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들이닥치는 볼로냐 기사단의 기사들. 그들이 전투마로 카렌의 기사 들을 걷어차고, 기다란 기병창을 휘 두르며 순식간에 몰아쳐간다.
지쳐있는 카렌 놈들은 볼로냐 기사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제국 기사단이다!"
"맙소사! 어떻게 벌써 상륙한…."
"끄아아악!"
놈들이 죽어간다.
기사 놈들이 전투마에 치여 날아 갔다. 바닥을 구르는 놈들의 등짝에 다수의 기병창이 꽂혀갔다. 쇳소리 와 고함소리가 탑 안을 왕왕 울린다. 순식간에 주변이 정리되어갔다.
"놈들이 도주합니다!"
"5번부터 10번 전대! 놈들을 추 격하라!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마 라!"
"명령을 받듭니다, 단장 각하!"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베르겐이 있었다.
최상급에서도 보다 높은 경지를 보이는, 강력한 무력을 가진 기사. 볼로냐 기사단의 단장인 인물.
그가 검을 휘두르며 놈들을 제압 해갔다.
콰르르릉!
강렬한 검풍이 일 때마다 적 기사 두셋이 베어 나자빠졌다. 베르겐 은 탑 안으로 진입한 이후 십 수명의 기사를 순식간에 베어 죽여버렸고.
"다행히 목숨은 아직 붙어있군."
곧 내 앞에 도착했다.
철컥, 저벅.
그가 전투마에서 하마한다. 그리고 그런 그와 나를 보호하듯, 주변을 에워싸는 볼로냐 기사단의 단원 들.
나는 눈동자를 굴려 베르겐을 바라봤다.
하얀색 장발을 기른 중후한 기사. 고작 며칠 못 봤을 뿐이었지만. 퍽 오랜만에 본 듯한 기분이다.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정말, 잘 해주었다. 한지훈 천인 장. 자네 덕분에 이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마침내 베르겐의 얼굴을 보고나 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승리했다.
기사 수백을 상대로. 본대가 상 륙할 때까지 기어코 혼자서 막아낸 것이다.
눈동자를 굴려 시야 속 홀로그램을 재차 확인했다.
[서브 퀘스트 - '상륙거점 사수' 를 '훌륭하게' 완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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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떠올라 있는 퀘스트 완료 창. 퍽 많은 포인트를 얻었다.
하긴. 그렇게 개고생했으니 이정 도 포인트는 받아야 수지가 맞다.
그때 문득.
"일단.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겠 군."
베르겐이 내복부에 꽂혀있는 장 창의 창대를 잡았다. 뽑아내려는 듯 한 움직임.
나는 다가올 고통에 대비해 눈을 꾹 감았다.
그가 창을 뽑아냈다.
촤아악!
"크윽…!"
고통에 절로 이가 까득 갈렸다.
날카로운 창날이, 내장을 헤집으 며 빠져나가는 감각이란!
집중스킬이 해제되었기에, 고통이 온전히 느껴졌다.
피식. 베르겐이 가볍게 웃는다.
"엄살이 심하구만. 혼자서 기사 수백을 막아낸 인물답지 않게 말이 야."
엄살이라니. 장창에 배에 구멍이 뚫려보면 저런 말은 절대 하지 못 할 거다.
"이제 쉬게, 한지훈 천인장. 나머지 잔당은 내가 처리하겠다."
나는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나는 할 만큼했다. 적 기사단과 수 차례의 접전을 벌 였으며, 놈들의 진군을 지연시켰고, 마지막에는 수백의 기사들을 상대 로 분투하기도했다.
조금 쉰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으리라.
"잠깐 한숨 돌리고 있게. 나는 기사단을 이끌고 저놈들을 사냥하고 오지."
이날.
제국군은 드발트 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놈들의 보급로가 단절되었다.
"…다시 한번 말해보게. 왕실 기사단이, 근위군단이 어떻게 되었 다고?"
라피엘 데이고르 카렌. 카렌 왕국의 국왕. 불타는 듯한 적발과 커다란 덩치를 가진 정열적인 지도자.
그는 옥좌 위에 앉아 그리 물었다. 그에 그의 앞에 부복해있던 군 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왕실 기사단과 근위군단은…."
꿀꺽. 마른침을 삼킨 군관.
그가 간신히 이어 말했다.
"왕실 기사단과 근위군단은 전멸 했습니다. 킬리언 린드하르트 기사단장은 현장에서 전사, 딜라이 워컨 에클스턴 근위군단장은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라피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 침통한 기색이 올라온다.
뼈 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무려 2만에 달하는 근위군단의 정예병. 그리고 왕실 기사 팔백. 결코 적지않은 전력이다.
그들 모두를 잃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침공군이 고사하게 생겼군."
드발트 강 유역은 카렌 침공군을 지원하는 보급로였다. 그곳을 빼앗 겼으니 침공군에 보급품을 전달할 길이 없다.
그리고 보급받지 못한 군대는 군대가 아니다. 아마 그들 카렌은 앞 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하리라.
"패전이 가깝다."
라피엘은 눈을 뜨고는, 시선을 돌려 지도를 바라봤다. 지도에는 제국 북부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제국령 안쪽으로 파고들어가 있는 그의 군대.
남쪽으로는 제국군 십 수만이 그들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제국군 육만이 보급로에 자리 잡고 퇴로를 틀어막고 있다.
라피엘이 시선을 돌려 묻는다.
"전쟁부 장관. 지금 우리가 운용 할 수 있는 병력은?"
그가 묻는 것은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의 수. 그런 그의 물음에, 카렌 전쟁부 장관 딜라민 레바일데가 나직이 대답한다.
"없습니다. 전하."
"… 진정 없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아시다시 피… 지금 저희 본토에 남아있는 것은 마물방위와 치안유지를 위한 병력 한줌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은 이미 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전황이 너무나도 불리하다.
앞뒤로 포위되어 고립된 본대. 보급로는 단절되었으며, 추가 투입 할 수 있는 병력은 전무.
이대로 무리하게 전쟁을 진행한 다면 카렌은 모든 병력을 잃게 될 것이고, 결국 완전히 패배하게 되리라.
그렇기에 그는 결심한다.
"항복해야겠군."
"전하."
"승산은 전무하다."
확신할 수 있다. 이대로 전쟁을 진행하다가는 보다 철저히 패배할 뿐이다.
그럴 바에 순순히 항복해 손실을 줄이는 것이 나을 터.
그가 지시한다.
"통신수정구를 가져와라. 내 직접 제국 황제와 항복협상을 진행해야 겠다."
"명을 이행합니다. 전하."
군관이 수정구를 가져왔다. 라피 엘은 수정구를 조작하며 생각한다.
'이번에는 패배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패전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제국에 대한 복수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그는 제국정벌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으니 .
'항복협상을 한 뒤. 제국이 전쟁에 피폐해졌을 때, 다시 한번 침공한다면.'
제국의 적은 카렌뿐만이 아니다.
제국은 지금 카렌을 비롯한 협상동 맹의 4개국과 동시에 전쟁을 진행 하고 있는 상황.
제국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질 것 이다. 그리고 전쟁의 막바지, 제국 의 전력이 밑바닥에 닿았을 때. 협 상을 파기하며 다시 침공한다면.
그렇다면 제국을 징벌할 수 있으 리라.
라피엘은 그리 여겼다.
우우웅….
곧 통신이 연결되었다. 수정구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라피엘이군.
제국 황제의 목소리.
으득. 라피엘은 이를 갈았다.
'새파란 애송이가!'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젊은 나이에 제국의 주인이 된 새파란 청년.
- 어인 일인가. 라피엘. 두 손 모아 싹싹 빌기위해 연락했나?
그리고 그 새파란 청년이 비아냥 거리고 있다. 라피엘은 속에서 울화 가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감정을 가라 앉히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항복협상을 하고자 한다. 아르테 니아."
- 항복 협상이라.
수정구 너머 황제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전황 이제국에게 너무나도 유리했으니까.
그의 말이 이어진다.
- 그래. 안 봐도 뻔하군. 네놈의 침공군 병력이 몰살당하기 전에 항복해, 군대를 유지하고자 함이겠지.
- 별로 끌리진 않는군.
예상했던 반응이다.
이토록 유리한 상황에서 항복협 상이라. 아쉬울 터다. 전쟁을 계속 해 수도까지 진군한다면 카렌 그 자체를 집어삼킬 수 있을 터인데, 항복협상을 받아들인다면 그저 영토의 일부와 일부 이권들이 얻을 수 있는 전부일 터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제국이 항복협상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았다.
평상시 제국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제국은 평시상태 가 아니었다.
"아르테니아. 그대도 알고 있을 터인데. 전쟁을 계속한다면 불리한 것은 자네 제국이다."
제국은 4개 국가에게서 공격받고 있다.
다수의 전선이다. 절대 여유롭게 버틸수는 없을 터.
"자네도 우리와 대치중인 병력을 다른 전선으로 돌리고 싶을 터인 데."
- 흐음. 계속 지껄여 보게.
"국토의 삼 분지 일을 주지. 전쟁을 멈추게."
라피엘은 제안한다.
국토를 제국에 넘길 터이니, 전쟁을 멈추자고. 다른 전쟁에 집중하라고 말이다.
그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카렌은 한때 대륙의 패권을 두고 싸우던 열강국가. 과거 정복 전쟁 당시 많은 영토를 빠았겼기에 그 국토가 그리 광활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적지않은 영토를 지니고 있다.
그런 카렌의 국토 삼 분지 일을 제국이 차지하는 것이라면 꽤나 합리적인 항복 조건이었으니 .
하지만 제국 황제는,
- 엿이나 먹게. 라피엘.
거절. 아니, 단순한 거절을 넘어 도발했다.
난데없는 모욕.
"아르테니아! 네놈…."
- 네놈은 감히 주제를 모르고 나 의 제국은 건드렸다.
하지만 라피엘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내 병사들을, 제국의 신민을. 우리의 성스러운 국토를 더러운 군 홧발로 밟고 들어온 거다.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라피엘은 깨달았다.
제국 황제는 카렌에 대해, 그리고 협상동맹에 대해 상상 이상의 적의를 지니고 있었다.
- 이자리에서 맹세하지. 나는 한 달 안에 카렌을 멸망시킬 거다. 라피엘 네놈과, 네놈의 자식들까지 모조리 처형해주지.
"아르테니아."
- 한지훈. 이 이름을 기억하게.
라피엘은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어떤 인물의 이름이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왔기에.
아르테니아가 말한다.
- 네놈의 목을 자를 인물의 이름이다.
"그건 무슨…."
- 마법사. 통신 종료하게.
우우웅….
수정구가 가라앉았다. 직후 알현실에는 묵직한 적막이 자리한다.
"… 전쟁부장관."
라피엘은 나직이 지시한다.
"당장 장성들 소집하게."
카렌의 멸망이 가까워져 온다.
"속이 시원하군."
제국 황궁의 알현실. 아르테니아 황제가 그리 말하며 옥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그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기야 방금 전 승전소식을 들은 데다가, 카렌 국왕에게 멸망선고까지 했으니 기분이 나쁠 리 없다.
그가 시선을 돌려 말한다.
"국방성 장관."
"국방성 장관 카디르. 신께 하명 하시옵소서, 폐하."
"내가 지시했던 일. 어떻게 되었나?"
"지시했던 일이라 하시면…."
국방성 장관 카디르는 말끝을 흐렸다. 황제가 지시했던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무엇을 묻고자 하는 것인 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그에 황제가 씩 웃으며 말한다.
"신규 군단 편성 말이네."
"아아."
카디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한다.
"신규 군단을 편성의 완료가 목 전입니다. 병력을 확보했고, 보급망 과 행정절차도 모조리 마쳤습니다.
이제 배치명령만이 남아있지요."
"그래. 좋아."
황제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신규군단 편성. 꽤나 이전에 지시했던 일이었지만, 최근에야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무려 2만의 병사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장교를 선출하며, 보급과 행정체계도 정비 해야 한다.
이렇듯 새로운 군단을 창설하는 것은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비로소 새로운 군단을 편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 .
그가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보 며,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지훈 천인장."
그가 쥐고 있는 서류는 다름 아닌 한지훈의 인사서류였다.
십인장 시절부터 천인장인 지금까지, 전공란이 아주 빽빽하게 메워 져 있는 서류.
그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전공을 세웠다.
공국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제국 수도를 구원했고, 최근에는 혼자서 기사단을 상대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공.
이 정도의 전공이라면, 그가 장 성이 되는 것에 그 누구도 반발하지 못하리라.
"앞으로는 한지훈 군단장이라 불러야겠군."
한지훈의 군단장 승급이 곧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