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적이 몰려옵니다. 전하!"
카렌의 전쟁부 장관, 딜라민 레 바일데 공작은 그리 외쳤다.
"제국 놈들이 수도 외곽지역까지 벌써 도달했단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그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카렌의상황은 결코 희망차지 않았으므 로.
흑마법사들에게 마음대로 휘둘리는 카렌 왕실. 무너져버린 군권. 중 발한 침공군.
아직 크라함이 이끄는 사령병사 들이 남아있었으나. 그들은 현재 제국의 정체모를 아티팩트에 의해 무력화되고 있는 상황.
"… 어찌."
라피엘 데이고르 카렌. 카렌 왕국의 주인. 이 왕국의 군주.
그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 돌려 옥좌를 바라봤다.
평소였다면 자신이 앉아있었을 옥좌. 허나 지금 그곳에 앉아있는 것은 라피엘 자신이 아니었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이요! 크라 함!"
옥좌 위에는 크라함이 앉아있었다.
로브의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음험한 기운을 전신에 휘감은 그가. 옥좌 위에 앉아 우묵한 시선으로 라피엘을 주시하고 있다.
붉은색 안광이 소름끼친다.
"큭..!"
순간 라피엘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크라함에게 목소리를 높이다니. 미친 짓이었다. 그만큼 그는 불길하 고도 위험한 인간이었으니 .
허나 지금 자신의 왕국이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 두려움에 입을 닫을 수는 없다.
라피엘은 말을 멈추지 않고 이어 따졌다.
"크라함! 당신에게 협력하기만 한다면, 제국 놈들을 쉬이 몰아낼 수 있다 장담하지 않았소?!"
라피엘은 크라함에게 협력했다.
도시를 바쳤고, 막대한 재화를 건넸다. 수많은 인명을 키메라와 사령병사들의 재료로 헌납했다.
모든 것은 제국에게 승리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계속해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흑마법사. 강력한 이들이다.
시체를 일으켜 만드는 병력의 수는 방대했다. 수많은 인명을 바쳐 운용하는 흑마법은 패도적이었다.
때문에 라피엘은 불안해하는 한편 안심했었다.
그들 크라함이 이끄는 볼라바아에 협력한다면, 쳐들어오는 제국 놈 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권력을 계속해 유지할 수 있으리라. 그리 여겼 던 것이다.
헌데 그렇지 못했다.
"제국 놈들이 지금 저기! 수도 바로 코앞까지 밀어닥쳤소! 그대의 그 잘난 사령병사들은 아무것도 못 하고 말이오!"
제국은 강했다. 라피엘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욱.
그들은 이미 카렌의 모든 침공군을 전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령병 사들을 손쉽게 무력화 시키며. 이곳 카렌 수도 페르트로폴을 향해 진격 해오고 있다.
지금 쳐들어 오는 놈들의 병력이 무려 13개 군단.
반면 카렌 전역에 남아있는 모든 통제 가능한 병력을 모아도, 그들의 반수조차 되지 않으니 .
말 그대로 멸망을 목전에 둔 상황.
그에 라피엘의 얼굴에 불길함의 감정이 더욱 진하게 일렁인다.
그때였다.
"제국군이 몰려온다라."
마침내 크라함이 입을 열었다.
저벅. 천천히 옥좌 위에서 일어선 크라함. 그가 붉은색 안광을 빛내며 읊조린?
"카렌의 가치가 다 되었군."
"… 그게 무슨 소리요. 크라함."
뒤이어 흘러나온 건조한 목소리. 그에 라피엘은 더욱 진한 불길함을 느꼈다.
카렌의 가치가 다 되었다니. 그 게 무슨 소리인가?
크라함이 이어 말한다.
"우리는 철수하겠다."
"철수라니! 그게 무슨!"
그리고 기겁하는 라피엘.
이미 카렌의 거의 모든 병력은 증발해버렸다.
침공군이 전멸했고, 기사단 또한 대부분이 반파 혹은 전멸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전투마법사들 또한 그 씨가 말랐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흑마법사들마저 철수해버린다면 결코 막을 수 없다.
"당신이 제국 놈들을 몰아내겠다 고 약조했었지 않소!"
때문에 라피엘은 그가 떠나는 것을 막고자 한다.
"약속을 어길 셈이요, 크라함!"
거의 윽박지르듯 도움을 구걸하는 라피엘.
하지만 크라함의 반응은 냉소적 이었다.
"흑마법사의 약속을 믿었다니. 멍청하군."
"그게 무슨…!"
"이미 우리 볼라바아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
크라함은 피식 웃으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빛마저 반사하지 못할 정도로 진 한 검은색을 가진, 작은 단검이었다.
"이미 많은 지성체들을 갈아 넣어 새로운 세계검 또한 만들었다. 키메라도 늘렸으며, 재능 있는 흑마법사 후보생들도 많이 포집했지."
"… 그 말은."
"더 이상 너희 카렌을 도와서 얻을 것이 없다는 소리다. 라피엘."
저벅, 저벅.
라피엘은 얼어붙어 우두커니 섰다. 크라함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 가며 말한다.
"카렌과 함께 죽어라. 라피엘. 네 이용가치는 이제 끝났다… 아니. 아직 하나가 남아있군."
질척한 미소를 짓는 크라함.
그가 라피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어 명령했다.
"반드시 한지훈의 손에 죽어라. 그래야만 놈의 그릇이 더 성장할 수 있을 터이니."
"그게 무슨."
소리이지. 라고 대답하려 한 라 피엘은 이어 말할 수 없었다. 크라 함의 모습이 갑작스레, 검은색 기운에 휘감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방금 전 크라함은 장거리 도약 마법으로 이자리를 이탈한 것이다.
"맙소사."
철푸덕.
라피엘은 한탄하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의 눈동자에 절망의 감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드리워진다.
카렌의 멸망이 곧이다.
* * *
우리는 일주일 동안 계속해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다. 수많은 도시 를 불태우고, 산과 들을 밀어버렸다. 사령병사들을 해치워가며 진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가 카렌 놈들의 수도. 페르 트로폴입니다."
부단장의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대지를 뒤덮은 무수한 인영 너머, 저지평선 끝자락. 커다란 도시가 보인다.
카렌 수도 페르트로폴.
"인구 백오십만이 살고 있던 대도시였죠."
과연 커다란 도시였다.
성벽은 드높았다. 성문은 커다랬으며, 대로는 이곳저곳으로 뻗어나 가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 규모가 퍽이나 대단한 거대 도시.
나는 시선을 돌려 부단장 베르너 에게 되물었다.
"살고 '있던'이라. 지금 인구는 몇 명이지?"
"정확히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저곳에서 흑마법사 들이 대규모 혹마법을 발현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의 발현. 그 종류가 저주인지, 사령인지, 파괴인지. 혹은 단순히 흑마나를 축적하기 위함인지 정확히 파악되진 않았지만.
무수히 많은 수가 희생되었을 것 이다.
저 대도시의 인구는 많이 줄어들 어 있을 것이다.
"제국 국방성에서는 대략 절반인 팔십만이 생존해 있을 것이라 예상 하고 있습니다."
"팔십만이라… 관측된 흑마법이 그 정도로 대규모였나 보지?"
"그렇습니다. 군단장 각하."
"그렇다면 계획을 제대로 세워봐야 하겠는데 ."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일단 페르트로폴에서 대규모 혹 마법이 발동된 것은 확인했다.
과연 놈들은 어떤 마법을 발현했 을까.
놈들이 어떤 마법을 운용해 인명을 소모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만, 보다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놈들이 저주마법을 발현했다면. 놈들의 저주가 활성화되기 전에 바로 달려들어 밀어버리는 것이 유리하다.
파괴 계열 마법을 준비했다면 병력을 분산시켜 치는 것이 보다 수 월하게 전투를 진행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반대로 사령마법을 발현했다면 병력을 한 군데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놈들이 무슨 마법을 발현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 한다. 그렇기에 쉽사리 대응할 수 없는 상황.
허나 괜찮다. 내게는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으니까.
- 한지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붙어있는 요정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이 나에게 알린다.
- 니디아 님께서 정보를 주신대. 통신을 연결할게.
"그래."
과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하더니.
곧 내 수정구가 녹색으로 빛나고, 통신이 연결되었다.
- 한지훈 씨. 오랜만이에요.
나는 피식 웃었다.
고작해야 일주일 못 봤는데 오랜만이라니.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지금쯤이면 한지훈 씨도 페르 트로폴에서 어떤 흑마법이 발동되 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맞죠?
"맞아. 그걸 알려주려 연락해온 건가?"
- 네. 저희 엘프는 페르트로폴에서 무슨 흑마법이 발동되었는지. 알 고 있어요.
역시 정보력 하면 엘프라는 것인 가. 그녀들은 이미 저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거두절미하고 먼저 말씀드릴게 요. 흑마법사들이 발현한 마법은 저 주도, 사령도, 파괴도, 심지어 단순히 혹마나를 추출하는 것도 아니었 어요.
예상했던 그 모든 흑마법들이 발동되지 않았다니.
그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니디아. 그게 무슨 소리지? 저 주, 사령, 파괴, 하다못해 혹마나 추출도 아니라면 도대체 저놈들은 무슨 마법을 발현했다는 거야?"
- 아직 하나 남아있어요. 한지훈씨.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는 니디 아. 그녀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녹색 광휘와 함께 수정구에서 흘러나 온다.
- 아마도. 흑마법사들은 새로운 세계검을 만든 듯해요.
"…세계검이라니."
내 미간이 더더욱 찌푸려진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 아마 한스가 들고 있던 세계검 이 소멸했기에. 새로운 세계검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염병."
그 말인 즉, 자칫 이번에도 한스 를 상대했을 때처럼 힘든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허나 그런 내 걱정은 기우인 듯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세계검 은, 그리고 크라함과 흑마법사들은 페르트로폴에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놈들이 페르트로폴에 없다는 것. 분명 희소식이다.
헌데 어째서 없는 것인가. 그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 크라함은 휘하 흑마법사 모두를 이끌고 카렌에서 철수했어요. 원 하는 모든 것을 얻었으니 . 더 이상 가치가 없다 여긴 것이겠지요.
"… 그런가."
- 그리고. 세계검을 만들었다 한 들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 없으니 까요. 그렇다고 본인이 사용하는 것은 너무 위험부담이 크고… 일단 세계검만 제작한 뒤, 새로운 대적자 가 등장할 때까지 세력을 최대한 온존하려 하겠죠.
세계검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운명을 지녀 격의 상승을 이 룬 이들 뿐이다.
대적자의 운명을 타고난 한스, 모든 지성체들 중 가장 드높은 격을 지닌 엘리스, 혹은 주인공의 운명을 타고난 나 같은 인물 말이다.
크라함 또한 세계검을 사용할 자격이 있지만, 녀석은 저래 봬도 음 흉한 겁쟁이다. 본인이 스스로 내 앞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카렌에는 흑마법사 놈들이 아예 없다는 건가?"
- 네. 맞아요.
"그렇다면 낙승인데."
이미 카렌은 대부분의 병력이 증 발했다는 사실. 모든 제국군이 알고 있다.
저 수도를 지키는 병력의 수가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두 개 군단. 많아봐야 다섯 개 군단을 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우리 제국군은 무려 13개 군단이 이곳에 집결해있다. 더해 놈 들은 사기마저 밑바닥.
아주 손쉽게 승리할 수 있다.
- 한지훈 씨.
내가 도시 방향을 바라보고 있자, 니디아가 입을 열었다.
- 흑마법사가 없는 것을 확인했고, 병력이 압도적 우위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곧 공격하려 하시 겠죠. 맞죠?
"맞아. 우리 북부군은 전열을 정비한 뒤 바로 놈들의 수도를 칠거다."
쉬운 일이다.
공성장비를 준비하고, 제파식 전 술을 운용해 파도처럼 몰아친다면. 순식간에 놈들의 성벽을 함락시키 고 도시 내부로 군단을 밀어 넣을 수 있다.
저 도시 중심지에 자리해있는 왕궁까지 도달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대충 반나절 정도면 가능하지 않 을까.
내가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고 있자. 문득 그녀가 말했다.
- 한지훈 씨. 저희 엘프 전사들 도전투에 참여시켜 주세요.
"… 뭐?"
그에 나는 재차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엘프. 내 든든한 동맹이자, 같이 흑마법사의 세력을 적대하는 동료다. 나는 그동안 니디아를 비롯한 여러 엘븐 가디언들과 함께 여러 전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곧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너희 엘프들이 흑마법사를 적대 할 거라는 걸다른 국가에게 알릴 생각이군."
- 맞아요.
그녀가 시원스레 긍정했다.
그동안 엘프들은 흑마법사를 적 대하는데 여러 조력을 해오긴 했 지만, 소극적인 것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엘븐 가디언과 요정들을 내게 붙여주고, 약간의 편의와 정보를 공유했을 뿐.
엘프라는 종족 전체차원의 움직임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니디아는 보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고자 한다.
흑마법사와 손잡은 카렌을 제압 하기 위해, 그리고 타국에 엘프가 흑마법사와 협력하는 국가는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내 기 위해.
- 엘프 전사 삼천을 파견할 거예 요. 지휘관으로는 타냐를 보낼 거고 요.
그녀는 엘프 전사들까지 동원했다. 그 수가 무려 삼천.
고작 삼천이지만, 사실 절대적 은 수가 아니었다.
잘 훈련된 엘프 전사는 기사 이상의 무력을 발휘하니. 기실 전투기 사단 세 개를 보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 그리고 최고 지휘권한은 한지훈 씨에게 맡길게요. 그전장은 본 디 제국과 카렌의 것. 저희 엘프들은 그저 난입한 지원군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을 내가 지휘하게 되었다.
그 말인 즉 엘프 전사 삼천 명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다.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개이득이네."
예상 소요시간을 바꿔야겠다.
카렌의 왕궁을 무너뜨리는 것. 반나절이 아니라 세 시간이면 가능 할 터이니.
이번 전투는 몹시 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