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바네사. 그녀는 고아였다.
부모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태어나자마자 성당에 버려졌다.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고는 '바 네사'라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 뿐.
다섯 살. 성당에서 ?겨 난 뒤. 그녀는 시궁창을 뒹굴며 비루한 삶을 근근이 이어갔다.
들개에 물려 다리를 잘릴 뻔하기 도 했고, 빵 하나를 훔치다 맞아죽을 뻔한 적도 있다.
그런 그녀를 주워준 것은 크라함 이었다.
- 꼬맹이 주재에 꽤나 독기를 품고 있군. 재밌는 놈이다. 데려가야 겠다.
- 실험체로 사용하실 겁니까?
- 아니. 흑마법사로 키우지. 이런 눈을 하고 있는 꼬맹이들은 대체로 혹마법이 적성에 맞더군.
지하 혹마탑에서 흑마법사의 길을 걸어 나갔다.
바네사는 흑마법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가 취한 흑마나의 농도는 짙었고, 발현한 흑마법의 위력은 동기생들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곧 그녀는 이른 나이에 하급 흑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 어둠에 귀의한 걸 환영한다. 애송이.
하급 흑마법사가 되자 더 많은 자유가, 더 많은 권리가 주어졌다. 좋은 음식을 먹었고, 깨끗한 물을 마셨다.
비록 기거하는 곳은 눅눅한 지하동굴속 마탑이었지만. 그녀는 개의 치 않았다. 이전 길거리를 떠돌 적 보다 훨씬 '인간다운' 삶이었으므 로.
바네사는 혹마법에 매진했다.
흑마법을 수련해 경지를 높일수록 주변의 인정을 받았다. 인정은 곧 힘이 되었고, 힘은 보다 나은 대우로 돌아왔다. 어느새 그녀는 유 망한 후기지수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 쉬피르 평원에 마을 다섯 개가 있다. 거기 모두를 청소하고 와라.
그녀는 처음 맡았던 임무를 아직 도 기억한다.
다섯 개 마을을 청소하고 오라는 선배 흑마법사의 지시. 그 '청소'란 말 그대로 아무런 생명조차 남기지 않고 깨끗이 치워버리는 것을 뜻했다.
바네사에겐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마을로 접근해 혹마법을 발현. 마을주민 모두를 죽여버리기만 했으면 되었으니 .
그녀는 마을 다섯 개를 불태워버렸다.
- 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
- 흑마법사다! 혹마법….
- 도망쳐….
타오르는 검은색 불길이 집을, 가축을, 마을의 사람들을 집어삼켜 가는 광경은 아직도 그녀의 망막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날이 바로 그녀가 처음 살인을 하게 된 날이었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곧 무 뎌졌다. 죄책감을 상회할 만큼의 보상과 인정이 주어졌으니까.
이후로도 그녀는 흑마법에 매진했고, 임무를 수행했다.
- 키메라를 제작하라.
- 실험체 백 구를 확보해라.
- 마을을 불태워라.
- 흑마법사로 양성할 어린애들을 납치해 와라.
바네사는 유능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사람을 죽여 실험체를 확보했고, 아이를 납치했으며, 온갖 시체들을 조합해 키메라를 만들기 도했다. 수없이 많은 마을을 불태 우고 청소했다.
결국 바네사는 상급 흑마법사의 경지에,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도달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색 바랜 누더기가 아닌, 제대로 만들어진 검은색 로브. 기름진 식사. 사유 재산. 지식의 충족. 그리고 후배들의 존경과 선배들의 질시 까지.
충족감을 느꼈다. 더 이상 쓰레기처럼 뒷골목을 전전하던 고아는 없었다. 젊은 나이에 상급 흑마법사에 이른 유망주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 이자의 심장을 가져와라.
크라함이 직접 바네사를 불러 하나의 임무를 주었다. 어떤 사람의 심장을 가져오는 것.
- 베디란트 뒷골목에 있을 거다.
크라함이 내민 마나 몽타주를 받아들었다.
자신처럼 검청색 머리카락을 지닌 중년 여인. 얼굴에는 삶의 고단 함이 묻어나온 듯 주름이 자글거렸 으며, 눈가는 퀭했다.
순간 바네사는 의아함을 느꼈다. 겉보기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노숙자에 불과할진데. 자신을 직접 불러 이자를 죽이라 하다니.
하지만 그녀의 의문은 뒤이어 들려온 크라함의 목소리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 이자만 죽인다면. 너는 최상급 흑마법사다.
최상급 흑마법사로의 상격. 그녀가 가고 싶어 마지않았던 자리. 소수의 재능 있는 흑마법사들만이 도 달할 수 있는 자리다.
그녀는 주저 없이 뒷골목으로 향했다. 목표를 찾았다.
허접하게 지어놓은 판자집 안. 그곳에 목표가 있었다.
저벅, 저벅.
바네사는 천천히 걸어갔다. 달그락 거리는 판자집의 문을 열고, 단검을 들어올렸다.
바네사의 손놀림은 민첩했다.
푸욱.
그녀의 단검이 여인의 가슴팍을 찔렀다. 많은 것이 느껴졌다.
검날을 타고 느껴지는 심장의 고 동, 질척하게 흐르는 뜨거운 핏물, 이쪽을 올려다보는 중년인의 눈동자, 절명 직전 그녀의 몸부림.
바네사는 검을 박힌 그대로, 내 리그었다.
우드득.
갈비삐가 부러지고 내부 장기가 진탕되었다. 하지만 심장은 난자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크라함이 원한 것은 이중년 여성의 심장이었으니 .
그때. 바네사는 여인의 단말마를 듣게 되었다.
"바네사…."
바네사는 놀라서 손을 멈췄다. 그리고 여인의 몸부림 또한 멈췄다. 그녀의 숨이 끊긴다.
바네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 커니 서 있었다.
분명 여인은 절명 직전 단말마로 바네사라는 말을, 자신의 이름을 내뱉었다.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있던 것인가. 어찌하여 단말마로 자신의 이름을 내뱉었던 것인가.
바네사는 미처 심장을 뽑을 생각 도 못한 채 허겁지겁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크라함을 만나 물었다. 자신에게 죽이라 한 그 여자가 누구이냐고.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임무를 준 것이냐고.
그에 크라함이 클클 웃으며 대답 하기를.
- 최상급 흑마법사가 되기 위해 서는 인간세상과 모든 연을 끊어야 한다.
바네사는 불안함을 느꼈다.
- 모든 연을 끊고 오직 혹마나에 투신해야만이 비로소 최상급의 지위에 이를 수 있다.
- 내가 죽이라 했던 그중년 여자는 네 어미였다.
- 비록 심장을 가져오지는 못했 지만. 제대로 죽였군. 바네사, 너는 오늘부터 최상급 흑마법사다.
바네사는 자신의 손으로 제 어미 를 죽였다.
그렇게 그녀는 최상급 흑마법사 가 되었고.
바로 그날 마탑에서 나와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허억! 헉!"
바네사는 이를 악물며 앞을 노려 봤다.
보이는 것은 반쯤 무너져 내린 지하 공간. 시야를 가득 메우는 매 캐한 연기. 그리고 그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늑대형 키메라들.
그녀는 턱을 따라 흐르는 피를 훔치며, 허탈하게 웃었다.
"키메라. 예전에는 내 편이었는데 ."
지금은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
콰앙!
키메라들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바닥을 뛰어넘어 이쪽으로 돌진했다.
바네사는 이를 악물고 외친다.
- 죽어버려!
콰르르르릉!
혹마나의 폭풍이 일어나 그녀의 주위를 휩쓸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지척에 도달했던 다수의 키메라들 이, 분해되어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다.
"허억, 헉…헉……"
안색이 더더욱 창백해진 베네사.
그녀의 흑마나 잔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흑마나를 버리고 백마나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에. 다시는 흑마 법을 사용하지 않겠다 다짐했기에. 평소 흑마나를 축적해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의 무력은 형편없었다.
크르르르르르!
달려드는 키메라들. 바네사는 그것들을 하나둘 처리해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콰직!
"으으으윽!"
키메라가 그녀의 종아리를 물었다. 퍽 터져 나오는 핏물. 아득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머리를 진탕 내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을 잃지 않고 흑마법을 발현한다.
콰아아아앙!
검은색 폭발이 일었다. 키메라의 몸체가 터져나가고, 암흑색 핏물이 퍽 튀어 방안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
비척. 바네사는 일어섰다. 그리곤 허리춤을 더듬어 새로운 포션을 꺼내 마시려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포션은 없었다. 이미 다 마셨기에.
바네사의 시선이 앞으로 향한다.
크르르르르…
방금 전 죽인 키메라들의 시체를 밟고, 또다시 모습을 보이는 새로운 키메라들. 그것들이 몰려들어 자신을 물어뜯으려 한다.
바네사는 죽음을 직감했다.
마나는 거의 고갈. 포션은 없으 며, 다리에는 중상을 입어 제대로 된 거동조차 불가능.
더해 눈앞에는 수십의 키메라들 이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
…아.
죽음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다.
"크라함. 꼭 죽이고 싶었는데 ."
바네사는 체념해 눈을 감았다.
살아나갈 자신이 없기에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 저택 지하에 있을 거다! 가서 구출해!
- 밀어붙여!
들릴 리 없는 목소리들이 들려오 기 시작했다.
* * *
"돌파! 돌파하라!"
"포위당하지 않도록 해! 대로 전부를 점거하고 밀어내는 거다!"
"기사들은 빈틈이 생기면 곧장 출격해 보조하라!"
병사들이, 그리고 기사들이 전진 해갔다.
퍼억, 콰직. 후드득.
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령 병사들이 죽어나갔다. 놈들은 아무런 신음도 내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쇳소리 대신, 병사들의 고함소리 가 고막을 울려댄다.
"전진해!"
지금 우리들은 게르도폴에 진입. 사령병사들의 무리를 헤치며 전진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으득. 나는 이를 갈았다.
"엿같이 많네!"
고개를 내빼 앞을 바라봤다.
우글거리며 몰려오는 사령병사들. 놈들은 결코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나도 많기에, 진군이 힘들 지경이었으니 .
파앙!
검을 휘두른다. 오러를 발현하지는 않았다. 저런 시체들 따위, 심장 이나 머리만 부숴버린다면 동작을 정지하니까.
퍼억.
목이 베인다. 둔탁한 절삭음. 직후 사령병사의 머리가 몸통에서 떨 어져 힘없이 굴렀다. 털썩 쓰러지는 사자.
시체를 지나쳐 한 발자국 전진. 또 다른 적을 상대한다.
끝없이 검을 휘두르는 와중 나는 고뇌했다.
'적의 수가 너무 많다.'
사령병사들이 몰려들었기에, 도통 전진을 할 수 없다.
이건 무슨 러시아워도 아니고.
베어 쓰러트리는 것보다 사령병 사들이 불어나는 속도가 더 빠를 지경.
이러다간 늦을 것이다.
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는, 마침내 결정했다.
"엘락."
"예! 군단장님!"
파앙! 엘락이 검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검은색 피가 퍽 튄다.
나는 이어 말한다.
"네가 천인대를 이끌어라.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으로, 계속해 전진 해."
"군단장님께서 지휘하지 않으실 겁니까'?!"
"나는 할 일이 있다. 다음으로, 레벤스턴!"
나는 볼로냐 기사단의 1번 전대장 레벤스턴을 호출했다.
"1번 전대장 레벤스턴입니다. 군단장 각하."
그러자 금방 응답하는 레벤스턴. 그에게 지시했다.
"네가 기사단을 지휘해. 체력이 될 때마다 돌진하며 보병대의 부담을 줄여주는 거다. 할 수 있겠나?"
"해보겠습니다."
"좋아."
엘락과 레벤스턴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이제 엘락은 보병대의 지휘 를, 그리고 레벤스턴은 기사들의 지휘를 맡을 것이다.
"그리고, 엘프들."
"네. 한지훈 씨."
내가 말하자 니디아가 싱글거리며 다가온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먼저 우리끼리 가야할 것 같은 데. 적 사령병사가 너무 많아."
"어떻게 하시게요?"
"돌파해야지."
다른 병사들에게 돌파명령을 내 린다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엘븐 가디언들이라면, 그리고 나라면 비교적 수월하게 돌파 할 수 있다.
"자, 내 계획을 들어봐."
"흐음… 계획이라. 어디 한번 들어볼까요?"
니디아가 기대된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하긴. 도상연습에서 야전사령관마 저 발라버렸던 나다. 무언가 천재적인 계략이라도 있나 기대되겠지.
하지만 내 계획은 전혀 천재적이 지 않다. 오히려 단순무식에 더욱 가깝다.
"먼저, 마게브가 마법을 갈긴다. 광역기보다는 관통형으로. 우리 넷 이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말이야."
"네. 그리고요?"
"그다음, 나머지 우리가 돌진한다."
"… 그리고요?"
"나와 타냐가 앞장서 길을 열고, 너가 정령을 부려 측후면을 보는 거지. 그렇게 계속 전진해 목적지로 향하고 말이야."
"흐으으음…"
고개를 갸웃하는 니디아. 그녀는 턱을 쓰다듬더니, 물어왔다.
"그런 걸 계획이라고 하나요?"
"그럼 뭐라고 생각하는데 ?"
"그냥 닥치고 돌격 아니에요?"
닥돌 맞다.
시선을 돌려 마게브를 바라봤다.
"마게브. 부탁해."
"알겠습니다. 한지훈 님."
마게브가 지팡이를 들어올린다.
쿠르르르르르….
마나의 울음이 들리고, 웅혼한 기운이 주변을 잠식해간다. 지팡이 위로 푸른색 기운이 떠올라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쏘겠습니다. 전방으로 갈기 면 됩니까?"
"그래. 전방, 일직선으로."
"알겠습니다."
지팡이를 앞으로 겨눈 마게브. 직후, 번쩍!
섬광이 터져 나와 일순 시야가 마비되었다.
콰르르르르르르!
그 뒤 터져 나온 커다란 폭음. 좌우로 충격파가 일어 매캐한 흙먼지가 일어난다.
그리고 흙먼지 너머 광경을 바라 본 나는 헛웃음을 내쉬었다.
"미쳤군."
방금 전 마법공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령병사들이 죽었을까.
일단, 최소한 백은 훨씬 넘었다. 어쩌면 삼백에 달할지도 모른다.
일직선으로 쏘아진 마법이, 무려 삼백에 달하는 시체를 관통하며 길을 열어버린 것이다.
"멍 때리면 안 돼죠. 한지훈 씨."
내가 앞을 바라보고 있자니, 니 디아가 그리 말했다.
그녀가 씩 웃는다.
"가자고요."
그녀는 자연력을 끌어 모아 어느새 정령들까지 소환한 상태였다.
전투의지가 만전인 모습.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사령병사들을 돌파, 바네사가 있을 저택의 지하공방까지 도달해 야 한다.
죽어라 검을 휘둘러야 하리라.
"가자!"
파앙!
나는 자리에서 도약해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런 내 뒤를 엘븐 가디언들이 뒤따른다.
이제 곧 마녀의 낯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