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전하."
커다란 알현실 안. 한 고위 관료 가 허리를 깊숙이 숙여 고개를 조 아렸다.
그가 입을 열어 고한다.
"각지에서 징병 조치가 거의 완료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래…."
관료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카렌 왕국의 국왕. 라피엘 데 이고르 카렌.
카렌은 패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동부 침공군은 모조리 전멸. 남부 침공군은 보급망이 차단되어 고 사해가는 중.
카렌은 항전을 위해 병력을 징집 하고 있었다.
"50만의 추가 병력을 편성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하."
왕국 각지에서 징집한 병력은 무려 50만에 달했다.
50만. 무시무시한 규모.
검을 쥐고 휘두를 수 있는 나이 가 된 사내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 둔 것이다. 그 수가 몹시 많은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라피엘은 알고 있었다.
"그 모두가 허수이지. 안 그러나? 딜라민."
딜라민 전쟁부 장관은 고개를 끄 덕였다.
50만의 병력을 징집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검을 제대로 휘두른 경험 조차 없는, 말 그대로 일반 국민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무장시킬 병기도, 먹여 살릴 군량도 극도로 부족할 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50만의 병참을 지원할 여력이 지금 카렌에게는 없었다.
군인 하나를 운용하는 데는 그들 이 장비할 무기, 보호할 갑주와 투 구, 그리고 먹고 마실 식량과 그것 들을 수송시킬 말과 마차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카렌은 그것들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기껏해야 농기구나 휘적거리며 싸우게 되겠군."
"전하."
"남아있는 정규군 병력은 고작해 야 4만.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아 징 집해, 무장조차 갖추지 않은 고기방패가 50만인가…."
고기방패. 라피엘은 징집병을 그리 칭했다.
사실 그이상으로 징집병들의 처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었다.
제대로 된 병장기도, 갑주도, 심 지어 군복조차 지급받지 않고. 굶으며 맨몸을 던져야 하는 이들이 고기방패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어쩌다 우리 카렌이 이렇게 된 것인지."
카렌 왕국.
과거 정복전쟁 이전에는 대륙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던 열강국가였고, 정복전쟁 이후 커다란 영토를 잃었음에도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 던 국가였다.
하지만 지금의 카렌 왕국은 과거에 비해 너무나도 약화되었다.
진군을 앞두고 있는 제국군 군대. 부족한 병장기와 식량. 닥치는 대로 징집해 만든 오합지졸 부대.
물론 문제가 그뿐일 리 없다.
"전쟁부 장관 딜라민 레바일데. 솔직하게 답하라."
"예, 전하. 무엇이든지 물어보시 옵소서."
"탈주한 병력의 수는?"
딜라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차마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없었기 에.
"어서.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재촉하는 라피엘. 그에 딜라민은 한참동안 침음을 삼키고는, 간신히 대답했다.
"반수가… 도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도주하고 있지요.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징집병의 수는 채 20만이 안될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제아무리 정보를 차단하고 강력 하게 통제하고자 한들, 징집병에게도 눈과 귀가 있다. 그들은 닥쳐오는 패전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었다.
이미 패배가 확실시 된 전쟁에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인물이 얼마나 있겠는가.
"애초 4만의 정규군으로 50만 징 집병을 통제하기엔 힘들지."
평소였다면.
카렌이 이전처럼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정규군과 똑같은 장비 와 무구를 나눠주고, 정규군과 똑같 은 식량을 배급해 줬다면. 그리고 그들을 통제할 군관과 병사들의 수 가 이전처럼 많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정규군의 수는 고작해야 4만. 물자는 바닥. 패전을 앞둬 사기 또한 극미하니.
50만 징집병을 통제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지금 보아하니, 대신들 의 수가 훨씬 적어졌군 그래."
저벅. 라피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주위를 둘러본다.
커다랗고도 화려한 왕궁의 알현실. 본래는 수많은 고위 대신들이 북적거리며 전쟁을, 그리고 국가의 대사를 살피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 알현실에 자리한 인물 들의 수는 이전보다도 훨씬 적어져 있었다. 그저 측근인 장관과 차관 몇, 그리고 고위 관료들이 드문드문 자리해 있을 뿐.
"모두 도망쳤겠지."
그리 어렵지 않은 추측이다.
병사들이 도주하는 것처럼, 대신 과 관료들 또한 망명했을 것이다. 지금쯤 그들은 재산을 바리바리 싸 들고 접경 우호국인 람셀이나 트웨 인으로 향하고 있을 터.
"그래. 결국 이렇게 끝나는군."
라피엘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침공군은 전멸했거나 혹은 전멸 예정. 측근인 왕실 기사단과 근위군단을 잃었으며, 병참은 감당 불가. 심지어 고위 관료들마저 하나둘 망명하고 있으니 .
완벽한 멸망이 목전이다.
라피엘은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승리할 방책이, 아니,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그때였다.
"벌써 포기하기엔 아깝지 않나. 라피엘 데이고르 카렌."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석퍼석하게 갈라져 기분 나쁘 고도 불길한 목소리였다.
"무슨…?!"
"누구냐! 누가 감히 전하께…!"
알현실 내부에 자리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 곳으로 향한다.
방금 전 목소리가 들려왔던 장소.
알현실의 기둥 뒤, 화려한 샹들 리에의 빛이 닿지 않아 음영진 곳. 그곳에서 한명의 사람이 걸어 나온다.
저벅. 하고 울리는 적막한 발소 리.
"라피엘. 힘을 주마."
"… 맙소사!"
그리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그곳에 있었기에.
"흑마법사다! 어떻게 여길…!"
"경비병! 아니, 기사! 당장 기사 를 불러와!"
"저놈을 제압하라!"
대신들이 고성을 내지르고, 알현실을 경비하고 있던 왕실 기사 십 수명이 오러를 줄기차게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물론 흑마법사는 약하지 않다.
화르르르르륵!
"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
흑마법사를 중심으로 검푸른 불 길이 치솟고, 달려들던 기사들을 휩 쓸었다. 기사들이 순식간에 회색 재 로 화해 바람에 쓸려나갔다.
기사들의 재를 밟고 여유롭게 알현실 중앙까지 나서는 흑마법사.
"내 이름은 크라함."
타닥거리는 불타는 소리를 뒤로 한 채. 그의 목소리가 알현실을 웅 웅 울린다.
"흑마법사 학파 볼라바아의 종주 이자,"
저벅. 저벅. 그가 여유롭게 걸어 라피엘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네 구원자다."
흑마법사가 검은색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그의 붉은색 눈동자. 기기괴괴하게 아로새겨진 검은색 문신들.
"카렌 전 민중의 목숨을 내놔라. 그렇다면 네 대신 내가 제국을 멸망시켜주지."
크라함의 입가에 질척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흑마법사들이 카렌 왕국에서 흑 마법을 발현하고 있습니다!"
제국 황궁의 알현실. 그곳은 지금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베텔랑! 라베티아! 오르크로벤!"
"다수의 도시들에서 흑마법이 발현! 사령술식으로 추정됩니다!"
그만큼 무수히 많은 소식들이 들 이닥치고 있었기 때문에.
- 네베르탄에서도 혹마법의 발현을 확인했습니다.
- 잠입했던 밀정들의 연락이 하나둘 끊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고해온 것은 하늘에 떠오른 광역 흑마법진….
"게르도폴에서 흑마법사가 목격 되었다는 첩보입니다!"
군관들이 달려와 보고하고, 설치 해두었던 비콘에서는 쉴새없이 급 박한 소식이 들려온다.
모두 카렌 왕국에 관련된 소식이었다.
제국의 황제, 아르테니아는 나직 이중얼거렸다.
"흑마법사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려 하는군."
쯧. 그는 혀를 차며 지도를 바라 본다.
남부대륙 전체를 표기해 놓은 커다란 전략지도.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검은색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모두 혹마법이 발현되거나, 혹은 흑마법사의 관측이 확인된 지점들 이었다.
"라피엘. 놈은 흑마법사들에게 카 렌을 바친 것인가."
황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사령마법. 산 사람을 죽은 사람 으로 만들어 부리는, 흑마법사들의 사악한 마법이다.
그리고 그 사령마법이 카렌의 여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현 되고 있다.
국왕의 전폭적인 협조가 없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다. 흑마법사들은 기괴하고도 강력하나, 그렇다 한들 저토록 많은 도시들을 동시에 공작을 벌일 수 있을 정도 로 커다란 세력은 아니었으니까.
"폐하."
황제가 지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황제가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입을 연인물은 다름 아닌 마법성 장관 우르겔이었다.
그가 나직이 이어 말한다.
"결단을 하실 때입니다."
"결단이라."
"흑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우르겔은 황제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기를 촉구하고 있었다.
다수의 도시에서 흑마법사의 사령마법이 발현되었다. 그 말인 즉 무려 수십만, 어쩌면 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흑마법사의 꼭두각시가 되어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일 터.
"도시소각 명령을 내리시지요."
도시소각. 그것이 흑마법사들을 상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불은 정화의 기운을 담고 있다. 그리고 흑마법사는 인간의 목숨을 대가로 사악한 마법을 발현시키는 존재.
도시를 불태워 사악한 기운을 몰 아내 정화한다면, 흑마법사들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다.
"오직 도시소각만이 유일한 방책 입니다. 폐하."
그렇기에 우르겔은 황제에게 도시소각을 권고했다.
도시를 불태우라고. 산 사람, 죽 은 사람, 죽어 조종당하는 사람. 그 모두를 태워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후우…."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알고 있다. 흑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도시 그 자체를 불살라, 그들이 마법을 발현하지 못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황제가 나직이 읊조린다.
"우르겔."
"예. 폐하."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 지."
황제는 과거를 떠올린다.
그리 먼 과거는 아니다. 공국전 쟁. 요한바르첸 공작이 흑마법사와 손잡아 제국을 상대했을 때.
황제는 그때를 떠올린다.
"그때는 다행히 도시를 소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한지훈이 사령마법 진을 파훼해준 덕분이었지."
당시 한지훈 백인장은 도시의 중심지까지 은밀히 잠입. 저택 지하에 설치된 사령마법진을 완벽히 파훼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활약을 기대할 수 없군."
황제의 눈동자가 다시금 지도로 향한다.
카렌의 수많은 도시들에서 발현 된 흑마법들. 그 수는 결코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막을 수 없다.
"우르겔."
"예,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북부전선으로 보낼 수 있는 전투마법사들의 수를 헤아려 내게 보고하라. 이미 퇴역한 전투마법사들 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명을 받듭니다. 황제 폐하."
황제는 소각작전을 준비한다.
"국방성 장관."
"국방성 장관 카디르. 황제 폐하 의 명을 기다립니다."
"카렌의 남부군을 전멸시키고, 북부 야전군을 모두 합류시켜 카렌 본토로 진격시키는데 얼마나 걸리 지'?"
"카렌 남부침공군은 거의 궤멸상 태입니다. 폐하. 서두른다면 카렌 잔당 사냥에 삼일, 합류에 이틀이 소요될 것입니다."
"계획을 짜내서 내게 보고하게. 다음으로 재무성 장관…."
황제는 휘하 관료들에게 하나하나 지시하기 시작했다.
곧 소각 작전이 시작된다.
불바다가 펼쳐질 것이다.
"카렌이 흑마법사의 손에 넘어갔다."
새벽녘. 오스카의 호출에 나는 군단장 막사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스카를 비롯한 세 명의 장 성들.
그들이 내게 자리를 권하고, 나는 착석했다. 회의가 시작된다.
"제국 국방성에서 정보를 보내줬다. 다들 읽어보지."
오스카가 손짓하고, 병사가 서류 를 나눠준다. 나는 그것을 받아 읽 어보았다.
내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카렌 놈들. 미쳤군요."
"그래. 미쳤어. 흑마법사 놈들과 손을 잡다니 말이야."
오스카가 내 말에 수긍해 고개를 주억였다. 그의 얼굴에는 심각한 기 색이 떠올라 있었다.
"최소 팔십 만이다."
카렌 왕국의 국왕, 라피엘 데이 고르 카렌.
놈은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 사령마법을 발동시켜 대량의 꼭두 각시 인형을 손에 넣었다.
그 수가 대략 팔십만.
"먹지도, 자지도, 지치지도 않은 적병이 무려 팔십 만이다."
"빌어 처먹게 많은 수군."
"흑마법사들이 사령마법을 발동 한 도시는 베텔랑, 라베티아, 오르 크로벤, 네베르탄, 게르도폴…."
"모두 수도까지의 진군 경로다."
"제국 국방성에서는 소각 작전을 지시하더군."
군단장들이 심각한 얼굴로 회의 를 이어나갔다.
팔십 만. 너무나 많은 대량의 군 세. 물론 그들은 말 그대로 꼭두각 시다. 달릴 수 없고,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전투력은 당연히 밑바닥에 불과하니.
허나 그토록 약한 존재라 한들 팔십 만이나 있다. 아무리 제국 북부야전군의 수가 무려 이십 만에 달한다 한들, 절대 방심할 수 없다.
그렇게 그들이 회의를 이어나가 고 있을 때였다.
"한지훈. 자네는 아무 말도 안하는군."
문득, 오스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자네는 무언가 의견이 없나?"
오스카는 내가 무어라 말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그동안 여러 번이나 흑마법사들을 대적한 나다. 내가 무언가 뾰족한 방책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리고, 다행히도.
오스카의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오스카 군단장 각하. 아니, 오스카."
아직 평대가 익숙치않다.
"내게 방법이 있다."
"방법이라. 자네 표정을 보니, 꽤 효과적인 방법일 것 같은데."
"그래. 잘한다면 팔십 만의 사자 들을 단숨에 무력화 시킬 수 있다."
"그게 정말인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오스카와 주위의 군관들. 나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 팔십 만 사자, 무력화 시킬 수 있어."
과거. 내가 현실에 있었을 적. 나는 크라함과 연합했고, 수많은 군단을 지휘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적 지 않은 수가 바로 사령마법으로 되살아난 죽은 자들이었으니 .
놈들을 지휘했던 만큼, 놈들의 약점 또한. 정확히 알고 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면 좋겠는데 ."
"일주일이라. 정말 일주일의 여유 만 있다면, 사자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는 건가?"
"이미 죽은 존재들이니…. 죽인다 기보단, 무력화 시킨다는 말이 맞지 만 말이야."
나는 시선을 돌려 시야 구석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몹시 오랜만에 보는, 어떤 홀로그램이 떠올라 있었다.
[2등급 비밀 정보.]
이전, 내 모든 능력치가 50을 넘 었을 적 얻었던 보상.
2등급 비밀 정보.
그걸 활용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