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175화 (175/390)

175화.

"허."

데이비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럴 수밖에 없었다.

"절반의 병력만으로 나를 상대하 겠다라. 진심인가? 한지훈 군단장."

고작 절반의 병력으로 자신을 상대하겠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 자존심까지 상할 터다.

화륵. 그가 재차 연초에 불을 붙였다.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

"한지훈. 확실히 네놈의 능력은 인정하지. 너는 많은 것을 가졌다. 압도적인 무력과 카리스마, 출중한 지휘능력. 군단장이 갖춰야 할 덕목 들이다.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이쪽을 쏘 아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오만하군."

나는 데이비드의 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다. 그의 눈동자 속에 자리해 있는 감정을 읽었다.

분노.

데이비드는 분노하고 있었다. 고작 신입 군단장인 내가 야전군 사령관인 그를 도발했기에.

확실히 그리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사령관 각하. 저는 방금 전 도 상연습에서, 오직 정석대로만 군대 를 운용했습니다."

방금 전 도상연습은 그저 내 평 범한 실력을 보여줬을 뿐.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본래 내가 군대를 운용하는 방법은 보다 과격하고, 추잡하며, 집요했다.

"제 본래 지휘방식. 사령관 각하 께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직속상관이 된 그는 반드시 보아야 한다.

내가 군대를 어찌 다루는지.

"…그래서."

후욱. 하고 연기를 내뿜는 데이 비드.

"네 녀석은 정석대로 군을 지휘 하지 않다면, 고작 절반의 병력만으로 내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여기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데이비드가 고개 돌려 주위 참모 들에게 지시한다.

"새로운 도상연습을 준비하라."

"각하!"

"한지훈 군단장의 무례한 오만입 니다. 굳이 맞춰줄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만류하는 참모들. 허나 데이비드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한번 보고 싶어서 그렇다. 어디네 본래 능력을 한번 보여줘 봐라."

드르륵. 데이비드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나는 내 자리에 착석한다.

"도상연습을 다시하지. 이번에는 다른 지형이다. 작전참모, 준비하도 록."

새로운 도상연습이 시작되었다.

* * *

달칵.

데이비드는 장기말을 옮긴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나도 우습게 보였군.'

한지훈. 이제 막 신입 군단장이 된 사내.

한지훈은 이미 자신을 한번 이겼다. 그리고 지금은 고작 반절에 불과한 병력만으로 도상연습에 임하고 있는 상황.

져서는 안된다.

그는 앞을 바라본다. 보이는 것은 역시나 예의 검은 머리 청년.

'본래 실력이 아니라고 했지.'

데이비드는 장기말을 움직이며, 방금 전 도상연습을 떠올렸다.

한지훈의 지휘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자신의 수를 미리 읽고 대응했다. 정찰거점들은 남김없이 제압당 했으며, 전투에 진입한다면 뛰어난 용병술과 병력조합으로 이쪽을 압 도해왔다.

심리전으로도. 그리고 용병술로도 데이비드가 크게 밀렸던 것이 사실.

헌데 그것이 진짜 실력이 아니라 니.

'네 본래 실력. 한번 제대로 봐주 지.'

데이비드는 결코 어설픈 군관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과거 정복전쟁 시절부터 무수한 전쟁경험을 쌓아온 실전경험 풍부한 고위 장성 이었다.

그가 집중한다면, 그리고 병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지닌다면, 방금 전 처럼 허무하게 패배하진 않을 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런 그의 생각 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쳤군."

데이비드가 나직이 욕설을 뇌까 린다.

지도를 내려다본다. 많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등고선,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 강, 평지, 진창, 계곡.

물론 보이는 것은 단순한 지형정 보들 뿐만이 아니었다.

'내 병력.'

배치해둔 장기말들을 헤아린다.

보병대 일만. 기병 천오백. 저들 이내가 지휘할 병력이다.

시선을 돌려, 텅 비어있는 내지도 건너편을 바라본다.

아직 정찰을 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장기말이 올려져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너머. 전장의 안개 너머에 데 이비드의 병력이 있다.

이만의 보병, 삼천의 기병대가.

나는 눈을 감았다.

"후우."

심호흡했다. 정신을 집중시켰다. 감각을 날카롭게 벼린다.

'블랙 오케스트라.'

내가 했던 게임.

수많은 군대를 지휘했다. 많은 강적을 쳐부쉈고,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큰 재미를 느꼈다.

매일매일, 마우스와 키보드를 움 켜쥐고 모니터를 노려봤다. 두뇌를 쥐어짜내 수많은 전략을 세웠고, 실 행했다.

지금은 그때의 감각을 떠올릴 때.

나는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자,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이 활성화 됩니다.]

집중스킬이 활성화 되었다.

내 사고가 가속되어 간다. 그리고 여러 감각이 소실되어갔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진다. 매캐한 연초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야가 한없이 좁아져, 오직 테이블 위 지도만이 내게 인식되었다.

익숙한 현상이다.

게임에 몰입해올 때마다 느꼈던 감각. 다른 잡생각이 사라지고, 눈앞에 보이던 모니터와 스피커에 온 신경이 쏠리던 그 감각.

물론 활성화된 스킬은 그저 집중 뿐만이 아니었다.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이 활성화 됩니다.]

전투분석이 활성화 되었다. 내 머릿속에 무수한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도에 표시된 지형. 내가 지닌 병력. 적의 병력. 데이비드의 전략. 그의 예상 진군로까지.

나는 가속된 사고에 의지해 추론한다.

'데이비드의 예상 진군로는.'

'내 병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방법.'

'유리한 고지.'

'가용할 수 있는 병력.'

'사기점수와 전투력 점수.'

수많은 사고가 떠오르고, 계산되 었으며, 정리되었다.

머릿속에서 점차 계획이 짜여져 가기 시작한다.

'5턴 뒤. 3개 고지대 점령.'

'17턴 뒤. 데이비드의 일개 천인대 제압섬멸. 2개 기병연대 사냥.'

'백인대 네 개와 천인대 하나를 버림말로 운용. 교란작전.'

승리하는 방법.

알고 보면 단순하다.

그저 상대방이 뭘 할지 예상한 뒤, 그에 대한 계책을 계속해 떠올 리면 될 뿐이니까.

'강도하. 진군. 유인작전 후 우 회. 본진 타격.'

'회전. 종심돌파 후 사령부 제압. 잔당사냥.'

집중스킬과 전투분석 스킬이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승리까지 예상 소요시간. 약 팔십사 턴.'

달칵.

나는 장기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말도 안 돼."

작전참모 샤이아 발스트림은 그리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두 명의 인물. 한지훈 군단 장과 데이비드 북부사령관. 그들은 도상연습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실 너무나 불리한 게임이었다.

한지훈은 고작 일만의 보병과 천 오백의 기병을 가지고 시작했다. 반면 데이비드 사령관은 2만의 보병, 3천의 기병을 지녔으니 .

더해 둘의 경력은 어떠한가.

한지훈은 제국 사관학교도 수료 하지 않은 신입 군단장에 불과했다.

반면 데이비드는 과거 정복 전쟁 시절부터 풍부한 지휘경험을 가진 북부의 맹장.

가진 병력도, 둘의 경력도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상황.

그렇기에 그 누구도 한지훈이 승리하리라 여기지 않았다.

허나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동군. 4번 천인대 반파!"

"13번 기병연대는 전멸판정입니다."

"연속된 패퇴… 사기하락이 적용 됩니다."

데이비드는 밀리고 있었다. 그것 도 압도적으로 말이다.

사실 처음에는 그리 많은 차이는 아니었다. 그저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했을 뿐.

하지만 데이비드는 단 한번도 전장의 주도권을 가져가지 못하고 있었다.

"동군의 보급로. 차단당했습니다. 다섯 차례 뒤 군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하락합니다."

데이비드의 장기말들이 하나둘 전멸 판정을 받아 없어졌다. 영역이 줄어든다.

"서군. 보급품 약탈. 사기 상승 판정. 전투능력이 증가합니다."

"동군. 11번 기병연대 전멸."

"동군의 지휘부가 포위되었습니다. 지휘능력 하락."

샤이아 발스트림은 작전참모. 이 도상연습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렇 기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지도를 바라보며 다시금 중얼거린다.

"한지훈은 미쳤어."

샤이아의 눈동자에 미약한 혐오 의 감정이 일렁였다.

한지훈이라. 그저 훌륭한 군관이 라 여겼었다. 강대한 무력과 뛰어난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더해 전략적 능력 또한 뛰어난, 위대한 군인.

하지만 아니었다.

"병사를 사람으로 안 보는군."

샤이아는 한지훈의 기보운용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확실히 천재적이긴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를 압박하고, 돌파해, 전장의 기세를 휘어잡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나 비인도 적이었다.

한지훈은 말 그대로 병사들을 소모품처럼 다루고 있었다.

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교 란작전. 진형을 흐트러트리기 위한 무모한 돌진. 시간을 벌기위한 버림말.

그 모든 병력이 죽었다.

말 그대로 승리를 위한 희생.

"인간이 아니야."

두 가지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인간이라면 저토록 치밀하게 군대를 운용하지 못할 터다.

하지만 한지훈은 한 치의 흐트러 짐이나 실수 없이 마치 바늘구멍 사이 실을 밀어 넣는 것처럼, 몹시 정교하게 군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저토록 잔혹 하게 군대를 운용하지 못할 터다.

오직 승리를 위한 버림말.

한지훈은 잠깐의 시간을 벌기 위해 아군을 버리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적의 진형을 흐트러트리기 위해 전멸할 것임을 알아도 천인대를 밀어 넣었다.

한지훈의 지휘로 많은 수의 병력 이 죽었다.

하지만 그이상의 병력이 한지훈 의 손에 의해 죽어나갔으니 .

'오직 효율만을 생각하며 지휘하는 것인가.'

샤이아로선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휘방법이었다.

병사들도 사람이다. 그들 또한심장이 뛰고, 붉은색 피가 흐르며, 가족과 친우들이 있다.

허나 한지훈은 그런 그들을 갈아 넣고 있다.

오직 보다 나은 성과를 위해. 승리하기 위해. 병사들을 생환할 확률 이 없는 가혹한 전장에 밀어 넣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도상연습. 실제 전쟁이 아니었다. 그저 전쟁을 대비해 하는 훈련이었을 뿐.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허나 만약 이러한 전투가 현실에서 벌어진다면.

"… 끔찍하군."

군인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닌, 소모자원으로 보는 전장이라.

샤이아는 그런 전장에서 결코 싸우고 싶지 않았다.

"동군. 지휘부 전멸. 장군과 참모 들이 모두 전사했습니다."

"서군 승리."

도상연습이 끝났다.

나는 지도 위를 바라본다.

남아있는 내 병력은 2개 천인대. 기병연대 3개.

도합 2천의 보병과 300의 기병이 살아남았다.

시선을 돌려 데이비드의 병력을 살핀다.

그가 지닌 병력은 천인대 3개. 기병연대 다섯. 도합 삼천의 보병과 오백의 기병들이 살아남았다.

남아있는 병력은 데이비드가 우 위. 허나 데이비드는 군단 지휘부를 잃었다. 군대를 통솔할 장군과 참모 들을 모조리 잃었다.

반면 내지휘부는 아직 건재했으니 . 이쪽의 승리판정.

내가 그렇게 지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지훈."

드르륵.

데이비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 이름을 입에 담는다.

그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도상연습을 다시 하자 했는지 알 것 같군."

다행히 데이비드는 내 의도를 파악한 듯했다.

"내가 네 이러한 지휘를 인정할 지, 안 할지 결정하란 거였어."

정답이다.

나는 데이비드에게 묻고싶었다.

"반드시 패배할 전쟁이 있습니다. 평범하게 싸운다면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지요."

시선을 내려 지도를 바라본다. 어지럽게 널려져있는 장기말들.

"하지만 인의를 버리고, 병사를 소모품으로 여긴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블랙 오케스트라가 그러했다.

압도적 열세. 불리한 상황.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적들. 흑마법사.

그저 승리를 위해 계산하고, 무 수히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럴 때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합 니까?"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 세상 이 바로 그 블랙 오케스트라 시나리오 속 세상이었다.

초월적인 무언가에 의해 흘러가는 비합리적인 세상.

때문에 나는 군단장이 되기에 앞서 결정해야했다.

인의와 도리를 지키고 패배할 것 인지. 아니면 승리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할 것인지를.

결정하기에 앞서 데이비드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한지훈. 나는-"

데이비드의 입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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