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187화 (187/390)

187화.

한스가 검은색 안개를 가르며 지 척까지 걸어왔다. 그에 나는 놈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붉은색으로 번들거리는 안광, 길 게 기른 갈색 머리카락, 커다란 덩 치.

기억 속에 자리해있던 익숙한 놈 의 모습.

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진 않았다.

"…잠깐 사이에 꽤나 삭았는데 그래."

눈동자를 굴려 한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놈이 크라함에 의해 되살아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이전에는 눈동자의 색이 바뀌고 검은색 기운을 휘감고 있는 것 빼 고는 살아있을 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었다.

하지만 지금 놈의 외양은 그때와 느낌이 상당히 달랐다.

퍼석하게 죽어가고 있는 피부. 눈동자에 어린 안광은 불안정하게 흔들렸으며, 그에 반해 놈이 휘감고 있는 검은색 기운은 보다 거칠어져 있었다.

추측해 본다.

"세계검의 부작용인가?"

"그것도 있지만… 세계검 때문만 은 아니지."

저벅. 녀석이 한 발자국 더 걸어 온다.

"네놈은 나를 죽였다."

"그래."

"내 목에 검을 박아 넣어, 비틀었지. 두 번이나 ."

후욱.

심호흡하며 장검을 들어올렸다. 곧 놈과 전투하게 될 것이기에.

기세를 끌어올린다.

놈이 이어 말했다.

"내 생명이 다해가고 있을 뿐이다."

"하긴. 사자는 언제까지나 움직이 진 않으니까."

생명이 움직이고 살아가는 데는 생명력이란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스는 죽었고. 놈은 여 태껏 생명력 대신 흑마법의 힘을 빌려 움직이고 의식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이후로 나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놈의 육신은 점차 그 수명이 다 되어가는 듯하다.

"네놈을 죽인다면. 나는 내 사명을 완수함과 동시, 계속해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스스릉. 한스가 장검을 뽑아들었다. 나는 놈의 검을 살핀다.

빛조차 반사하지 못할 정도로 짙은 검은색의 장검이었다.

마치 저주 그 자체가 구현화된 듯한 장검.

"이 세계검으로 네놈을 죽여, 네 격을 빼앗겠다. 한지훈."

화르르륵.

녀석의 검신에서 붉은색 기운이 치솟았다. 강렬한 기세가 주위를 장 악했다. 기괴한 파동이 사방천지로 뻗어나간다.

"… 붉은색이라."

나 또한 마나를 끌어올렸다.

청아한 기운이 전신의 회로를 순 환하며 기세를 돋웠다. 기운은 곧 검으로 밀려들어 응축되었고, 응축 된 기운은 불꽃으로 화한다.

화르르르륵.

검신을 따라 청염이 이글거리며 피어오른다.

"이번에는 반드시 죽여버린다. 놈."

철그럭.

녀석이 검날을 곧추세워 자세를 다잡았다. 붉은색 안광이 이쪽을 노 려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검날을 들어올렸다.

"누가 할 소리를."

한스 요한바르첸. 놈과 검날을 맞부딪혔던 것이 벌써 여러 번이다.

고지대 거점에서, 공국의 제국 침공에서, 갈레이 요새에서.

그때마다 나는 놈을 거의 죽일 뻔하거나, 죽였고. 녀석은 그때마다 되살아나 다시금 등장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확실하게 죽여 주마. 한스 요한바르첸."

녀석을 죽일 것이다.

죽여서, 완전히 소멸시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게 할 것이다.

"간다."

나는 지면을 박찼다.

콰앙!

내 몸이 앞으로 쇄도해간다.

* * *

"세계검이 활성화되었어요."

엘리스. 모든 엘프들의 지도자이 자세계수의 수호자.

"이름 없는 별이 대적자와 조우 했네요."

그녀가 문득 그리 중얼거린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뱉어진 말이었다. 오직 상위의 격을 지닌 그녀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주위에 도열해 있는 엘븐 가디언들에게 지시한다.

"통신 수정구를 가져다주겠어 요?"

"알겠습니다. 여왕님."

그녀의 지시에 곧 엘븐 가디언들 이 수정구를 대령한다. 엘리스는 수정구 위에 손을 얹었다.

우우웅….

녹색 광휘가 은은히 피어오른다. 직후 연결되는 통신.

"니디아. 그쪽 상황은 어떠나요?"

- …여왕님.

엘리스가 통신을 연결한 인물은다름 아닌 니디아였다.

한지훈과 가장 오래 본 엘프이 자, 지금 그의 곁에서 조력하고 있는 이.

그녀가 보고한다.

- 지금 저희는 마녀를 회수해 안전한 곳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가요. 한지훈 씨와 통신이 되나요?"

엘리스는 물었다.

지금 대적자와 조우했을 한지훈 과 통신을 연결할 수 있냐고.

그에 니디아는 부정한다.

- …아니요.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통신이 제대로 되었었는데 . 어째서인지….

"역시. 세계검이 활성화된 게 확 실하네요."

엘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의 시나리오에서, 연합은 한지훈의 군세에 대항하기 위해 세계검을 만들었었다.

시스템의 모든 간섭을 절삭할 수 있는, 이 세상 그 어떤 아티팩트보 다도 고위의 물건.

"세계검이 활성화되었으니 . 모든 간섭이 무효화되었을 테니까요."

사실 세계검이 절삭할 수 있는 것은 시스템의 간섭뿐만이 아니었다.

세계검은 이 세상 그 모든 간섭을 무력화하고, 절삭한다.

마나, 자연력, 생명과 같은. 이 세상의 기초적인 힘부터.

완성된다면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 토대가 되는 시스템까지.

그 모든 것을 모조리 잘라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세계검이란 아티팩트인 것이다.

그런 세계검이 활성화되었다. 자연히 마법통신 따위가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

"하지만. 아직 세계검은 완전하지 않지요."

그러나 엘리스는 확신했다.

세계검은 완전하지 않다고.

전의 시나리오에서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결국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세계검이었다.

흑마법사들이 만든 세계검 또한 아직 미완의 것이리라. 엘리스는 그리 추측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검이라 면. 제 힘으로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어요."

엘리스는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어버렸다.

사르륵. 천 소리를 내며 흘러내 리는 안대. 곧 가지런하게 닫힌 그녀의 두 눈이 드러난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떳다.

"제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한지훈 씨."

그녀의 눈동자는 찬란한 황금색 이었다.

지면을 박찼다. 앞으로 향하는 내 몸. 놈의 모습이 점차 크게 보 인다.

한스 요한바르첸.

이번에는 반드시.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반드시 죽여버릴 거다.

콰앙!

검날을 내뻗었다. 그와 동시, 집중스킬이 활성화되어 내 사고가 가속되었다.

시야가 잿빛으로 물들고,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한다.

똑똑히 보인다.

공기를 가르며 뻗어나가는 검날. 검날은 공기를 꿰뚫고 놈의 목덜미 를 향해 나아갔다.

'죽였다.'

승리를 확신했다.

민첩 능력치는 압도적. 내가 내 뻗은 검날은 곧 한스의 목을 관통 할 것이고, 녀석을 죽여버릴 것이리라. 그리 생각했다.

놈의 검날이 움직이는 것을 보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무슨?!'

나는 경악해 자세를 낮췄다.

콰아아아아아앙!

붉은색 검광이 번뜩인다.

직후 강렬한 풍압이 내 목덜미를 스쳐지나갔다.

간발의 차로 피할 수 있었다.

으득.

나는 이를 악물고 뒤로 도약, 놈 과의 거리를 벌렸다.

"미친."

다시금 한스의 모습을 주시했다.

놈은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다만 검을 쥐고 있는 자세가 바뀌 어 있었을 뿐.

내 공격에 대응해 반격한 그 자세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

"한지훈. 오직 네놈만이 시스템의 가호를 받는다 생각지 마라."

철그럭. 녀석이 뻗었던 검날을 회수해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는다.

"나 또한 시스템의, 운명의 가호 를 받는다."

저벅, 저벅.

놈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나는 뒷걸음질 쳐 물러나 거리를 유지한다.

"네놈을 대적하는 운명을 지닌 나이기에."

놈은 여전히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점차 진해지는 녀석의 기세.

질척하고도 무거운 공기에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네놈이 시스템의 가호를 받아 성장하는 만큼. 나 또한 강해지는 것이다."

"그것 참 엿같은 소리네."

쯧 혀를 찼다.

예전에 니디아가, 아니, 니디아의 몸을 빌린 엘리스가 말해줬기에 알 고 있다.

내 대적자의 운명을 타고난 한스는 그만큼 강해진다.

나를 대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놈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이야기를 당사자 놈에 게 들으니 짜증이 난다.

"죽 쒀서 개 준 느낌이야."

내가 성장하는 만큼 한스놈도 덩 달아 강해진다니. 이 무슨 지랄 맞 은 일이란 말인가.

"한지훈."

저벅.

놈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에 나 또한 뒷걸음질을 멈추고 간격을 유지했다.

언제든지 돌진하거나 물러설 수 있도록.

놈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구구절절한 소리를 하는 이유. 알고 있나?"

당연히 알 리 없다.

놈이 씩 웃는다.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 기 때문이다."

"마지막이라."

"이번 전투에서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 몸은 붕괴되고 말지."

확실히 놈의 수명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이번이 네놈을 죽일 내 마지막 기회란 거다."

"그것 참, 희소식인데 그래."

그러니까 이번에 놈을 죽이기만 한다면. 저지긋지긋한 얼굴을 볼일이 없다는 소리 아닌가.

"기나긴 악연도 이걸로 끝이다. 한지훈. 그러니, 정당한 싸움을 할 것이다."

"정당한 싸움이라. 그게 뭔 개소 리지? 한스."

나는 한스의 눈을 바라봤다.

여전히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색 안광. 하지만 비로소 놈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나는 녀석의 여러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항상 네놈에게 패배했지."

첫 번째로는 열등감.

항상 전투할 때마다 간발의 차로 승리한 것은 나였다.

놈은 나를 전혀 이기지 못했다.

"네놈을 죽여버릴 거다."

다음으로는 복수심과 증오.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검날을 목덜미에 박아 목뼈를 부수고 살갗을 난자해. 죽여버릴 거란 말이 다!"

벌써 여러 번이나 내게 죽은 놈 이다. 녀석은 내게 격렬한 복수심과 증오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부하를 부 려 죽일 수는 없지."

마지막, 승부욕.

"네놈을 정정당당하게 이길 것이다. 암흑기사, 흑마법사, 사령병사. 그 어떤 간섭이나 도움 없이 오직 내 힘으로 말이야."

한스는 나를 향한 복수심만큼 진 한 승부욕을 품고 있었다.

한상 져왔으니까. 한번쯤 이기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이자리를 만들었다."

그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마치 과시하는 듯.

"나는 네놈을 죽이고 내 가치를 증명할 것이다. 복수를 완수할 것이다. 그리고 크라함을 따라 이 세상을 모조리 집어 삼킬 것이다!"

그리 외치는 한스에게서 나는 애 석한 감정을 느꼈다.

"망가졌구나."

나는 과거의 한스를 떠올린다.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군단장]

["…결국 우리 공국은 멸망하는 가. 허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한지훈!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내 목숨을, 영혼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내게 복수심을 불태우던 녀석.

사실, 전의 시나리오에서는 나름 대로 선의 편에 섰던 인물이었다.

[한스 요한바르첸][연합군 남부 사령관]

["흑마법사와 손을 잡다니. 한지훈, 네놈도 갈 데까지 갔군."]

한스는 흑마법사와 연합한 나를 막기 위해 연합의 사령관으로서 활동했었다.

[한스 요한바르첸][연합군 남부 사령관]

["인류를 위해.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네놈을 죽이겠다."]

["그 목으로 죗값을 치러라. 한지훈."]

녀석은 강했고, 냉철했으며, 굳건 한 심지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한스 요한바르첸][연합군 남부 사령관]

["막다른 길이로군…. 이것이나 의 최후인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였던 녀석 의 모습.

놈은 복수를 위해, 그리고 인류 를 위해 나를 대적했다.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과를 승복해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녀석을 보라.

"죽여버린다! 한지훈!"

열등감과 복수심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꼴이라.

신체는 흑마법사에 의해 강제로 되살아나 엉망. 눈동자에는 질척한 복수심이 일렁이며, 전신에는 암흑색 기운이 일렁이고 있다.

역설적이다.

"전생에 인류를 위해 싸웠던 너는 흑마법사의 하수인이 되었고. 학 살자였던 나는 이제 인류를 위해 싸우는구나."

전생에 인류를 위해 싸웠던 영웅 이 저토록 타락하다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놈을 죽였을 때?

아니면 처음 조우했을 때?

아니. 어쩌면 내가 이 개같은 세상 속으로 끌려들어 왔을 때부터일 지도 모른다.

"불쌍하구나."

절로 측은한 감정이 올라온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본래 그가 악인인 나와 대적했던 영웅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녀석에게 측은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런 내 심상을 눈치챈 것인지.

"… 감히."

화르르르륵!

녀석이 분노했다. 붉은색 광휘가 더욱 진하게 솟구친다.

"감히 그딴 눈으로…!"

열등감과 복수심에 잠식되었을 녀석이, 마치 불쌍한 것을 보는 듯 한 시선을 받았으니 .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다.

"죽어! 죽어어어어!"

콰아아아앙!

놈이 자리를 박차고 이쪽으로 쇄 도해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