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176화 (176/390)

176화.

"나는 대답해주고 싶지 않군."

데이비드의 입이 열렸다.

그의 대답에 절로 내 미간이 찌푸려진다.

"대답해주고 싶지 않다니.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 대답하기 싫다는 거다. 한지훈 군단장."

무엇이 그리 재밌는 것일까.

피식, 데이비드가 웃었다.

"물론, 무어라 말해줄 수는 있지. 패배하더라도 도리를 저버리지 마 라. 혹은 오직 승리만을 위해 전쟁에 임하라… 하지만, 그런 말을 굳이 내가 해줄 필요가 있나?"

저벅, 저벅. 데이비드가 천천히 걸어 이쪽으로 다가온다.

"자네는 더 이상 일개 영관급 장 교가 아니다. 무려 이만의 장병을 책임지는 장군이 된 거다."

장군將軍. 말 그대로 군의 앞을 내다보고, 통솔하는 이.

"이만."

데이비드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억센 힘이 내 어깨로 파고들었다.

"이어깨 위에 이만 장병의 목숨 이달려있는 거다. 그런 인물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휘둘려서야 되겠 는가?"

그가 손을 내린다. 나는 시선을 바로 해 그를 주시한다.

"장성이란 군단의 정점에서 항상 고뇌하는 존재다."

화륵. 데이비드가 연초를 입에 꼬나물고 불을 붙였다. 회색 연기가 피어오른다.

"네 사소한 명령 하나에 적게는 십 수명, 많게는 수만의 목숨이 좌우된다. 그렇기에 군단장은 항상 고뇌해야 한다. 어떻게 군단을 움직 일지, 어찌 전쟁을 이끌어갈지 말이다."

이미 블랙 오케스트라에서 지긋 지긋하게 겪어보았다.

사소한 명령 실수로 병사들이 죽었다. 때로는 십인대, 혹은 백인대. 간간히 천인대에 달하는 병력이 전 멸했다.

그만큼 군단장이라는 자리는 중 책이었다.

작은 명령으로 병력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한지훈. 장성급 장교와 영관급 장교의 가장 큰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영관과 장성의 차이라.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대답했다.

"보는 것이 다릅니다."

"보는 것이 다르다면. 정확히 무엇이 다르지?"

"영관이 전장을 본다면. 장성은 전쟁을 봅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은 듯했다.

나는 이어 말한다.

"역할이 다릅니다."

"역할이라… 구체적으론?"

"장성은 결정하고 지시합니다. 장 성 아래 영관 이하는 수행합니다."

"바로 맞췄다."

흡족한 표정을 짓는 데이비드.

그가 연초 연기를 훅 내쉬고는 이어 말했다.

"자네 말대로, 장성과 그 아래 장교는 맡은 역할이 다르지."

데이비드의 시선이 지도로 향한다. 지도 위에 올려져 있는 내 장 기말들.

그는 그것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여기 천인장이 있다."

그는 천인대 장기말을 들어올려, 요리조리 살펴본다.

"영관급 장교인 천인장은 수동적 이다. 그들은 명령을 받아들여 현장에서 수행하지. 장성이 지시한 전술 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병력을 지휘하는 것 이다."

데이비드가 장기말을 내려놓고, 다음 장기말을 들어올렸다.

"여기 군단장이 있다."

이번에 그가 들어 올린 것은 군단지휘부 장기말.

"군단장은 능동적이다. 전술적 목표가 아닌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직에 임하며. 진정 국가에게 무엇이 이로운지를 스스로 생각하 며 움직인다."

달칵. 그가 장기말을 내려놓는다.

데이비드가 눈을 마주치며, 묵직 한 목소리로 고했다.

"생각하지 않는 장성은 장성이 아니다. 그저 명령을 받아 움직일 뿐이라면. 일개 영관급과 다를 바 없지."

그제야 나는 데이비드가 말하고 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 결정하 기를 바라고 있다.

"전쟁을 하다보면 많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지. 그때마다 자네는 고뇌하고, 결정하고, 지시해야 한다."

촤라락. 데이비드가 지도 위장 기말을 헝클어트리고는, 다시 배치 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승리를 위해 잔혹한 명령을 내리게 될 때가 있다."

나는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의 경험을 하나둘 떠올려본다.

"민간인들을 죽이게 될 수도 있고."

["각하! 이 도시에는 수천의 민간 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죽이라는 말입니까?!"]

"명령에 불복하는 휘하 군관을 처형해야 할 때도 있다."

["… 당신은 악마야. 피도 눈물도 없는 개자식! 한지훈, 나는 네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

"반대로 상관의 지시를 어겨야 할때도 있지."

["흑마법사 놈들은 인류의 적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녀석과의 관계 를 끊게, 한지훈."]

"때때로, 전투의 승리를 위해 희생양을 밀어 넣을 때도 있다."

["저희만으로는 이곳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원군을 투입해주십시 오!"]

"끝없이 고민하게. 한지훈."

달칵. 데이비드가 마침내 마지막 장기말, 군단 지휘부를 배치했다.

나는 시선을 내려 지도 위를 바라본다.

그는 장기말들을 하나둘 모아, 평범한 군단 진군대형을 만들어 두었다.

"인의를 버리고 승리를 원하나, 혹은 도리를 지키며 전쟁을 하나.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자네 여야 하네. 그러기 위해 있는 것이 군단장이라는 자리이니까."

즉. 자신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라는 소리다.

왜냐하면 군단장이니까.

명령받는 존재가 아닌 지시하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군단장 각하."

"그래."

그에 마주서서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비드.

그가 피식 웃는다.

"그럼, 연회나 즐기러 가지. 지금 쯤이면 준비가 모두 끝났을 걸세."

데이비드가 회의실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그를 뒤따라갔다.

어느새 밖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 가 풍기고 있었다.

- 카앙!

날카로운 소음이 울린다.

- 카앙!

소음의 정체는 한 드워프가 망치를 휘두르는 소리였다.

- 카앙!

회색망치 부족의 족장, 드루바.

그는 하나의 검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카앙!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음. 불꽃이 튀기고, 은은한 마나의 잔향이 일렁인다.

드루바는 한창 단조작업을 진행 한 검을 물속에 남궜다.

열처리. 다른 말로는 담금질.

치이이이익!

수증기가 확 일어나며 순식간에 시야가 뿌예진다.

드루바는 물속에서 검신을 꺼내 들고는, 나직이 읊조렸다.

"완성이 그리 머지않았다."

그의 시선이 미완의 장검으로 향 한다.

너무나 고급스러운 장검이었다.

매끄러운 검신, 날카로운 검날.

검신의 혈조에는 기기괴괴한 마나회로가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었 으며, 검신 전체를 이루는 금속은 그 품질을 증명하듯 너무나 환한 광택을 발했다.

분명 아직 미완이었음에도, 벌써 부터 고급스러운 빛을 발하는 장검.

"그래. 곧 완성이야."

그것을 바라보니, 절로 인자한 미소가 지어지는 드루바였다.

그는 다시금 검을 화로에 넣고, 재차 단조작업을 진행하려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족장님!"

벌컥!

문이 열리고, 어떤 인영이 공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에 표정을 찌푸리며 문쪽 방향을 바라보는 드루바.

그가 쯧 혀를 차며 말한다.

"브릴리. 내가 작업 중일 때는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던 것. 벌써 까먹었나?"

난입한 인물은 휘하 드워프 부족 원, 브릴리였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기색 따위 전혀 상관없다는 듯. 브릴리는 호들 갑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족장님! 소식 들으셨슴까?!"

"무슨 소식?"

화로에서 검을 꺼내 모루위에 올려놓은 드루바. 그는 브릴리의 말을 흘려 넘기며 다시금 작업을 계속하 려한다.

하지만 곧, 그는 우뚝 동작을 멈 출 수밖에 없었다.

"한지훈! 영주 한지훈이 군단장 이 되었답니다!"

"… 뭐? 그게 정말인가?"

드루바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가 브릴리에게로 향한다. 브릴리가 이어 말했다.

"정말임다! 루베가 직접 알려준 소식이란 말입니다!"

"허."

드루바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고작 이십 대중반의 나이로 군단장이라. 너무나 빠른 진급이었으니 .

하지만 곧 수긍할 수 있었다.

"하긴. 그 한지훈이다. 그동안 세 웠던 전공과 개인의 무력을 생각한 다면.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지."

한지훈. 제국의 영웅이자, 이곳 루벤의 영주.

분명 그는 많은 전공을 세웠다.

고작 일개 십인장이던 시절부터, 공국전쟁과 제국수도 습격, 더해 협 상동맹의 침공까지. 왕성히 활동하며 여러 업적을 세웠으니 .

벌써 군단장에 이른 것. 그리 납 득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드루바는 다시금 작업을 진행했다.

- 카앙!

그의 망치가 휘둘러지고, 불꽃이 튀었다. 검신의 모양이 다시금 잡혀 간다.

뒤에서 멍하니 보고 있던 브릴리 가입을 열었다.

"족장님. 그 검, 곧 완성 아닙니까?"

"그래."

- 카앙!

쇳소리. 뚝뚝 흐르는 드루바의 땀방울.

브릴리는 드루바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중얼거린다.

"드디어 완성입니까… 엄청 오랫동안 공들이신 아티팩트 아닙니까."

"그렇지."

- 카앙!

다시금 울리는 쇳소리.

지금 드루바가 만들고 있는 장검 은, 그가 이곳 루벤에 정착하기도 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왔던 아티팩트 장검이었다.

드워프 족장인 자신이 그야말로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드는 검.

그것의 완성이 그리 머지않았다.

"한지훈 덕분이군요."

"그래. 광물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 카앙!

모두 한지훈 덕분이었다.

그가 루벤에서 여러 희귀광물 자원을 찾아낸 덕분에. 아다만티움, 오리할콘, 미스릴 광산을 얻은 덕분 에. 마침내 검을 계속해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브릴리는 드루바가 제작하고 있는 검을 바라본다.

아직 미완성임에도 그 품질이 범 상치 않은 물건.

그가 문득 물었다.

"이 검. 어찌하실 생각이심까?"

"어찌하다니."

"역시 파실 겁니까? 이 검을 판 다면 괜찮은 영지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족장 드루바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아티팩트다. 그 가치는 결코 하찮지 않다.

값비싼 희귀금속들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혈조에 아로새겨진 마나 회로는 그 수준이 범상치 않았으며, 제작자인 드루바의 실력은 대륙 수 위를 다투는 수준이었으니 .

그야말로 일국의 군주가 사용할 법한 훌륭한 물건이다.

만약 이 검을 열강국가의 군주에 게 바친다면, 영지를 하사받아 단숨에 영주가 될 수 있을 정도.

그 정도로 값어치 있는 물건이 바로 드루바의 작품이었으니 .

하지만 드루바는 이 검을 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브릴리. 검이란 사용해야 그 가치가 있는 거다."

- 카앙!

쇳소리가 울린다.

번쩍 튀는 불꽃. 은은한 마나의 잔향이 확 퍼져 나온다.

"군주에게 바친다면. 그치들이 내 검의 가치를 잘 알아볼까?"

- 카앙!

브릴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 드루바는, 그리고 드워프라는 종족은 금전에 그리 많은 관심 이 없었다.

그들이 오직 원하는 것은 보다 수준 높은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기술. 그리고 그 훌륭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 뿐.

드워프는 진정 장인의 종족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줄 생각이십니까?"

- 카앙!

브릴리는 이 검의 주인이 누가 될지 궁금해졌다.

대륙에서 수위 내의, 어쩌면 제일이 될 수도 있는 훌륭한 장검이다. 이토록 대단한 검을 누가 사용 하게 될지 흥미를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에 드루바는 씩 미소 짓는다.

"강한 사람."

- 카앙!

쇳소리.

"내 검의 잠재력을 한계까지 이 끌어낼 수 있는, 강한 사람에게 줄 것이다."

- 카앙!

규칙적으로 울린다.

브릴 리가 재차 물었다.

"강한 사람이라 한다면. 엘븐 가디언 말입니까?"

엘븐 가디언. 엘프들의 수호자. 막대한 무력을 지닌 절대 강자들.

강한 인물이라 하면 그들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그 재수 없는 뾰족귀년들에게 내 검을 왜 주나?"

- 카앙!

드루바는 단번에 부정한다.

드워프와 엘프의 사이는 결코 우 호적이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 하는 사이.

엘프는 당연히 후보에서 제외.

"그렇다면, 드워프 전사들에게 줄 겁니까?"

다음으로 떠오른 후보는 드워프전사들이었다.

하지만 드루바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그놈들은 무기를 자기 것 만 쓰지 않나."

- 카앙!

드워프 전사들은 오직 자신의 무 구만을 신뢰한다. 무기를 만드는 실력 또한 무력의 일부로 여겼기에.

장인의 종족이었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검을 주려하는 겁니까?"

"글쎄…."

- 카앙!

쇳소리가 울리고. 드루바는 재차 미소지었다.

"있지 않나. 요즘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라 하면…"

"최근에는 군단장이 되었다지."

"설마."

브릴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드루 바를 바라본다. 드루바는 망치를 휘둘렀다.

- 카앙!

"한지훈. 그자라면 내 검의 모든 성능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다."

드루바의 아티팩트가 완성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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