽이 무너지며 일어난 흙먼지 가 온통 주변을 가리고 있다.

그는 충격의 여파로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검을 휘둘렀다.

콰앙!

푸른색 궤적이 그어지고, 주변의 흙먼지가 날아가 약간의 시야가 확보된다.

아지즈는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들고는, 크게 소리쳤다.

"남문 방어대장! 당장 병력을 수 습하라!"

"남문 방어대장! 응답하라! 이, 빌어 처먹을!"

그는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성벽이 무너졌다. 그 여파로 지휘체계와 방어태세가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당장 병력을 수습해, 진형을 정비해야 한다.

그에 그는 수정구를 붙잡고 이어지시했다.

"방어군 전 병력에게 알린다! 최대한 신속하게, 지휘체계를 다잡는 다! 병력을 수습해 성벽 잔해 위에 진형을 꾸려!"

비록 성벽이 무너져 내리긴 했지 만. 성벽이 무너져 생긴 야트막한 언덕 또한 나름의 방어구조물이 될 수 있다.

그에 기민하게 병력을 재정비해 최대한 제국 놈들을 지연시켜보고 자 하는 아지즈였다.

허나 그는 병력을 재정비 할 수 없었다.

"쿨럭! 쿨럭!… 사령관 각하!"

부스럭.

충격에 비틀거리던 병사들이 하나둘 일어서며, 다급히 알려왔다.

"쿨럭!… 적이, 적이 언덕을 타고 올라옵니다!"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지즈는 놀란 눈으로 잔해 밖, 언덕의 경사를 바라본다. 그러자 보였다.

깃발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제국 군 병사들.

아지즈가 경악한다.

"어떻게 이토록 빨리! 병력을 투 입한 거냐!"

성벽이 무너진 여파로 지휘체계 와 통솔이 무너졌지만. 남아있는 병력을 수습할 시간은 남아있으리라 여겼다.

허나 아니었다.

성벽이 무너진 직후. 마치 노린 듯이 제국군 병사들이 등장해오다 니.

그는 직감했다.

'성벽이 무너질 때에 맞춰, 미리 병력을 전진시켰던 것인가!'

적 지휘관은 영악했다.

성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리지 않 고 오히려 그때를 노려 병력을 투 입했다. 때문에 아지즈는 성벽 방어 군을 수습하지 못한 채 적 병력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보다시피.

"저놈들은 아직 제정신을 못 차 리고 있다. 서둘러 죽여버려!"

"진형을 재정비 할 틈을 주지 마 라!"

"카렌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버려 라!"

제국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든다.

콰직, 서걱. 퍼억!

"커헉…!"

그들이 아직 충격에 제 몸도 못 가누는 카렌 병사들을, 손쉽게 죽여 간다.

까드득. 아지즈는 이를 갈았다.

"개같은, 제국 놈들!"

화르르륵!

그가 오러를 운용해 기세를 돋웠다.

카렌의 병사들을 죽여가고 있는 제국의 병사들. 놈들은 그 수가 몹시나 많았으나, 그래봤자 오러를 다 루지 못하는 일반 병사들이었다.

오러를 운용할 수 있는 아지즈가 분투한다면, 적어도 조금의 시간이 라도 벌 수 있으리라.

아지즈는 그리 생각했다. 어떤 이들을 보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 무슨."

그는 멍한 눈으로 어떤 인영들을 바라봤다.

맹세컨대, 그의 짧지 않은 인생 동안 난생 처음 보는 외양이었다.

남녀 할 것 없이 길게 기른 머리카락, 경외심마저 들 정도로 미형으로 이루어져있는 이목구비, 눈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뾰족하게 솟아있는 양 귀 까지.

"어째서, 엘프가 이곳에…."

처음 봤지만. 워낙 유명한 아인 종이기에 단번에 그들의 정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엘프. 중앙 대륙에 기거하며 오직 세계수와 엘프의 숲을 수호하는 종족.

그들이 어째서, 이곳에, 그것도 제국군과 함께 카렌의 병사들을 죽 여가고 있단 말인가.

"흐음."

문득 지척에서 콧소리가 들린다. 아지즈는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왔던 방향을 바라본다.

어느새 접근해왔던 것일까.

"복장을 보아하니. 네놈이 이곳의 지휘관인 인간이군."

기다란 장검을 쥐어 든, 붉은색 머리칼을 지닌 엘프 여성 하나가 그의 바로 옆에서 있다.

그녀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일단 죽인다."

번쩍이는 검날의 궤적. 서걱, 하고 들려오는 절삭음.

붉은색 핏물이 치솟고, 그의 잘 린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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