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참 신기하군요."
고기를 굽고, 술판이 열린다.
뒤랑텅 보급기지에 있던 병사와 장교들이 오랜만에 피로를 풀었다.
"엊그제만 해도 십인장이었던 분 이, 벌써 군단장이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중심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내 군단장 진급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회식이었기 때문에.
카일. 내가 이 세상에 와 처음으로 보았던 병사.
녀석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믿기지 않는데 ."
술잔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주위 를 둘러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얼굴들.
카일과 엘락을 비롯한 내 휘하 천인대에 소속된 이들. 그들이 병사 장교 할 것 없이 술잔을 마주하고 있었다.
"군단장이라."
멍하니 중얼거려본다.
군단장. 일개 군단을 통솔하는 장군. 장성급 장교.
드디어 도달했다.
"이렇게 빠르게 군단장이 될 줄 은 몰랐는데 ."
나는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를 플레이 할 적을 떠올렸다.
당시 내가 군단장에 도달한 것은 협상동맹의 침공을 제국이 무찔러 전쟁이 끝난 뒤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군단 장에 도달했다.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의 시나리오보다도 훨씬 빠른 진급.
문득 카일이 말한다.
"그럼. 이제 군단장 각하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그렇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내 제국군 정복 가슴팍을 바라봤다.
본래라면 천인장 계급장이 박혀 있는 자리. 그곳에는 반짝이는 별 하나가 박혀있었다.
군단장을 의미하는 하얀색 별.
내 진급이 비로소 승인되었기에, 군단장 계급장을 달 수 있게 되었다.
"뭐. 아직 내 군단은 없지만."
군단의 편성이 완료되지 않았기 에, 지금은 계급장만 군단장이지만. 곧 내가 지휘할 군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연회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 있었군. 한지훈."
누군가 우리 천인대 막사에 찾아 왔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오스카 군단장 각하. 그리고 베 르겐 기사단장 각하시군요."
공국전쟁 시절부터 보아왔던 인물들. 오스카, 베르겐. 그 둘이 내 막사로 찾아온 것이다.
오스카와 베르겐이 내 주변에 앉 는다.
"군단장 진급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오스카 군단장 각하."
"한지훈."
툭툭, 내 어깨를 두드리는 오스카.
그가 미소 지으며 고했다.
"자네는 이제 군단장이다. 편히 말하게."
"맞다. 네 녀석도 단장위에 이르렀으니 . 쓸데없는 존칭을 붙일 필요는 없지."
"그럼 무어라 말합니까?"
오스카와 베르겐의 말에, 나는 그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지금 나는 군단장이 되었다. 그렇다 한들 다른 단장들에게 쉽게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저들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경력 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에 베르겐이 씩 웃는다.
"그냥 편히 말하게."
"그건 제가 불편합니다만. 베르겐 님."
"그 '님'자도 빼버리게."
아무래도 오스카와 베르겐은, 내가 평대를 쓰길 원하는 것 같다.
"한지훈. 나는 어떤 직감이 들었 네."
문득 입을 여는 베르겐.
그가 나직이 고한다.
"자네는 군단장에서 멈추지 않을 거야. 계속해 전공을 세우고, 승리 하여 , 빠르게 위로 올라가겠지."
아무래도 베르겐은, 내가 군단장에서 멈추지 않고 올라가리라 여기는 듯했다.
"군단장을 넘어 야전군 사령관, 야전군 사령관을 넘어 집단군 사령관… 어쩌면 국방성 장관에 이를지 도 모르겠군."
맞는 말이다.
과거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에서 나는 군단장을 넘어 야전사령관까지 올라섰다. 게다가 지금은 이전 게임 시나리오보다도 더욱 가파르 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니.
집단군 사령관, 그리고 국방성 장관이라. 내 능력이라면 충분히 될 수 있다.
"언젠가는 출세해 우리를 직접 지휘하게 될 거다. 그때 하급자인 우리 단장들에게 존대를 할 순 없지 않나?"
픽 웃음이 나왔다.
저들은 벌써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이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하긴. 이토록 젊은 나이에 벌써 군단장이 되었다. 수많은 전공을 세 웠다. 영웅훈장을 추서 받았다. 황제의 전폭적인 신뢰마저 받고 있다.
출세 속도가 몹시 빠른 것은 자 명한 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오스카, 베르겐."
"그래. 그거면 된 거야. 그것보다도… 자, 이거 받게."
바스락. 오스카가 품속에서 어떤 서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자네의 북부 제13군단이 곧 완성될 걸세. 일주일 내에, 군단장 취 임식과 함께 13군단 창설식을 진행 하게 되겠지."
서류를 받아들어 살펴봤다.
서류에는 나를 북부 제13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한다는 것과, 곧 군단의 창설이 완료될 것이라는 소식 이 기재되어 있었다.
"자네의 13군단이 완전히 창설되는 대로 우리 군단은 바로 북진할 걸세."
나는 고개를 들어 오스카를 바라 봤다. 그의 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동안 수고했다, 한지훈. 다시 한번 축하하지. 이제부터는 동등한 군단장이군."
드륵. 오스카와 베르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손을 뻗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한지훈 군단장."
"이쪽이야 말로 ."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그렇게 나는 군단장이 되었다.
연회가 끝나고. 나는 천인장 막 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 니 예상 외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지훈 씨."
"…니디아."
니디아. 초록색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엘프 여인. 위대한 하이엘프. 엘븐 가디언.
그녀가 내 막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나는 침대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숨어든 거지? 경계하는 병사들이 많았을 텐데."
"황실까지 숨어들어간 게 저에요. 이깟 부대에 몰래 들어오는 게 힘 들 것 같아요?"
"뭐. 그렇긴 하지."
나는 허리춤에 찬 검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네가 아무런 이유 없이 왔을 리는 없겠고."
이전부터 여러 번이나 니디아와 마주해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마 다 무언가 소식을 전해주고는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 그녀는 내게 어떤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자리에 왔을 것이리라.
그녀가 싱긋 웃는다.
"어머, 너무 급하시네요."
타박타박 걸어 의자 위에 앉는 니디아.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먼저, 군단장 진급 축하해요."
"…벌써 알아낸 건가."
"엘프의 정보력은 세계 제일이에 요. 그쪽도 잘 아시잖아요?"
알다마다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머리를 더듬었다.
"내게 붙여둔 요정들이 알려줬겠지."
"정답이에요."
실실 웃는 니디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에게 묻는다.
"그래서. 용건은?"
"한지훈 씨. 혹시 관리자의 시나리오 개입. 왜 일어나는지 아세 요?"
분명 내가 먼저 물었으나, 니디 아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해 왔다.
관리자의 개입이 어째서 일어나는 것이냐고.
그에 나는 답한다.
"내 게임 클리어를 막기 위해 서?"
확신은 아니었다. 그저 겪어왔던 경험들에 의한 추측.
그동안 시나리오가 비틀릴 때는, 내가 순조롭게 성장하는 와중이었다. 시나리오가 비틀려 내게 시련과 역경을 부여했다.
때문에 나는 시나리오가 비틀리는 이유는, 유저인 내가 쉽게 이 세상을 클리어 할 수 없도록 막는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틀린 대답이었을까.
"전혀 아니에요. 한지훈 씨."
니디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나는 되묻는다.
"틀렸다면. 그럼 너희 엘프들은 시나리오 관리자가 개입하는 이유 를 알고 있다는 건가?"
"네. 당연히 알고 있지요."
"뭔데?"
시나리오가 비틀리는 이유. 과연 무엇일까.
그에 니디아는 대답한다.
"그건 이 세상의 '반발력' 때문이 에요."
"반발력?"
"네. 한지훈 씨도 아시다시피, 그쪽의 행동에 따라 기존 시나리오에서 상당히 많은 게 바뀌었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세상에 떨어진 뒤. 이전 과는 다른 선택을 많이 해왔다.
황제를 적대하지 않고, 엘프와 동맹을 맺는 등. 이전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행보.
"관리자는 시나리오가 기존대로 흘러가는 것을 원해요."
그녀는 그리 말했다.
그에 절로 내 표정이 찌푸려진다.
"그렇다면.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입해오는 이유는, 내가 이전 시나리오와 다른 행동을 해왔기 때문에?"
"맞아요."
그녀는 그리 수긍했다.
나는 천천히 과거 기억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블랙 오케스트라의 플레이 기록과, 내가 이 세상에 떨어 지고 난 뒤 걸어온 길을.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생각해보세요, 한지훈 씨. 관리 자가 시나리오에 개입할 때는 항상 이전과 다른 일이 일어났을 때였어 요."
확실히 그러했다.
내가 무언가 다른 선택을 하고 기존 시나리오에서 멀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관리자가 개입해왔다.
"한지훈 씨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백인장으로 승급했을 때, 시나리오는 공국의 침공 시기를 앞당겼 죠."
나는 무능한 백인장인 갈렌을 죽게 냅둬, 백인장으로 승급할 수 있었다.
그러자 공국의 침공시기가 앞당 겨 졌다.
"갈레이 요새가 훨씬 일찍 함락 당하자, 관리자는 그곳에 흑마법사 와 암흑기사들을 보냈죠."
내가 개인의 무력을 십분 발휘해 갈레이 요새 함락에 기여했다.
그러자 관리자는 그곳에 크라함을 비롯한 흑마법사 세력을 투입했다.
"제국 수도 침공 때도 마찬가지 에요. 한지훈 씨,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황제와 적대하고. 결국 제국을 집어삼켰었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제국을 배신하지 않고 함께 가고자 결정했어요. 그렇죠?"
"그렇지."
"그래서 시스템 관리자가 개입한 거예요. 한지훈 씨가 본래 제국을 적대했던 원래 시나리오대로 돌려 놓기 위해. 제국의 고위귀족들을 조 종한 거라고요."
그 말인 즉. 내가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고, 기존 시나리오와 달라질 때마다. 관리자가 개입해온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제 한지훈 씨는 군단 장이 되었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장이 되었다. 이전 게임 속 시나리오보다도 훨씬 빠른 진급.
과거 게임 속에서 나는, 협상동 맹과의 전쟁이 끝난 뒤에나 군단장 으로 진급했었다.
"그러니 관리자가 또다시 시나리오에 개입해 올 거예요."
때문에 니디아는 다시금 시나리오가 비틀릴 것임을 예상했다.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관리자가 개입해온다면. 언제쯤이지?"
"곧, 이에요."
터벅, 터벅. 그녀는 천천히 걸어 가 천인장 막사의 입구 천막을 걷었다. 그러자 막사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
"오늘 밤은 만월이에요."
"만월이라. 확실히."
그녀의 중얼거림을 따라 나 또한 밤하늘을 바라봤다. 어둑한 밤하늘 위, 커다란 달이 드높게 떠올라 은 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달은 광기를 상징하는 천체이지 요."
그리고 그 광기를 추종하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흑마법사들이다.
그녀가 나직이 말한다.
"사실. 저희 여왕님께서 흑마법사 들의 활동을 예견하셨어요."
"흑마법사들의 활동이라."
"카렌에 커다란 일이 생길 거에요."
나는 그녀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도, 내 영지 루벤도 아닌. 카 렌에 커다란 일이 일어난다라.
"많은 수의 흑마법사들이 카렌의 영토에 숨어들었어요. 그들이 곧 미친 짓을 벌이겠지요."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말 그대로 미친 짓이지요."
니디아는 천막을 쥔 손을 놓았다. 그러자 스르륵 닫히는 막사 입구.
"한지훈 씨, 조심하세요. 이번 이 변은 이전보다도 그 규모가 훨씬 커다랄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많은 사람이 죽을 거예요."
나는 무어라 되물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니디아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그녀는 니디아가 아니다. 니디아의 몸을 빌려 엘프 여왕 엘 리스가 말하고 있을 뿐.
"아무리 적어도 수만, 많다면 수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흑마법사 들에게 희생될 거예요."
엘리스는 그리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라고. 흑마법사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 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묻는다.
"흑마법사들. 지금 뭘 하고 있지?"
"카렌에 공작을 벌이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슨 공작?"
"곧 알게 되실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그때.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했다는 홀로그램.
쯧, 혀를 찼다.
"염병할 시나리오 관리자."
니디아에 의해 관리자가 개입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놀람은 없었다. 그저 짜증났을 뿐.
하지만 직후.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입합니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시스템 관리자가…]
무수히 많은 수의 홀로그램이 떠 올라 내 시야를 잠식해간다.
"한지훈 씨. 카렌은 이미 흑마법사들의 손에 넘어갔어요."
시선을 돌려 엘리스를 바라봤다. 떠오른 홀로그램 너머 그녀는, 너무나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광기가 점차 강해지고 있어요."
이번 전쟁. 내 예상보다도 훨씬 힘들어 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