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한지훈이라.'
데이비드는 재차 연초에 불을 붙 이며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테이블 너머에 앉아있는 한 사람.
한지훈. 지금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로, 명실상부한 황제의 측근 이자 제국의 영웅.
사령관은 연초 연기를 내쉬며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속 빈 강정은 아니다.'
데이비드는 오랜 군생활 동안 수 많은 군관을 직접 마주했다. 그렇기에 그는 사람을 보는데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한지훈의 모습은 예상 외로 훌륭했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눈동자는 묵직한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눈동자는 온화했으나 한켠으로는 예기를 품고 있었으며, 시선은 올곧 았다.
더해 그의 전신에서 은은히 흐르 고 있는 기세.
한지훈의 기세는 결코 하찮지 않았다. 행동 하나하나에는 위엄이 서 려있으며, 목소리는 카리스마를 품고 있었다.
분명 이자리에는 군단장인 오스카와 준 장성급 군관인 사령단 참 모들. 더해 야전군 최고사령관인 데 이비드 본인이 있음에도.
그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연 스레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피식, 데이비드가 웃는다.
'하긴 수많은 사선을 거쳐 왔을 터이니.'
데이비드는 한지훈의 전투기록들을 보았다.
온갖 기적적인 승리로 점철되어 있는 한지훈의 기록. 그토록 수많은 전공을 세워온 사내다. 고작 이런 자리에서 주눅 들지 않으리라.
데이비드는 내심 한지훈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의 무력. 스스로가 품은 카리스마. 제국에 대한 충성심까지.
가문의 후광만으로 성장해온 어 쭙잖은 놈들보다 훨씬 나은 모습.
그러나, 그럼에도.
'아직 장성이 되기는 이르다. 애송아.'
데이비드는 한지훈을 승급시킬 생각이 없었다.
달칵. 그가 지도 위에 올려져 있는 말을 움직인다.
십인대 단위의 정찰부대를 주변에 산개, 비닉을 유지하며 활동.
'이만이란 숫자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다.'
이만. 한지훈이 군단장이 된다면 책임지게 될 목숨들.
데이비드는 과거 정복 전쟁 당시, 무능한 상관에 의해 아까운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는 그 꼴을 자신의 북부군에서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데이비드는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령까지 거절할 각오를 마 쳤다.
'내가 인정한 인재만이 장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인정 기준은 결코 허접하지 않았으니 .
달칵.
다시 그의 장기말이 움직인다.
이번에 움직이는 것은 기병대. 평지 정찰 지시. 그동안 보병대 정 찰조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산 지를 타고 올라 고지대로 이동 중.
주력군 전진배치. 주력 전투단은 앞으로, 보조할 기병대는 양익을 이 룬다. 이후 정찰을 마치는 즉시 그 의 병력은 앞으로 진군하며 허점을 파고들 터.
데이비드의 장기는 진격전. 그는 정찰 활동을 토대로 허점을 파악, 한지훈의 전력을 단숨에 궤멸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그의 계획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동군 1번, 2번, 3번, 4번 정찰 조. 서군 조우. 전력 차 압도적 열 세. 동군 정찰대 전멸 판정합니다."
"… 무슨."
"동군 5번, 6번 정찰조, 서군 조 우 "
"전력 비등. 서군측이 지형과 병 종비 우세. 접전, 병력 절반 전사 후 퇴각판정."
도상연습을 보조하던 참모들이 입을 열었다. 지도 위 전개시켜 놓았던 데이비드의 정찰대가 하나둘 사라진다.
고작 몇 차례만에 우수수 사라져 가는 그의 장기말들.
"설마?!"
데이비드는 고개를 들어 올려 앞을 바라봤다. 맞은편에 예의 군관이 보인다.
한지훈. 자신이 한 수 가르쳐주 리라 생각했던 애송이.
'내가 어디로 정찰대를 보낼지, 미리 추론해냈다고?!'
그 애송이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묵묵히 장기말을 움직이 고 있었다.
* * *
제국은 군사국가였다.
오르페우스 제국은 이곳 남부 대륙에서 가장 많은 전쟁경험을 축적 한국가.
실전적인 군부와 진보된 지휘체 계, 그리고 가장 선진적인 장교 양 성과정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제국군이 실시하는 도상 연습은 타국에 비해 훨신 발전해 있었으니 .
'완벽한 워게임인데.'
지도 위장기말을 움직이며 그리 생각했다.
도상연습이라 하기에, 허술해빠진 보드게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판 위에 적과 아군의 배치가 보이고, 그 말을 움직여 단순히 많은 말을 처치한 쪽이 승리하는 .
바둑이나 체스와 다를 바 없는 그런 허접한 것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내가 진행하고 있는 도상연 습에는 퍽 많은 것들이 구현되어 있었다.
정찰에 의한 시야 획득. 보급로 관리. 지형에 따른 방어점수. 병종 의상성과 그에 따른 공격력 점수. 심지어 전투 직후 병사들의 피로도 와 사기까지.
그야말로 컴퓨터만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퍽 완성도 높은 워게임 이 구현되어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은 몹시 번거로울 수밖에 없었는데,
"동군 측. 4개 십인대 전멸, 2개 십인대 전력 반파판정. 서군 측. 12개 십인대 피해 경미."
"계산 종료. 다음 차례를 진행해 주십시오."
도상연습을 보조하는 군관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저들은 우리가 턴 하나를 진행할 때마다 양측 지도를 번갈아 살펴진행과정을 기록했으며, 전력점수를 계산했고, 지도 위 말을 재배치했다.
그야말로 아날로그식 시뮬레이션 이란 느낌. 컴퓨터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문득 생각해본다.
'마법사들을 시켜 진짜 워게임을 만들면, 장교 양성에 더 편리하지 않을까.'
실제로 현대 군대에서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워게임으로 장교들의 지휘능력을 향상시킨다 들었다.
과학 대신 마법이 있는 이 세상이니, 마법사들을 동원한다면 정말 제대로 된 워게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피식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잡생각은 그만두자.'
오랜만에 게임 비슷한 것을 해서 그런 것일까.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생각을 해버렸다.
시선을 내려 지도를 바라봤다. 그러자 현재 상황이 보인다.
내 서군이 동군, 그러니까 데이 비드의 정찰대를 순조롭게 제압해 나가고 있다.
쉬운 일이었다. 지도를 본다면 순식간에 추론할 수 있으니까.
데이비드가 노릴 만한 고지대 정 찰거점, 군대가 움직이는 방향, 군단의 배치. 그리고 노리고 있는 한 방까지.
훤하게 읽힌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당신이 나를 가르쳤어. 데이비드 사령관.'
이래봬도 그에게 전략의 기초를 배웠기 때문에.
달칵. 과거를 떠올리며 장기말을 움직인다.
[데이비드 컴벨 하비에르][제국 북부야전군 총사령관]
["척후는 군단의 눈이요, 정보원 은 대군의 귀다."]
["손으로 앞을 더듬어 나아간다 면 십리도 못가 지칠 것이다. 눈과 귀를 닫고 무작정 달리는 군단은 백리 전에 넘어질 것이다."]
["눈과 귀를 곤두세워 무수한 정보를 얻어내라. 전장의 안개를 걷어 내는 거다."]
사실,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이제 막 군단장이 된 유저에게 전략 단위의 전투를 알려주기 위해 배치된 튜토리얼 NPC. 그저 그렇게 여길 뿐이었으니 .
하지만 아니었다.
데이비드는 분명 훌륭한 장군이 었고,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보에서 우위를 지녀야 한다."]
["기동하는 적국의 척후와 간첩을 필히 수색해 찾아내고, 더 큰 이득으로 유인 포섭하라. 그것이 안된다면 제거하라. 그것마저 불가능하다면 기동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라."]
그의 가르침을 따라 병력을 움직 인다.
"동군 11번 척후조, 전멸 판정!"
"12, 13번 척후조! 지형 열세, 반 파판정. 후퇴합니다."
나는 계속해 기억을 떠올리며 장 기말을 옮겼다.
["전쟁이란 속이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해적을 기만하라."]
["잘못된 정보는 적으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할 것이니."]
"동군 17번 천인대 전멸!"
그의 가르침은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었으며, 심지어 당장 실전에 사용하기 힘든 것들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좋았다.
온전히 내 방식대로 녹여낼 수 있었으니까.
["이익으로 유인하고, 혼란할 때 취한다."]
["진정 전쟁을 잘 하는 자는 아 군뿐만이 아닌, 적까지 내 의도대로 통치하는 자이다."]
["불시에 출격하라."]
["아군이 칠 장소를 적이 모르게 하라. 적이 방비할 장소가 많도 록."]
["병력의 집중, 민첩한 기동작 전."]
["한번 승리한 방법은 다시 사용 하지 마라. 형세의 변화를 끝없이 응용해 적이 적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다."]
"동군! 13번, 14번 천인대 전멸!"
"5번 기병연대 전멸했습니다."
"보급로차단. 다섯 차례 뒤 서군 전체의 전투력과 이동속도가 하락 합니다."
실시간으로 사라져가는 데이비드 의 장기말.
이쪽이 점차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 별다른 이변이 없는 이상 내가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는다.
["절대 방심하지 마라."]
방심하지 말라는 것 또한, 그의 가르침들 중 하나였으니까.
내 장기말들이 점차 데이비드의 영역을 잠식해갔다.
* * *
그저 애송이라 여겼다.
개인의 무력이 출중하고,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품었으며, 무수한 전공을 세웠지만.
참모 경험이 없었으니까.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리라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
하지만 아니었다.
"동군, 군단의 절반이 소실. 사기 하락. 전투력이 감소합니다."
한지훈의 전략적 안목은 대단했다.
아니, 그저 대단하다는 말로는 그의 능력을 표현할 수 없다.
"동군의 2, 3, 4번 천인대. 21, 24기병연대 전멸했습니다."
그는 천재였다.
전쟁의 천재.
"… 동군. 군단 지휘부 포위당했습니다. 지휘능력 하락."
"진형붕괴."
데이비드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지도를 바라본다.
분명 처음만 해도 그득 차있었을 자신의 장기말들. 데이비드는 이만 의 보병대와, 삼천의 기병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남은 병력 오분지 일. 병력 사기 최하. 전투력 하락."
지도 위에는 무수히 많은 장기말 들이 널려있긴했다.
그 장기말 대부분이 자신의 것이 아닌, 적 한지훈의 것이란 게 문제 였지만.
"지휘부 궤멸. 장군 전사. 참모단 전멸…."
"종료합니다. 승자 서군. 한지훈 측."
도상연습이 끝났다.
"허."
그리고 데이비드는 헛웃음을 내 쉴 수밖에 없었다.
차마 믿기 힘든 일이었기에.
"패배라니."
단순한 패배조차 아니었다.
압도적인 패배였다.
자신이 지휘했던 동군은 일만칠 천이 전사. 장군과 참모단 모두 전 멸.
반면 한지훈이 지휘했던 서군은 고작해야 수천이 죽고, 천인대 몇 개가 반파되었을 뿐.
사관학교조차 수료하지 않은, 나이도 아직 이십 대에 불과한 새파 란 애송이에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밀릴 줄이야.
"한지훈."
데이비드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예의 청년.
청년의 모습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검은색 눈동자는 여전히 우묵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승리에 대한 일말의 기쁨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치 응당 이래야 했다는 것처럼. 승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
"자네는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 는군."
한지훈이 대단한 인재라는 것.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헌데 전략에서조차 이토록 커다란 재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마침내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 군단장 진급을 승인하지."
그는 진정 군단장에, 장성將星에 걸맞는 인재였다.
뛰어난 카리스마, 압도적인 무력. 그리고 이토록 출중한 전략적 능력 이라니.
한지훈이라면 저토록 어린 나이 에도 불구. 군단을 훌륭히 통치할 수 있을 것이다.
드르륵.
데이비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록 패배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기분 나쁠 이유가 하등 없었다. 그만큼 능력 있는 이가 휘하 야전군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이니.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한지훈에 게 손을 내밀었다.
"진급 축하한다. 한지훈 군단장."
* * *
"감사합니다. 데이비드 북부사령 관 각하."
나는 데이비드가 내민 손을 맞잡 았다.
도상연습이 끝났다. 결과는 당연 하게도, 이쪽의 압승.
"자, 연회를 열지."
문득 데이비드가 그리 말했다.
그는 주위 군관들에게 지시했다.
"오스카. 이곳은 보급기지지. 분명 술과 고기가 남아넘칠 거다. 그렇지 않나?"
"네.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거, 오랜만에 병사들이 포식하겠군요."
"새로운 군단장이 탄생한 날이다. 제대로 기념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데이비드는 내 군단장 진급을 축하해주려는 것 같다.
픽 웃었다.
'역시. 게임 속이랑 똑같아.'
내가 알고 있던 데이비드는 저런 사람이었다.
적과 타인에게는 거칠지만. 일단 자신이 인정한 인물에게는 한없는 온정을 배푸는 인물.
그는 나를 인정해줬다.
하지만 아직이다.
"실례합니다만, 데이비드 사령관 각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내 말에 고개 돌려 이쪽을 주시 하는 데이비드 사령관.
"청이라. 그게 무엇이지?"
"도상연습을 한번 더 했으면 합니다."
아직 내 능력을 모두 보여주지 않았다.
"한지훈 군단장. 이미 자네는 군단장 승급이 확정되었다. 도상연습을 더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저는 제 능력을 기르고 싶습니다."
"오오… 열의가 대단하군."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데이 비드.
내 태도가 썩 마음에 들 것이다. 이미 나는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발전을 위해 노력을 경주 하고 있으니 .
하지만 이제 곧 저 표정은 경악 으로 바뀔 것이다.
"이번 도상연습에서는, 제 병력은 절반으로 했으면 합니다만."
"… 그게 무슨 소리지? 한지훈 군단장."
그의 표정이 굳는다.
나는 이어 말했다.
"절반의 병력으로 상대해보겠습니다. 데이비드 사령관 각하."
내 진짜 실력.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