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그동안 나는 수많은 적을 베어왔다.
카렌과 공국의 병사와 기사, 흑 마나에 침식당한 암흑기사, 인의를 저버린 흑마법사. 그들 모두는 살아있었다. 심장이 뛰었고, 온기 어린 피를 가지고 있었다. 생명이라는 존귀한 것을 지니 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베고 있는 적에게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푸욱.
살을 가르고 찔러들어가는 검날. 비틀어 심장을 난자하고, 뽑아냈다.
썩은 피가 주룩 흐르며 악취가 코를 찌른다.
털썩.
힘없이 쓰러지는 사령병사. 녀석 의 뒤에 자리해 있는 또 다른 사령 병사를 베어낸다.
서걱.
녀석 역시 힘없이 쓰러진다.
고함소리도, 철과 철이 맞붙는 소리도 없었다. 그저 그르르 하고 낮게 깔리는 사령병사의 단말마와, 불쾌함에 신음하는 병사들의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
"무슨 돼지고기를 베는 것 같군요."
카일은 그리 말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해 적을 죽인다기보다는,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를 베어 넘기는 감각.
마치 도축장에서 일하는 백정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된다.
"우익! 포위되지 마! 전진속도를 늦춰!"
"절대 포위되어서는 안된다!"
사령병사 개개인은 그 무력이 보 잘 것 없이 하찮았지만. 그쪽수가 훨씬 많다. 포위된다면 이쪽의 손실 이날 터다.
그렇게 나는 아군의 진형을 지휘 하는 한편, 검을 휘둘러 시체들을 쓰러뜨려 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 해치운 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반쯤 썩은 핏물이 지면에 흐르고, 역겨운 냄새가 후각을 가득 채운다.
수정구를 들어올렸다.
"각 백인대와 기사전대. 보고해."
- 1번 백인대! 이상 없습니다. 손실 무.
- 2번 백인대! 역시 손신 무.
- 3번 백인대 동일합니다.
- 4번….
각 백인장과 전대장들이 손실현 황을 보고해 온다.
놀랍게도 손실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숫자가 이쪽을 아득히 넘어선다지만 지성도 재 빠른 운동능력도 없는 죽은 시체에 불과했다. 포위되어 검조차 휘두르 지 못할 지경이 아닌 이상 전사자 가 나오기는 힘들다.
- 7번 백인대. 멍청한 놈 하나가 자빠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7번 백인장. 그 멍청한 놈에게 포션 지급해."
-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부상자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변 병사들 의 얼굴을 살폈다.
병사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분명 전투결과 아무도 죽지 않았음에도. 한껏 얼굴을 찌푸려 울상 짓고 있는 것이다.
그이유. 나는 알고 있다.
'불쾌하겠지.'
병사란. 군인이란.
자신의 무를 갈고닦아 칼밥을 먹고사는 인간들은 모두 나름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무력을 국가나 사회를 위해 사용한다는 자부심. 그들은 적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것을 명예로 여긴다.
그리고 이번 전투는 절대 명예로 운 싸움이 아니었다.
적은 약하디 약한 사령병사들. 한때 카렌의 평범한 민중들이었을 이들이었다.
그럴 그들을 베어 넘겨 죽여 나 갔다.
병사들의 눈에는 이 무력한 사령 병사들이, 자신이 보호해야할 제국 의 민중들과 겹쳐보였을 것이다.
절대 유쾌한 기분은 아니리라.
"… 부상자 수습하고, 진형 바로잡아. 곧장 진군하겠다."
"명령을 따릅니다, 군단장 각하!"
이불쾌한 공간에서 가급적 빠르 게 빠져나가야 사기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병력을 갈무리한 뒤 진군을 서두른다.
제국군이 북상한다.
게르도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크라함. 그 미친놈이…."
어둑한 방안. 한 여성이 그리 중얼거렸다.
여성의 행색은 그리 단정치 못했다.
산발처럼 뻗친 검청색 머리카락. 얼굴에는 기름과 엉킨 땟국물이 흐 르고 있었으며, 입술은 긴장에 계속 해 씹어댔는지 부르터 있었다. 더해 그녀가 입고 있는 갈색 로브 또한 온갖 먼지가 들러붙어 지저분한 상태였으니 .
연금술사라기보다는 길거리의 노 숙인과도 같은 행색.
그런 그녀가 중얼거린다.
"카렌을 정말 멸망시키다니…."
바네사. 그 재능과 실력을 인정 받아 한때 '마녀'라는 이명으로 불 리었으나. 지금은 흑마법을 등지고 연금술에 매진하고 있는 인물.
그녀의 불안한 시선이 수정구로 향한다.
청색 수정구. 그 위에는 붉은색 반점들이 복잡 괴괴하게 떠올라 있다.
바네사는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빠져나가기에는 글렀어."
이미 눈치채보니 카렌 전역에서 일이 벌어지고 난 뒤였다.
사령마법의 발현. 이 도시에서 마법에 대항할 수 없는 일반 민중 들은 모조리 사령병사가 되어버렸다.
"밖에 사자들이 너무 많아."
그리고 그 사령병사들이, 이 도시 곳곳을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몰래 빠져나갈 수는 없다. 사자 들은 굼뜨고, 약하나 그 수가 너무 많기에.
만약 이 지하공방을 나가 대로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는 수십 수백의 사자들에게 덮쳐져 그대로 절 명할 것이다.
"도약 마법은 발현 불가능."
더해 이동마법 또한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자신이 접속할 통신수정구가 없기에 정확한 위치좌표를 받아낼 수 없다.
"남은 건…."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시선 이, 공방 구석 한 켠에 자리해있는 회색 수정구로 향했다.
평소 그녀가 연구하고 있던 아티팩트.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방법은 방출기의 무력화뿐 인가?"
평소 바네사는 흑마법사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연구해 왔었다.
흑마법을 이미 등졌기에. 언젠가 그들과 싸울 때를 준비해왔던 것이다.
흑마법사들은 배교자에게 철저히 복수하는 이들이니까.
달그락. 바네사가 수정구를 집어 든다.
"이걸 완성시켜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어."
바네사는 방출기 무력화 아티팩트의 제작을 재개한다.
그녀는 아직 지하공방에 있다.
우리 군은 북상하며 수많은 사자 들을 처치했다.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 으로 이루어진 사자무리들. 놈들을 격파하며 계속해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할 수 있었다.
"군단장 각하. 저곳이 게르도폴입 니다."
병사의 말에 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도시가 보인다.
크고 작은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공간. 나름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저 정도 규모라면 십 수만에 달 하는 인구가 산다는 것이 납득될 정도.
"그래. 저기 어딘가에 바네사가 있다는 것이겠지."
고개를 주억였다.
사령병사들을 제압해오며 도달했다. 이제 저 도시 어딘가에 있는 바네사를 찾아, 회유해, 퇴각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수정구를 들어올렸다.
"엘프. 나와라."
- 알았어요.
나는 엘프들을 호출했고, 곧.
우우우웅….
내 주위에 은은한 자연력이 일렁이더니, 세 명의 인영이 드러났다.
니디아, 타냐, 마게브. 각각의 영역에서 경지를 이룬 세 명의 엘븐 가디언들.
나는 쯧 혀를 찼다.
"왜 은신마법을 두르고 따라온 건지 모르겠어."
사실 엘프들은 병사들과 같이 행 군하지 않았다. 아니, 행군하긴 했 지만 은신마법으로 몸을 가리고 이동했다.
그에 니디아가 답했다.
"한지훈 씨의 부하들이 저희를 구경거리로 삼는데 몸을 드러내고 싶겠어요?"
"하긴."
시선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그에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이쪽을 주시하는 휘하 병사들.
엘프란 존재가 워낙 드물기에, 저런 신기하다는 시선은 어쩔 수 없다.
"자. 그럼 저희를 왜 불렀어요? 뭔가 시키실 일이라도?"
"도시에 도착했으니 . 마녀를 찾아 야 하잖아."
나는 고개 돌려 푸른색 로브를 입고 있는 남성 엘프를 바라봤다.
마게브. 마법을 다루는 엘븐 가디언. 그라면 탐색마법을 운용해, 쉽게 바네사를 찾아낼 수 있을 것 이다.
내 시선을 알아챈 것인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탐색마법을 발현하 지요."
그에 수정구를 들어 올리고, 마법을 운용하기 시작하는 마게브.
우우우우웅….
푸른색 광휘가 일어난다. 곧은 은한 빛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저 도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마게브가 다루는 마나는 저 도시 곳곳을 뒤져, 아직 살아있는 인물의 위치를 탐색해 낼 것이다.
내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름 없는 별."
저벅. 엘프들 사이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기다란 적발을 가진 여성 엘프 검사.
"먼저 확실히 해둬야겠군."
타냐. 엘프들 중 검으로 대성한 이. 그녀가 내 앞에서서 이쪽을 노려본다.
"우리는 네 부하가 아니다."
"… 당연한 소리를."
"하지만 한지훈. 네 녀석은 니디 아도, 마게브도, 마치 부하를 다루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
나는 잠시 내 행동을 되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네."
니디아야 여러 번 마주하다 보니 친숙해졌기에, 그리고 본인 또한 개 의치 않아 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전 마게브에게 내가 한 짓은 분명 기분 나쁠 만한 일이었다.
눈짓으로 지시하다니. 엘븐 가디언인 그에게 다소 불쾌할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내가 너무 경솔했어. 사과하지.
앞으로는 주의하겠다."
"… 그래. 알면 되었다."
타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 가로 걸어갔다. 내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니디아가 내 어깨 를 툭툭 두드렸다.
"한지훈 씨.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요."
"언짢을 리가. 내 잘못이 확실했 는데 말이야."
"흐음. 역시 한지훈 씨는 인간들 치고는 예의가 바르시네요?"
저 '인간들 치고'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뭐. 이해해주세요. 타냐는 군인 이란 족속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요."
"뭔가 이유가 있나보지?"
"예전에 많이 싸웠으니까요."
엘프가 있는 중부 대륙은 오랜 예전부터 인간국가들의 진출 시도 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타냐는 엘븐 가디언. 그녀는 엘프 전사들을 이끌고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침입자들에 맞서 싸웠을 터.
좋은 감정을 가지긴 힘들겠지.
"그리고 한지훈 씨는 이제 군단장이 되었으니까. 한번쯤 주의를 줄 생각도 있었겠지요. 인간들이란 지위가 높아질수록 거만해지는 경향 이 있으니까요. 뭐, 한지훈 씨는 아닌 것 같지만요."
"너는?"
"네?"
"너는 내 태도가 어떤 거 같아? 혹시 불쾌했나?"
니디아를 바라보았다.
니디아야 항상 해실거리며 웃는 낯짝이라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지 만. 어쩌면 그녀 또한 타냐처럼 내 태도가 무례하다 여기고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녀가 불편하다면 나는 내 태도를 고칠 용의가 있다.
내 말에 니디아는 피식 웃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예의 차리려 고요?"
그러며 재차 내 어깨를 툭툭 두 드리는 니디아.
"저는 이런 관계가 편해요. 한지훈 씨. 친구처럼 쉽게 지내자고요."
"그럼 됐다."
아무래도 니디아는 내 태도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 듯했다.
아니 오히려 기꺼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지훈 님."
내가 니디아와 대화하고 있을 때, 문득 마게브가 입을 열었다.
그가 수정구에서 시선을 떼 이쪽을 바라본다.
"찾았습니다."
"그래. 바네사를 찾은 건가."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게브가 마침내 바네사의 위치 를 특정했다. 이제 남은 것은 군대 를 이끌고, 그녀를 구출해오는 것 뿐.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듯했다.
"마녀를 찾은 건 저희뿐만이 아 닙니다."
"… 그게 무슨 소리지? 마게브."
"대량의 키메라와 사령병사들이, 마녀가 있는 지하공방으로 몰려가 고 있어요."
한발 늦은 건가.
마녀 바네사를 찾는 것은 우리뿐 만이 아니었다.
"마녀가 위험합니다."
마게브가 그리 말하는 그때.
콰르르르르릉!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분명 마법으로 인해 터져 나온 소리.
시선을 돌려 도시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도시의 남부 외곽, 커다란 저택. 그곳에서 검은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바네사의 공방이리라.
"키메라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한지훈 님."
"수가 정확히 몇이지?"
키메라. 여러 생물체를 합성해 만든 인조 생체병기.
흑마법사들이 주로 부리는 사역마들이다.
마게브가 대답했다.
"키메라의 수는 약 오백."
더럽게 많은 수.
"사령병사들의 수는… 측정하기 힘들군요. 아마 만 단위로 몰려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빌어처먹을 정도로 많은 수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 뒤에 도열 해있는 군관들을 바라봤다.
"상황은 들었지. 저곳에 적들이 우글우글 몰려들고 있다. 우리의 VIP를 낚아채가기 위해 말이야."
군관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수백의 키메라, 만 단위의 사령 병사들이라. 절대적은 수가 아니다.
반면 이곳에 있는 것은 일천의 병사와 삼백의 기사. 수적으로는 압 도적 열세.
"내가 앞장서겠다."
하지만 괜찮다.
이곳에는 엘븐 가디언이, 그리고 제국 영웅인 내가 있으니까.
임무를 완수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군! 깃발 올려! 최대한 빠른 속도로 기동한다!"
"명령을 따릅니다!"
우리 군은 도시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