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169화 (169/390)

169화.

전신갑주. 처음 입어봤다.

철그럭. 팔다리를 움직이자 관절 부위에서 금속음이 울렸다. 잘 연마 된 판금은 반사광을 번쩍였고, 철제 장갑은 듬직했다.

절로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확실히. 뽀대는 나네."

수도 없이 보아왔던 기사용 전신 갑주다. 그것을 직접 입어보니 느낌 이 새롭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번쩍거리는 전신갑주를 입고 있으니 절로 강해진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이래서 사람들이 게임에서 룩덕 질을 하는 건가? 약간 이해가 되었다.

뭐, 이딴 전신갑주 따위 없어도 충분히 강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강하 게 보여야 할 때.'

고개를 들어 올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투구의 바이저 너머, 놈들의 모습이 시야 속에 들어온다.

"한지훈…!"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카렌의 기사들.

놈들은 명백히 공포에 질려있다.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검을 쥐고 있는 손아귀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 그리고 뺨을 타고 흐 르는 식은땀까지.

물론 내가 의도한 것이긴했다. 그것을 위해 이거추장스럽고도 삐 까번쩍한 기사용 갑주까지 입었지 않나.

'놈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어야 한다.'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알 수 있다.

나는 강하다. 시스템의 보정을 받아 강대한 무력을 지녔다. 포인트 로 능력치를 상향시켰고, 스킬을 다 룬다.

엘븐 가디언 정도의 강자가 아닌 이상 나를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내가 명백한 수적 열세였다.

적 기사들은 수백 명이다. 반면 나는 혼자에 불과하다.

놈들이 끝없이 밀려든다면, 오러 가 고갈되어 죽는 것은 나다.

그렇기에 나는 갑주를 입었다.

"제국의 악마… 한지훈…!"

녀석들에게 공포를 불어넣기 위해서.

내게 덤벼드는데 주저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것이다.

화르르륵!

검신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내가 들고 있는 장검에 푸른색 불길 이 타오르며 강렬한 기세를 발했다.

사방으로 뻗쳐나가는 장중한 기세. 목소리에 한껏 마나를 담아, 중 후한 목소리로 나직이 고했다.

"덤벼라."

그에 덤벼드는 적은 없었다.

놈들도 알고 있다. 당장 이쪽으로 달려든다 한들, 죽는 것은 자신 이라는 것을.

허나 그렇다고 무작정 서 있을 수는 없다.

기세를 장악해야 한다. 이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전의를 소거 해야 한다.

검날에 더욱 진한 오러를 밀어 넣으며 이어 말했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가지."

검의 첨단을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한층 안색이 창백해지는 적 기사들.

나직이 읊조린다.

"퍼엉."

직후. 검신이 터져나갔다.

콰아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아!"

수백조 각의 검날 파편이 앞으로 쇄도해갔다. 피 안개가 터져 나온다. 적 기사 다섯 명이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이 활성화 됩니다.]

자, 전투 시작이다.

"한지훈…! 놈이 어째서 이곳에!"

카렌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 하보크 림펠시안. 그는 경악에 찬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적이 있었다.

"다 뒈져버려라!"

사자후를 터트리는 적. 한지훈.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놈이 착용 하고 있는 전신갑주의 투구에 의해 가려져 있었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하보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녀석의 존재감을 진하 게 느낄 수 있었다.

콰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아!"

그만큼 그의 무력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검날이 터져 나와 이 좁디좁은 탑 입구를 초토화 시켰다. 오러 서린 푸른색 검날파편 수백 개가 공간을 난자했고, 가장 최선두에서 있던 기사 다섯이 나자빠졌다.

빼곡하게 차있던 기사들 사이로 공백이 드러났다. 하지만 한지훈은 멈추지 않았다.

"어서 덤벼!"

쿠웅!

녀석이 진각을 밟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철커덩! 바닥에 쓰 러져 있던 기사들의 시체가 쇳소리 를 울리며 튕겨나갔다.

놈이 예비용 장검을 꺼내들어 휘둘렀다.

콰르르르릉!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강렬한 검격. 상위 기사들이 오러 서린 장검을 휘두를 때 나는 파공성이었다.

공기가 터져나가, 충격파가 공간을 뒤흔드는 소리.

콰드드드득!

"커허어억!"

기사 세 명이 동시에 반 토막으로 잘려 쓰러진다.

하보크는 어깨를 떨며 중얼거렸다.

"저게, 진정 사람의 무력이란 말 인가…."

한지훈. 과연 경이로운 적이었다.

전투마를 타고 기사단의 진군을 가로막았다. 기사단의 진형 사이사이를 누비고, 추격을 뿌리치며. 백에 달하는 단원들을 처치했다. 전대장 다수를 사냥하기도했다.

자신의 상관. 킬리언 왕실 기사단장을 처치했다.

놀라운 적이었다.

놈은 많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전투마를 제 손발처럼 다루는 뛰어난 기마술. 포위망 사이 빈틈을 기어코 찾아내는 냉철한 상황판단 능력. 전투마를 도약시켜 대열 사이 로 파고드는 담력.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무력이었다.

"겁쟁이 새끼들!"

콰아아아앙!

놈이 다시금 검날을 터트렸다. 재차 공간을 유린하는 검날파편 세 례.

철컹! 철그럭! 쿠웅!

기사 여섯이 피 안개를 터트리며 나자빠졌다. 그들이 흩뿌린 피가 이 좁은 입구의 벽을, 바닥을, 천장을 오염시켰다.

비릿한 혈향이 후각을 가득 메웠다.

"… 크윽!"

순간, 하보크는 이를 악물었다.

저기 피를 흘뿌려가며 죽어가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휘하 단원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카렌의 정예 기사였으며, 그 목숨 하나하나가 아깝 지 않은 이가 없었다.

헌데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자신 이 공포에 질려있는 꼴이라니.

퍼억!

하보크는 건틀릿을 말아쥔 주먹으로 자신의 턱을 때렸다. 강한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고통에 절 로 표정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그 고통 덕분에, 하보크는 비로소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목소리에 힘을 실어 지휘하 기 시작했다.

"1번, 2번 전대! 입구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라! 계속 밀어 붙이는 거다!"

"하지만, 부단장님…!"

임시 1번 전대장이 주저했다. 그에 하보크는 그를 바라봤다.

본래 편대장이었으나, 전대장과 전대부관의 전사로 임시 전대장이 된 인물.

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해왔다.

"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놈은 괴물이란 말입니다!"

괴물. 그이상으로 기사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말이 있을까.

한지훈은 혼자서 기사단을 유린했다. 그런 그가 저 좁은 통로 안쪽에 자리 잡고,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끝없이 이쪽을 죽여가고 있다.

마치 괴물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으리라.

하지만 하보크는 알고 있다.

"놈은 괴물이 아니다."

퉤! 그가 입에 고였던 피 섞인 침을 내뱉었다.

하보크는 한지훈을 노려봤다.

"녀석의 마나는 무한하지 않아."

그 어떤 기사라 한들, 지니고 있는 마나량에는 한계가 있다. 하물며 저토록 선명한 오러광을 발하는 상대다. 마나의 소모가 결코 낮지 않을 터.

"저길 봐라."

하보크는 검으로 한지훈을 가리 켰다.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놈의 오러광. 아직도 선명하긴 하다만 그 세기가 줄어들어 있지."

임시 전대장은 한지훈을 바라본다. 그러자 그 또한 알 수 있었다.

장검을 쉼 없이 휘두르며 기사들을 도륙하고 있는 한지훈. 그의 무 위는 절대 낮지 않았다. 검격 한번에 기사 둘을 베었고, 검날을 터 트리자 좁은 통로 안쪽에 다수의 기사들이 우수수 쓰러져갔다.

하지만 그의 검날에 어려 있는 오러광은 분명 점차 그 세기를 잃 어가고 있다.

"이대로 밀어붙인다면. 우리가 이 기는 거다."

한지훈은 급속도로 마나를 소모 하고 있다. 이대로 모든 마나를 소 진한다면 금세 무력해질 터.

게다가 하보크는 그저 입구로 병력을 밀어 넣기만 할 생각이 없었다.

"6번, 7번, 8번 전대장."

"네! 단장 각하."

"너희들은 입구로 진입하지 않는 대신, 할 것이 있다."

철그럭. 그가 검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것은 한지훈도, 놈 이 지키고 있는 탑의 통로도 아닌, 탑의 외벽이었다.

"탑의 벽을 부숴라."

"… 벽을 부수라 하시면."

"이렇게 말이다."

하보크는 오러를 한껏 끌어올린 뒤, 탑의 벽면에 검격을 갈겼다.

콰앙!

커다란 소음을 일으키며 석제 벽을 타격하는 그의 검날. 벽면에는 깊은 검상이 생겼다.

그가 지시한다.

"입구로 병력을 아무리 투입해봤 자. 축차투입 그이상은 안 되지."

그의 말대로, 탑의 입구는 너무나도 좁았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욱여넣어도 세 명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좁은 폭. 저곳으로 기사들을 아무리 밀어 넣는다 한들, 놈을 포위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벽에 구멍을 뚫고 자 한다.

"석제 벽면이 두텁지만. 오러 검격을 죽어라 휘두르면, 구멍 한두개쯤은 빠르게 뚫을 수 있을 터."

"더 빠른 속도로 탑 안에 기사들을 진입시키고자 하는군요."

"그래."

"알겠습니다. 기사들을 시켜 벽에 구멍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철그럭, 철컥.

전대장들이 휘하 기사들에게 명령한다. 하보크는 시선을 돌려 다시 금 통로 안쪽을 주시했다.

콰아아앙!

다시금 터져 나오는 검날 세례. 기사들이 우르르 쓰러지고, 한지훈 은 능숙한 동작으로 예비용 장검을 꺼내들고 있다.

으득. 하보크가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본다.

"반드시 죽여버린다. 악마새끼."

그의 눈동자에 적의가 아른거리 기 시작했다.

어느새 공포는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 하보크의 입가에서 어떤 인물 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제가 복수를 완수하겠습니다. 킬 리언 기사단장 각하."

하보크는 한지훈이 자신의 상관, 킬리언을 처치하는 장면을 잊지 않았다.

킬리언은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 은 훌륭한 상관. 그런 킬리언은 놈 한지훈에게 농락당해 죽어버렸다.

하보크는 한지훈을 죽여 킬리언 의복수를 하고자 한다.

그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한지훈을 주시했다.

* * *

['엑스트라 스킬 : 집중'이 활성화 됩니다.]

집중스킬에 의지해 카랜 새끼들을 죽여나갔다.

"악마! 악마새끼…!"

번쩍!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내 검날. 검날은 오러를 휘감고 있었고, 청색 검광을 번뜩이며 적의 목을 베었다.

서걱.

미약하게 울리는 절삭음. 적 기사의 목에서 붉은색 핏물이 푸확 튀어 올랐다.

후드드득.

내 투구 위로 적의 혈액이 끼얹어진다. 비릿한 핏물이 투구의, 그리고 갑주의 빈틈을 파고들어 내부 전투복을 적셨다.

"기분 참 지랄같네."

비릿한 피 냄새가. 그리고 피부 를 타고 흐르는 질척한 핏물의 감 촉이 너무나 불쾌하다.

무시하고 계속해 검을 움직인다.

파앙!

파공성이 터졌다. 그와 함께 직선을 그리며 앞으로 파고들어간 검 의 첨단.

퍼억.

내 검날은 적 기사의 복부를 관 통했고.

"커헉…."

기사 놈이 신음하며 몸을 축 늘 어뜨린다.

눈동자를 굴려 적 기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리며 휘청거리는 녀석. 놈의 목숨이 끊겨 가며 그 눈동자가 점차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투의지는 죽 지 않은 것인가. 녀석은 양팔을 펄 떡이며 나를 붙잡으려 한다.

조금이라도 이쪽을 방해하겠다는 몸짓.

무시하고, 놈의 복부를 관통한검날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웅웅웅웅-!

백열하는 검날. 나직이 읊조렸다.

"뒈져."

직후, 콰아아아아앙!

내 검날에 꿰뚫렸던 기사 놈의 복부가 완전히 터져나갔다. 기사의 살점과 갑주파편, 그리고 검날조각 들이 좁은 입구 통로의 적들에게 쏘아진다.

"끄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적 기사들이 검날 세례에 피격되어 우수수 쓰러진다. 방금 전 무력 화 된 기사들이 도합 다섯.

퍽. 배가 터져나간 적 기사를 발 로 차 쓰러뜨렸다. 놈의 시체가 내 장을 질질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다.

"염병할 놈들…."

스르릉. 예비용 장검을 뽑아들며 읊조렸다.

"참 끝도 없이 밀려온단 말이야."

고개를 들어 올려 앞을 바라봤다.

철그럭, 철컥, 처적.

방금 전 내가 죽인 기사들의 공백을, 새로운 기사들이 메꿔갔다.

"개새끼들. 계속 들어와라."

후욱, 훅. 가쁘게 숨을 고르며 검을 들어올렸다. 직후 화르륵 하며 타오르는 내 검날.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휘둘러 놈 들을 도륙해갔다.

콰직, 퍼억. 서걱.

적 기사의 목을 절삭했다. 옆구리에 검날을 쑤셔 박아 비틀어 장 기를 난자했다. 팔다리를 베고, 가슴팍에 검날을 박아 넣었다.

"제국의 악마…."

"쿨럭!"

"살려줘! 살려…!"

적 기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차례로 쓰러진다.

어느새 좁은 입구통로 안쪽에는 기사들의 시체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굴러다니고 있다.

으득. 이를 갈았다.

'마나가 부족해.'

벌써 오러의 출력이 낮아지는 것 이 느껴진다. 그리고 심장 속 마나 량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도.

허나 나는 전투의지를 꺼트리지 않는다.

'얕보일 수는 없으니까.'

언제까지나 싸울 수 있다는 듯. 아직 한계에 이르지 않았다는 듯. 전의를 한껏 담아 눈을 부릅뜬다.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순식간에 잡아먹힐 것을 알기에.

나는 카렌의 기사들을 계속해 죽 여나갔다.

그리고 내 마나도 빠르게 고갈되 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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