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솔직히 믿기지 않아. 한지훈."
오스카는 그리 말하고는, 주위 군관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에는 차마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떠 올라 있다.
"80만이라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리 쉽게 믿기는 힘든 일이었다.
80만의 군대를, 고작 일주일 만에 무력화 시키다니 말이다.
그에 나는 대답한다.
"오스카. 혹시 흑마법사들이 어떻게 해서 사자를 부리는지 알고 있나?"
"그건…."
"그야 모르겠지. 일반 마법도 아닌 흑마법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이상한 일이니 말이야."
하지만 나는 다르다.
전생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다루 었던 것이 사자로 이루어진 군대.
그들의 장점도, 약점도. 정확히 알 고 있다.
"생각해 봐라, 오스카. 80만에 달 하는 사자를 움직이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을까?"
사자로 이루어진 군대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명령을 수행한다. 필요 한 것은 오직 죽은 자의 시체뿐.
개개인이 약하다는 단점은 있지 만. 그 무지막지한 수를 생각한다면 극도로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단점 또한 가지고 있었다.
"놈들에게는 핵이 있다."
"핵이라면."
"비콘처럼, 사자들에게 신호를 방 출해 명령을 내리는 아티팩트가 어 딘가에 있다는 거다."
수만 단위의 사자를 움직이는 것은 일반 흑마법사에게 불가능한 일 이다. 조종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 기에.
그렇기에 놈들은 사자로 이루어 진군대를 다룰 때 흑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하곤했다.
"그 아티팩트를 찾아내 파괴한다 면, 놈들의 사자 조종을 멈출 수 있다."
"… 그게 정말인가?"
"그래."
그 사자를 조종하는 아티팩트를 나는 신호 방출기라고 불렀다.
겉보기로는 일반 비콘과 생김새 가 유사했지만, 수정구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물건.
"허면 한지훈. 그 아티팩트를 어떻게 찾는단 소리인가?"
오스카는 그리 물었다.
하긴. 방출기를 파괴해 사자 조 종을 막을 수 있다한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 니.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그에 대답한다.
"사실. 나도 방출기를 찾을 수는 없다. 그건 내 능력 밖이니 말이 야."
"그렇다면 어찌 놈들의 아티팩트 를 파괴…."
"하지만, 방출기를 찾을 수 있는 존재를 한 명 알고 있지."
요의아한 오스카와 다른 군단장들 의 시선. 나는 고개 돌려 시야 속 홀로그램을 바라본다.
[2등급 비밀정보]
[연금술사 - 바네사는 현재 게 르도폴 지하 비밀공방에 거주 중입 니다.]
과거 시나리오에서 이름을 떨쳤 던 연금술사.
"마녀를 찾아야 해."
한때 흑마법에 귀의해 흑마법사 였으나, 지금은 전향해 연금술의 길을 걷고 있는 이.
마녀 바네사.
그녀를 포섭한다면, 효과적으로 흑마법사의 아티팩트를 무력화 할 수 있다.
"좋아. 시간은 얻었고."
군단장 막사 밖으로 빠져나오며, 그리 중얼거렸다.
일주일의 시간을 얻었다. 그동안 나는 독립 작전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뭐. 타이밍이 좋았어."
내 군단의 창설이 일주일 뒤로 예정되어 있기에, 그리고 북부군의 합류와 진군이 일주일 뒤이기에 얻어낸 여유였다.
그동안 나는 천인대를 움직여 바 네사를 찾아내 회유해야 한다.
피식 웃었다.
"벌써 바네사를 만나러 갈 줄은 몰랐는데 ."
사실 그녀를 회유하는 것은 좀 더 나중에 할 계획이었다.
그녀는 카렌 본토, 게르도폴에 살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이전쟁이 종결된 후, 혹은 진군하는 와중 도시에 들러 그녀를 회유하려했다.
하지만 아직 군단이 본토 진입도 하기 전에 이사태가 터져버렸으니 계획보다 좀 더 빨리 영입할 필요 가 생겼다.
나는 수정구를 들어올린다.
"엘락. 응답해라."
부르는 것은 엘락 빌레펠트. 내 아펠도른 천인대의 선임 백인장.
곧 그가 응답해왔다.
- 1번 백인장, 엘락 빌레펠트. 부름에 응답합니다, 천인장님.
"인마. 나이제 군단장이야."
- 아! 실수했습니다. 군단장 각하.
어깨를 으쓱이고는 물었다.
"천인대 상태 어때?"
- 신입들 충원되었고, 보급도 모두 마쳤습니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습니다!
흡족한 대답. 절로 내 고개가 주억여 졌다.
"좋아. 그럼 다들 완전무장한 채 한시간 내로 원정 준비 해놔."
- 원정이라 하시면….
"카렌 본토 도시인 게르도폴을 칠 거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브 리핑하며 설명해주지."
- …알겠습니다. 군단장 각하.
통신이 끊겼다. 이제 엘락은 천인대의 사관들에게 해당 내용을 전 파하리라.
허나 내가 통신해야 할 곳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다시금 수정구를 들어올린다.
"베르겐 기사단장."
- 그래. 한지훈이군. 무슨 일인 가? 한창 군단장 회의 중이라고 들었네만.
베르겐이 곧장 응답한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그에게 요청했다.
"기사들 좀 빌렸으면 하는데 ."
- 무슨 일이지?
"카렌 본토 게르도폴로 먼저 갈 생각이다.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
- 필요한 일인가?
"당연히."
베르겐은 무어라 묻지 않았다. 그저 필요하냐는 질문만 할 뿐.
그가 흔쾌히 허락했다.
- 기사 삼백을 지원하지.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는 건가?"
- 지엄하신 군단장의 요청이다. 당연히 허락해야 하지 않겠나.
군단장과 기사단장. 같은 단장 계급이었으나, 지휘권은 군단장이 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에 당연하듯 기사들을 지원하는 베르겐이었다.
- 그리고, 자네라면 쓸데없는 짓을 하진 않을 테니 말이야. 분명 필요한 일이겠지.
물론 그동안 내가 쌓아온 신뢰가 만만치 않은 덕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고맙다. 베르겐."
- 고맙다면 나중에 술이나 하나 사게. 게르도폴은 위스키가 그렇게 유명하다지.
"올 때 하나쯤 챙겨와야겠어."
통신이 끝났다. 기사 삼백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여기서 끝날 생각이 없었다.
나직이 읊조린다.
"요정들. 거기 있지."
- 왜? 뭐 시킬 거 있어?
내부름에 스르륵 나타나는 요정 들. 그네들에게 요청한다.
"너희들의 여왕이랑 통신했으면 하는데 ."
- 엘리스 님이랑?
요정들이 눈을 껌뻑이며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말이야."
- 잠깐만 기다려. 통신을 연결해 볼게.
요정들이 내가 쥐고 있는 통신수 정구를 만지고, 무언가 이형의 힘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하고 울리는 잔잔한 파동. 그리고 점차 초록빛으로 물들 어가는 통신수정구.
지금 요정들은 자연력을 운용, 엘프 여왕과 통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직후.
- 한지훈 씨.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프 여왕 엘리스의 음성. 과연, 니디아의 몸을 빌려 말했을 때랑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그녀에게 요청한다.
"엘리스. 너희 엘프들은 이번 사 태에 개입할 거지."
- …네. 당연히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엘프들은 대륙의 정세에 개 입해오지 않았다. 다만 관찰했을 뿐.
자신들의 영역인 중앙 대륙과 엘프의 숲, 그리고 세계수를 노리지만 않는다면 인류를 가만히 내버려뒀 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대륙에 개입 할 때가 있었다.
바로 흑마법사들이 활동할 때.
- 흑마법사들은 온 지성체의 적 이에요. 그들이 이렇게 큰 사태를 일으켰으니 . 막아야 해요.
공국 전쟁 당시 니디아가 그러했고, 제국 수도에 흑마법사들이 숨어 들었을 때 지원을 왔던 엘븐 가디언들이 그러했듯이.
엘리스는 이번에도 흑마법사를 막기 위해 움직일 참이었다.
- 엘븐 가디언들을 카렌에 보낼 참이었어요.
"카렌에 보내서, 어떻게 할 생각 이었지?"
- 라피엘 데이고르 카렌을 처형 할 생각이었지요.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배신자예요. 처단해 본보기를 보여야 하지요.
"뭐, 하긴 그렇지."
공국전쟁 때는 사령마법의 발동 이미수에 그쳤다. 그렇기에 일반 민중들은 사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라피엘은 사령마법의 발동을 성공시켰다. 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더 이상 엘프들도 음지에서 활동 하지 않으리라. 사태의 여파가 큰 만큼, 전면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 활동의 첫 번째는 카 렌 국왕의 목을 따는 것.
"그전에, 나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
- 도움이라… 그러고 보니, 한지훈 씨가 직접 도움을 요청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추고, 나직 이 힘주어 말했다.
"바네사를 찾을 거다."
- …바네사라고요? 설마 한지훈 씨는 바네사의 위치를 알고 있나요?
"그래."
수정구에서 놀란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놀랄 수밖에 없을 거다.
- 어떻게 바네사를… 저희들도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바네사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 그 막강한 정보력을 가진 엘프들조 차 실패한 일이었다.
피식 웃는다.
'역시 비밀정보 보상이 제일 유 용해.'
다른 그럴듯한 보상들을 거절하고, 비밀정보를 택했던 보람이 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바네사를 회유할 생각이군요? 한지훈 씨.
"맞아. 흑마법사의 활동을 억제해야하기도 하고…."
- 세계검을 완성시켜야 하니까 요.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 그녀는 본래 흑마법사였 지만, 흑마법사를 버리고 연금술의 길에 들어선 연금술사다.
그런 그녀의 정보를 왜 시스템은 2등급으로 책정했을까?
전시나리오에서 내 대적자였던 마이사 슈베츠조차 B등급에 불과했 는데 말이다.
그이유가 이것이었다.
"바네사 없이는 세계검을 만들 수 없지."
세계검을 만드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세계수의 가지와 수액, 엘프 여왕의 피, 요정 여왕의 날개, 고룡의 뼈, 막대한 양의 희귀금속들 등. 상 위의 '격'을 지닌 수많은 재료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재료들을 온전히 혼합 해 세계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백 마법과 흑마법 양측 모두의 막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혹마법과 백마법 모두에 능통한 건, 바네사뿐이고 말이야."
그렇기에 바네사는 세계검을 만 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흑마법 지식과 백마법 지식 양쪽 모두를 다룰 수 있는 인물은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
- …한지훈 씨. 엘븐 가디언들을 그쪽으로 보낼게요.
수정구 너머에서 엘리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반드시. 바네사를 우리 쪽으로 회유해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란 것. 이미 알고 있다.
나직이 물었다.
"누가 오는 거지?"
엘븐 가디언. 엘프들 중 최상의 무력을 달성한 절정의 강자들.
그들 중 누가 올까.
- 예전에 한번씩 다들 보았을 거예요.
내가 본 엘븐가디언들이라.
그리 많지 않다.
- 니디아, 마게브, 타냐.
엘프 정령사 니디아, 엘프 마법사 마게브, 엘프 검사 타냐.
- 지금 그쪽으로 갈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그때.
번쩍!
환한 빛무리가 터져 나온다.
"사령마법의 발현이 모두 완료되 었습니다."
"도합, 82만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하."
"많은 병력이로군."
라피엘 데이고르 카렌. 그는 널 찍한 옥좌 위에 앉아 고개를 주억였다.
커다란 풍채, 정열적인 붉은색 머리카락, 머리 위에는 황금색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
언뜻 당당하고도 고귀한 모습이다. 허나 그의 얼굴 표정은 당당이 란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80만의 민중이 목숨을 잃은 건가…"
80만의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하지만 온전한 병력은 아니었다.
민중의 목숨을 강제로 빼앗아 부리는 꼭두각시.
라피엘은 80만의 민중을 해쳐 80만의 병력을 쥐게 되었다.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군…. 라 피엘."
라피엘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문득 누가 나타났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예의 흑마법사였다.
"크라함…."
크라함. 볼라바아 학파의 종주.
그는 저벅저벅 걸어와, 라피엘의 앞에 섰다.
"80만의 병력을 쥐게 되었다.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됐다. 뭐가 문제지?"
"이렇게 해가면서까지 발악하고 싶진 않았다."
"네가 선택한 거다, 라피엘."
클클 웃는 크라함. 그가 질척한 웃음을 늘어뜨린다.
"뭐, 네가 선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너를 죽이고 꼭두각시를 세웠을 테지만 말이야."
라피엘은 입을 닫았다.
만약 라피엘이 흑마법사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크라함은 자신을 죽 인 뒤 조종해 이 나라를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라피엘의 선택은 강제 적이었다. 그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흑마법사에게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80만이 희생되었지만 말이다.
"곧 엘프들이, 그리고 이름 없는 별이 움직이겠군."
크라함이 고개돌려 다시금 걸어 나간다.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한스."
"한스 요한바르첸. 크라함 님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그러자 기둥 뒤, 음영 진 곳에서 걸어 나오는 한스. 크라함이 나직이 말한다.
"병력을 주겠다."
"무언가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엘프와 한지훈이 움직일 거다. 너는 놈들을 견제하라."
한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크라함 이 이어 말한다.
"분명 놈들은 바네사를 노리겠지."
한때 자신의 제자였기에, 그녀의 소재를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다.
카렌은 그녀가 나고 자랐던 국가. 바네사는 카렌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한지훈과 엘프는 우리의 사령군단을 막기 위해 바네사를 회유하고 자 할 거다."
전의 시나리오를 알고 있기에 내 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바네사. 흑마법사에서 전향해 연합 측에 붙은 배신자.
그들은 바네사를 회유해, 보다 유리하게 흑마법사들을 상대하려 하리라.
그렇게 놔둘 순 없다.
"엘프와 한지훈의 활동을 예의주시해라. 놈들이 향하는 곳에는 바네 사가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크라함 님."
한스가 고개를 깊이 숙이고, 크 라함은 클클 웃는다.
"바네사를 찾아내, 죽여버려."
크라함은 바네사를 살려둘 생각 이 없었다.
흑마법사 세력의 정보망이, 카렌 본토 곳곳으로 뻗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