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
흘깃 시선을 돌려 한스를 바라봤다.
녀석은 완전히 힘이 빠진 것인 지, 무력화된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접근만 한다면 손쉽게 죽일 수 있다.
다시 시선을 돌려 니디아를 바라 본다.
"한스를 죽이지 말라니. 진담인 가?"
"…네. 한스를 죽여서는 안돼요."
"거 참. 재미있는 농담이야."
사실 전혀 재미없다.
쯧 혀를 찼다.
"비켜. 니디아."
"안 돼요."
"니디아. 어째서 놈을 살리려 하는거지?"
한스는 내 대적자.
놈은 이미 여러번 죽었고, 그때 마다 되살아나 나를 막아섰다.
나의, 그리고 엘프의 적. 흑마법사 크라함의 하수인.
놈을 처치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엘프는 놈을 살리려 하고 있는 상황.
내 의문에 니디아가 대답했다.
"여왕님의 명령이에요."
니디아가 한스를 살리려는 이유 를 말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여왕님께서 말씀하셨어요. 한스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그자를 죽 인다면 시나리오가 더욱 힘들어 질 것이라고 말이에요."
시나리오가 더 힘들어진다라.
니디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눈이 마주쳤다.
"한지훈 씨. 아니, 이름 없는 별."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경계심이 어렸다.
"한스는 당신도 알다시피, 주인공 인 당신을 대적하는 운명을 타고났 어요."
"그렇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시스템은 놈에게 대적자의 운명을 부여했다. 그에 따라 시스템은 놈이 죽을 때마다 살려냈고, 나를 상대하기 위해 강화시켰다.
"여왕께서 권능을 사용하실 때. 시나리오를 읽어 미래를 관측하셨 어요."
엘리스의 권능이라.
"미래를 읽었다는 건가?"
"네."
"그게 가능한 일이야?"
"세계수와 여왕님의 격이 있다면, 가능해요. 몹시 위험하지만요. 여왕님은 모든 지성체 중에서 최상의 격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더 이상 불가능하겠지만. 하고 니디아가 말끝을 흐렸다.
어째서일까. 그녀의 눈빛에는 슬픔의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혹시 엘프 여왕의 신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일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한스를 죽인다면 관리자의 개입이 심화될 거예요. 세력의 균형이 무너졌으니까, 그리고 기존 시나리오에서 훨씬 이탈되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시나리오에서 한스는 게임 의 최후반부까지 살아남았었다.
하지만 지금 놈을 죽인다면, 주요 인물이 훨씬 빠르게 죽는 것이 니. 기존 시나리오에서 더더욱 멀어 지게 된다.
결국 시스템의 개입이 심화될 것 이리라.
"그리고. 한스라는 인물 또한, 시스템에 이용당하는 피해자에 불과 해요."
니디아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한스에게로 향했다.
검은색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녀석. 이제는 의식마저 잃은 것인지 놈의 눈동자는 굳게 닫혀있었다.
"그의 운명이 시스템에 의해 대적자로 정해졌을 뿐. 본래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어요. 인류를 위해 당신에게 대적했던."
적어도 전의 시나리오에서는 그러했다.
한스는 인류를 수호하던 영웅. 연합의 남부사령관으로서 흑마법사 와 나를 대적했다.
지금은 상황이 뒤바뀌어 오히려 내가 인류를 수호하고, 녀석은 흑마법사와 협조해 공작을 벌이고 있지 만.
"여왕께서는 한스를 아군으로 만들려 하세요."
"허."
순간 나는 헛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어이없는 소리였기 에.
"놈을 아군으로 삼겠다고?"
"네."
"개소리야.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확신할 수 있다. 한스 요한바르 첸은 절대 내 아군이 될 수 없다.
나는 놈의 원수이니까. 그리고 대적자의 운명을 타고났으니까.
결코 손을 잡으려 하지 않을 것 이다. 그리 예상했다.
하지만 엘프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가능해요. 세계검이 있다면."
"그게 무슨 소리지?"
"세계검으로 한스에게 부여된 비틀린 운명을 절삭한다면."
세계검. 시스템의 개입마저 절삭 할 수 있는 아티팩트.
"그렇다면 이전 시나리오대로 그는 인류를 위해 흑마법사와 대적할 거예요. 결국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거죠."
그것이 있다면 한스의 운명, 대적자의 운명을 끊을 수 있을 것이 고. 아군이 될 것이리라. 그들은 그리 믿는 듯하다.
"그래… 세계검이 있다면 한스를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고…."
"네. 그러니 한스를 살려야 해요. 한지훈 씨."
솔직히 믿기 힘든 주장이지만.
그 누구도 아닌 엘프 여왕 엘리 스가 직접 미래를 보아 도출해낸 수다.
그녀들의 말을 따라 한스를 살리 고. 놈을 회유한다면.
보다 수월하게 시나리오를 진행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싫은데."
그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저놈을 살려주기 싫다고. 죽여버 릴 거다."
철그럭. 장검을 들어 올렸다.
놈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나를 가로막았던 이.
절대 살려두고 싶지 않다.
설사 놈을 살린다면 보다 유리하 게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다 한 들 말이다.
나는 놈을 죽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이런, 막아요! 타냐!"
니디아가 외치는 그때.
번쩍!
섬광이 번뜩였다. 날카로운 검날 이 공기를 가르며 이쪽으로 쇄도해 왔다.
나는 검신을 들어 올려 막아냈다.
쩌어엉!
쇠와 쇠가 격돌하는 소리. 눈동자를 굴려 상대를 바라보고, 쯧 혀 를 찼다.
"타냐."
"한지훈. 저자를 죽여서는 안된다."
검을 뿌리쳤다.
"너희 엘프들은 모두 다 돌아버렸군. 저 빌어처먹을 놈을 정말 아 군으로 삼을 거라고?"
타냐가 다시금 검격을 가해온다. 우상단에서 좌하단, 사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검날의 궤적.
몸을 비틀어 피해냈다.
"…여왕님의 뜻이다."
"어쩌라고? 내 여왕 아니야."
나는 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릉!
화려한 금색 궤적이 공기를 찢어 발기고, 굉음을 사방에 흩뿌렸다. 타냐의 검날이 단번에 부러진다.
"마게브!"
"마법을 발현하겠습니다. 물러나 십시오."
타냐가 외치며 물러서고, 마게브 가지팡이를 들어올린다.
번쩍!
시야를 그득 채운 섬광. 뒤이어 이쪽으로 쇄도해오는 푸른색 빛무 리들. 공격마법이다.
정면으로 맞는다면 기사 따위 순식간에 중발시킬 정도로 강한 힘을 품은 마법.
과연 마게브였다. 녀석은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캐스팅을 마쳤고, 그럴듯한 마법을 발현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나를 제압할 수 없다.
검을 위에서 아래로, 수직을 그리며 내려쳤다.
지면에 격돌하는 내 검날.
콰아아아앙!
광폭한 기운이 터져나와 주위 공기를 흔들었다. 금색 기운이 폭사되어 이쪽으로 들이닥치는 마법들을 단숨에 무력화했다.
지금의 나는 강하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돌진했다. 저기 나자빠져있는 한스를 죽 이기 위해.
하지만 방금 전 타냐와 마게브가 시간을 버는 동안 움직였던 것일까. 쓰러져 있는 놈의 옆에는 니디아가 있었다.
"한지훈 씨! 한스를 죽인다면, 새로운 대적자가 등장할 거예요!"
그녀가 정령을 불러들였다. 푸른색, 붉은색, 녹색으로 반짝이는 다수의 정령이 그녀의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니디아가 손을 뻗었다.
"그러니 한스를 죽여서는 안 돼 요! 한스보다도 훨씬 강하고, 영악 하며, 집요하고…!"
우우우웅….
그녀의 다섯 손가락 끝에 녹색 빛이 아른거린다.
니디아는 지금 자연력을 운용하고 있다.
"강대한 세력을 지닌 대적자가 등장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게 엘리스가 읽었던 미래였 나."
후욱. 숨을 내쉬며 달려간다. 니 디아와의, 그리고 한스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오른손은 장검을 쥐고, 왼손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새로운 대적자가 등장한다? 그래도 상관없어."
콰르르르륵!
니디아가 소환한 정령들이 여러 공격을 해왔다.
불덩어리가 산탄처럼 뿜어지고, 기다란 얼음송곳에 뺨을 스쳐지나 갔다. 지면에서 풀이 자라나 발을 묶으려 한다.
그 모든 것을들 피하고, 쳐내며. 앞으로 도약. 니디아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 어떤 적이 나온다 한들. 모조리 죽여버리면 되니까."
왼주먹을 내뻗었다.
퍼억!
그녀의 복부에 주먹이 박혀들어갔다.
"커헉…!"
그녀가 신음하며 바닥에 주저앉 았다. 나는 속으로 읊조렸?
' 약해.'
니디아. 타냐. 마게브.
셋 다 엘븐 가디언으로서 정상급 의무력을 지닌 이들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서 저 세 명의 저지 를 수월하게 돌파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엘리스의 권능으로 강화되었다 한들. 분명 이전에 보았 던 저들의 실력이라면 나를 능히 막아낼 수 있었을 터인데.
추측해 본다.
'약화된 건가.'
이전에 비해 훨씬 약해진 저들의 경지. 그렇게밖에 추측할 수 없다.
뭐,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일단은 한스를 죽여야 하니까.
나는 검을 역수로 쥐고, 나직이 읊조렸다.
"잘 가라."
지면에 쓰러져 있는 한스의 목에 검을 박아 넣는다.
콰직. 박혀 들어가는 검날. 녀석의몸이 충격에 덜컥인다.
검날을 비틀었다.
콰드드득.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 놈의 몸이 완전히 정지한다.
그러자 직후,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대적자 NPC를 처치했습니다.]
[업적 달성!]
['업적 : 대적자 NPC 처치(3)'를 달성했습니다! 포인트가 수여됩니
[수여 포인트 : 10pt]
그런데 떠오른 홀로그램은 하나 가 아니었다.
- 띠링!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쿨럭! 커허억!"
카렌 왕궁의 옥좌 위에 앉아있던 크라함. 그가 각혈했다. 검은색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크라함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읊조린다.
"한스가 죽었군."
크라함은 세계검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대적자 한스를 되살리고 강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격 일부를 소모했다.
그런 세계검과 한스, 그 둘 모두 가 파괴되고 소멸했으니 . 그 반동이 크라함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는 로브자락으로 입가를 완전히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들인 놈이었는데 . 아쉽게 되었 어."
자신의 수하인 한스가 죽었음에 도. 크라함은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아끼던 장난감을 잃게 되어 아쉬워하는 정도. 크라함에게 있어 한스의 존재가치는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의 시선이 돌아간다.
"다음 대적자는 어디에서 나올 지."
크라함의 시선이 향한 곳은 지도였다. 커다란 세계지도.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까지. 도합 다섯 개의 대륙이 표시된 지도인 것이다.
그가 천천히 걸어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훑었다.
나직이 입을 열어 읊조린다.
"연방."
동부 대륙 전체를 집어삼킨 거대 국가 크루거 연방.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다.
크라함이 손가락이 서쪽으로 향 한다.
"상인연합. 유목연합."
서부 대륙은 두 개의 문화권이 경쟁중이다.
상인연합과 유목연합.
상인연합은 우월한 금력을 운용 해 대륙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며, 유목연합은 막대한 수의 기병으로 영토를 넓혀간다.
그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남쪽으로 향했다.
"제국."
오르페우스 제국. 남부 대륙의 패자.
동시에 다수의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진행 중인 강력한 군사국가이 자, 현재 한지훈이 몸 담고 있는 국가이다.
크라함의 손가락이 중앙으로 올라섰다.
"엘프. 드워프. 요정 ."
세계수를 수호하는 종족 엘프. 그리고 장인의 종족 드워프와, 자연력을 순환시키는 요정들까지.
"대적자가 어디에서 나올지 궁금 하군 그래."
크라함은 저곳들 어딘가에서 새로운 대적자가 등장하리라 예상하고 있다.
연방, 상인연합, 유목연합, 제국, 엘프.
모두 이전 시나리오에서 한지훈을 대적했던 주요 세력들이다.
그가 질척하게 웃었다.
"새로운 대적자는, 한스보다 더 강했으면 좋겠군."
크라함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한다.
그는 한지훈을 막아설 새로운 대적자의 등장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