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제국군이 점령한 뒤랑텅 보급기 지에 일단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모두 제국군 정복 차림, 그리고 가슴팍에는 여러 훈장을 단 인물들 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들을 회의실에서 맞이하는 오스카 군단장.
그가 가장 앞에 선 이에게 척 경 례하며 입을 열었다.
"데이비드 북부사령관 각하."
뒤랑텅 보급기지에 찾아온 이들은 다름 아닌 한지훈의 군단장 승 급 심사단으로, 데이비드 컴벨 하비 에르 공작이 이끄는 수십의 군관들 이었다.
데이비드는 가장 상석 자리에 앉 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통보는 받았겠지. 오스카."
데이비드 북부사령관.
제국 북부 야전군의 수장.
12개 군단 이십만 장병들과 다수의기사단 및 전투마법단을 통솔하는 거물 장성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아 못마땅한 기색 으로 오스카를 바라본다.
"황제 폐하께서 웬 애송이 하나 를 군단장으로 올리라 하신다만."
데이비드의 말에, 오스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한지훈 천인장을 군단장으로 승급시키라 하셨죠."
"그 심사를 진행할 거다. 일단 준비한 서류들 제출하게."
"알겠습니다."
오스카는 턱짓했다. 그에 그의 배후에 도열해있던 장교들이 두툼 한 서류뭉치를 꺼내 회의실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오스카. 미리 말해두지."
직후 천천히 입을 여는 데이비드 북부사령관.
그가 나직이 말한다.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한지훈이라는 애송이를 군단장으로 지목하셨다 한들. 절대 널널하게 심사를 진행하진 않을 거다."
그의 말이 끝나는 즉시.
바스락, 사각.
데이비드가 데려온 심사관들이 서류를 차례로 넘겨보며 분석하기 시작했다.
작전참모, 인사참모, 법무참모, 감찰참모 등 사령단 참모들로 이루 어진 심사관들.
저들이 한지훈에 관한 기록들을 들쑤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투기록, 작전내역, 제출했던 보고서, 세웠던 공훈과 과오. 나아가 출신 성분과 평소 언행, 주변의 평 판까지.
그야말로 '모든' 자료를 검토해, 그가 진정 장성에 걸맞은 인재인지 확인할 것이다.
무려 이만에 달하는 병사들의 수 장이 될 인물을 심사하는 것이다. 그 심사가 까다롭고도 철저한 것은 당연한 일.
"서류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자네 에게 묻지."
데이비드는 연초에 불을 붙이며 읊조렸다.
"오스카. 자네는 한지훈이 백인장 일 적부터 봐왔지."
"그렇습니다."
"자네가 보기에 녀석은 군단장이 될 인재라 생각하나? 고작 천인장인데 말이다."
후욱. 회색 연기가 뿜어진다.
데이비드는 지금 묻고 있었다.
휘하 천인장인 한지훈이 벌써 군단장 계급장을 달 만한 인재인지를.
그에 오스카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네. 한지훈은 군단장이 되기에 차고도 넘칠 인물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 생각하지?"
"모든 면에서입니다."
데이비드가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스카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저는 한지훈만큼 훌륭한 군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군인이라. 상무정신이 뛰어나다는 소리인가?"
"상무정신… 그것도 있습니다만."
피식 웃는 오스카.
그는 과거부터 보아왔던 한지훈 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한다.
"한지훈 천인장은 이미 군인으로 서,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완성되어 있습니다."
"… 콩깍지가 껴도 단단히 낀 것 같군. 자네가 이렇게 물렁한 녀석인 줄은 몰랐네만."
"직접 확인해보시면 아실 일입니다."
오스카는 시선을 돌려 서류심사 를 진행중인 참모들을 바라봤다.
그런 그를 따라 그들을 주시하는 데이비드 사령관.
문득.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저렇게 조용히 서류만 들여다 보고 있다니.'
이상한 일이다.
군단장 심사. 저토록 조용히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간 쌓아왔던 기록의 온갖 허점을 파고들어 끈질 기게 물어뜯는 것이 저들의 역할.
본래라면 온갖 것들에 대해 품평 하고 깎아내려야 하기에, 한창 떠들 썩할 터인데.
저들은 조용했다. 그저 들리는 소음이라고는, 바스락 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뿐.
데이비드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뭐 찾은 것 있나?"
"각하. 그것이…."
"이건가 보군. 내놔보게."
그는 참모가 들고 있는 두 장의 서류를 뺏어들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양자와 양녀를 입양했다. 백인장 시절 병사들과 도박을 진행했다. 이딴 걸 단점이라고 찾은 거냐?"
"하지만 그것 외에는 별다른 오 점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데이비드는 단번에 부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런 흠결 없는 군관이라니. 절대 불가능한 일 이었으니까.
"그 어떤 군관이라 하든, 작전에서 아무런 허점이 없을 수는 없다. 작전참모!"
"네! 사령관 각하!"
"한지훈의 전투기록.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서류 내놓게."
작전참모가 서류뭉치를 내밀고, 데이비드는 그것을 받아들어 읽어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 미쳤군."
그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흘러 나온다.
팔락. 팔락.
그는 계속해 종이뭉치를 넘겨보 며, 여러 전투기록을 읽어나갔다.
자그마한 실수라도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데이비드의 눈동자.
하지만 그는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예사 녀석이 아니군."
한지훈의 전투기록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병력을 지휘하는 것은 정확하고도 신속했고, 압도적 열세 일 때는 개인의 무력을 십분 활용 해 위기를 넘겨냈다.
뛰어난 전술적 소양, 강력한 무력, 압도적인 카리스마.
한지훈의 기록은 지금껏 이어진 출세가도가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데이비드는 한지훈의 전투 기록만을 보지 않았다.
휘하 참모들이 하나둘 보고한다.
"천인장 한지훈에 추천장과 감사 장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훈장 수훈 기록들입니다."
가장 먼저 보고한 것은 인사장교였다. 그가 주로 살핀 것은 한지훈 의 인사기록과 주위의 평판.
한지훈의 평판은 놀라웠다.
상관과 참모들이 신뢰하는 장교. 휘하 병사와 장교들이 믿고 따르는 상관.
그것이 한지훈에 대한 주변의 평가였다.
인사장교 다음으로 보고한 것은 법무참모였다.
"천인장 한지훈이 군법을 어긴 건 단 한번, 도박 때뿐입니다."
그는 주로 한지훈의 군법 위반내 역을 살핀다.
그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사실 도박금지에 관한 군법은 사실상 사장된 데다, 내기대 련에서 자신의 승리에 돈을 건 것 이라. 굳이 이걸 문제 삼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한지훈이 군법을 어긴 경우는 단 한번. 그것조차 무어라 꼬투리잡기 힘들었다.
더해 적전도주나 명령불이행 등 의 중죄를 저지른 적조차 없으며. 민간인 처형과 약탈등의 전쟁범죄 를 저지른 적도 없었으니 .
깨끗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노 릇.
마지막으로 입을 연 것은 감찰장 교였다.
"한지훈 천인장의 제국과 황가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장교와 병사들이 제국에 대한 충 성심을 지니고 있는지, 반역이나 이 적행위에 대한 기색이 있는지. 제국 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지 감시 하는 장교였다.
그가 보고해온다.
"한지훈은 황제 폐하의 옥체를 보호했으며, 수도를 구원해냈습니다. 더해 지금은 물심양면으로 제국 의 승리를 위해 헌신하고 있지요."
역시나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지훈에게 반역의 기미는 보이 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분투했으며. 황제를 도와 귀족주의 파벌을 제거해 황권 강화에 기여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진정으로 제국을 위해 헌신 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지, 루벤에 피난민을 수용하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국 북부 각지에서 피난민들을 인 솔하고 있는 중.
게다가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나 온 자원들을 가공해, 우수한 무구류 를 만들어 제국에 보급하고 있었다.
그의 영지에서 만들어진 우수한 보급병기들이 수송단을 타고 각 전선에 하나둘 전달되고 있으니 .
그야말로 황제에 충성하며, 제국 의 승리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모습.
황제가 신임해 직접 군단장에 내 정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이 이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군관이 있겠는 가.
"… 음."
참모들의 보고를 들은 데이비드는 고개를 주억였다.
각 심사단들. 인사, 작전, 법무, 감찰 모든 참모들이 달려들었음에 도 한지훈의 제대로 된 과오를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 데이비드는 수많 은 군단장 후보들의 서류기록을 봐 왔지만, 이토록 아무런 결점이 없는 인재를 본적이 없었다.
그가 나직이 읊조린다.
"녀석이 군인으로서 완성되어있 단 소리. 이런 의미였던 건가."
"그렇습니다. 사령관 각하."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는 오스카.
쯧. 데이비드가 혀를 찼다.
"확실히. 우수한 인재인 것은 맞다. 그러나…."
쏟아져 나오는 기록들에도 데이 비드는 한지훈의 승급을 확정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한지훈은 장교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완벽했다.
"허나 군단장으로서 걸맞은 인물 인지는 아직 미지수."
천인대를 지휘하는 것과 군단을 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데이비드는 검증해야 한다.
한지훈이란 인물이 진정 군단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지. 그리하여 군단장에 걸맞은 인재인지.
그가 지시했다.
"한지훈 천인장을 호출하도록."
나는 천천히 걸어 뒤랑텅 보급기 지 안, 그곳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관사 안으로 진입했다.
척 경례하는 병사들.
"군단장 진급이 곧이라고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한지훈 천인장님. 아니. 이제는 군단장 각하라고 말씀 드려야 하는군요."
어느새 소문이 퍼졌던 것일까. 병사들이 내 진급 소식을 모두 알 고있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천인장에서 바로 군단장이라. 소문이 빠르 게 퍼질 수밖에.
피식 웃으며 그들의 경례를 받았다.
"그래. 고맙다. 하지만 아직 군단 장이라는 호칭은 일러. 천인장이라 고 불러라."
"어차피 곧 아닙니까?"
"안내하겠습니다. 군단장님!"
병사들이 장난스레 군단장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내 나이가 아직 젊기에 다른 장 교들보다는 대하기 편한 것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함께 싸워왔기에 내가 가깝게 느껴졌던 것일까. 병사의 태도는 퍽 친근했다.
어찌 보면 무례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저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휘하의 호감을 사고 있다는 것이니.
"심사관 분들은 이 회의실 안에 계십니다."
나는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회의 실 앞에 도착했다.
"무운을 빕니다."
병사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철컥, 하고 열리는 문짝.
그리고 그 안쪽으로 일단의 사람 들이 도열해있는 것이 보인다.
"왔군그래. 한지훈 천인장."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오스카.
그는 자리에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경례하며 천천히 회의실 안으로 걸어간다.
시선을 돌려 오스카 주위의 인물 들을 살펴본다.
"저자가 바로 제국영웅 한지훈."
"듣던 대로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라. 신기하군 그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살피는 이들.
처음 보는 얼굴의 장교들이었다. 눈동자를 굴려 그들의 가슴팍에 붙 어있는 계급장과 부대표식을 살핀다.
계급은 모두 준 장성급이라 할 수 있는 사령참모. 소속부대는 북부 야전사령부 사령단.
저들은 사령단의 참모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
"그래. 자네가… 한지훈이로군."
저벅.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모습을 살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다부진 체격. 그는 머리가 새하얗게 센 나이 가 무색하게도, 그 덩치는 결코 왜 소하지 않았다.
전신에 잡혀있는 크고 작은 근육 들, 얼굴 주름 사이에 나 있는 여러 전상, 각진 턱, 부릅뜬 것 같이 또렷하고도 단호한 눈.
"데이비드 컴벨 하비에르. 제국 북부 야전군 최고사령관이다."
그가 손을 내민다. 나는 손을 뻗 어 그의 다부진 손을 맞잡았다.
그와 거의 동시,
- 띠링!
하고 떠오르는 홀로그램.
[데이비드 컴벨 하비에르][제국 북부야전군 총사령관]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데이비드 컴벨 하비에르.
게임 속에서 봐왔기 때문에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데이비드 컴벨 하비에르][제국 북부야전군 총사령관]
["-한지훈. 네놈이 뒤틀려있단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군관이었다. 그야말로 이것이 군인이라는 듯. 평생을 제국과 군을 위해 헌신 했던 위인.
제국 북부전선을 이끌던 맹장.
제국의 적은 그를 일컬어 북부의 사자라 불렀다.
나는 그의 마지막을 떠올린다.
[데이비드 컴벨 하비에르][제국 북부야전군 총사령관]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군. 지금의 제국에는 네가 필요하다. 한지훈 군단장. 네놈이 아니라면, 우리 제국은 멸망할 것이겠지."]
내가 군단장이 되어 군단을 지휘 하고, 협상동맹의 공세에 제국이 휘 청일 때.
그는 열세인 아군의 사기를 드높 이기 위해 직접 전장으로 나섰고. 결국 적 기사단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전사하기 직전 내게 마지막 으로 통신해왔다.
[데이비드 컴벨 하비에르][제국 북부야전군 총사령관]
["-한지훈 군단장. 나는 이곳에서 죽는다."]
["-지휘권을 자네에게 이양하지. 네가 나를 대리해 북부군을 이끌어 라. 수단방법을 가리지 마고 적에게 죽음을 선사하라."]
["-위대한 제국을 위하여 ."]
직후 데이비드 사령관은 전사.
나는 북부 야전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를 실제로 마주하게 되었다.
"서류심사 결과 별다른 문제점은 없더군."
악수를 푼 데이비드가 물러난다. 그러자 그의 뒤, 널따란 테이블이 보였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자네의 전 략적 안목에 의구심이 든다."
테이블 위에는 지도와 여러 장기 말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마치 모의전쟁을 하는 것 같은 모습.
"도상연습을 실시하겠다. 네 전략적 능력을 확인해보지."
그가 지도를 가리켰다. 미리 준비해놨던 것일까. 지도 위에는 장기 말들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다.
"… 도상연습이라."
시선을 내려 지도를, 그리고 지도 위에 올려져 있는 장기말들을 바라본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게임 속에서 보던 것과 똑같다.'
지도 위 올려져있는 각종 기호들 로 이루어져 있는 말들. 게임 블랙오케스트라의 전략창에서 보던 아이콘들과 똑같았다.
깃발 모양의 본영, 크고 작은 삼 각형과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장기 말, 그리고 마법전력을 의미하는 동그란 모형까지.
차이점이라고는 모니터 너머가 아닌, 모형으로서 자리했다는 것일 뿐.
"자, 자리에 앉게."
드르륵. 의자를 끌어 앉는 데이 비드. 나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 았다.
"내게 네 능력을 보여라. 한지훈라이젠 군단장 후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속에서 그와 직접 군대를 마주해본 적은 없었다. 내가 제국에 반기를 들기도 전해 그가 전사해 버렸기 때문에.
"내가 직접 상대하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도상연습 으로서나마 그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싱긋 웃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데이비드 사령관 각하."
데이비드는 말했었다. 내 능력을 보이라고.
하지만 그 반대다. 휘하 참모들 앞에서 개쪽당하지 않으려면 오히려 그쪽이 발악해야 할 거다.
워게임은 내 전문이니까.
도상연습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