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카렌의 왕실 기사단과 근위군단 은 계속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붉은 색 깃발이 펄럭이고, 2만의 정병과 7백의 기사단원이 진흙길을 밟으며 나아간다.
그들의 가장 최선두에 있는 이. 근위군단장 딜라이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
딜라이의 의아한 시선이 주위로 향한다. 그곳에는 그의 참모들이 도 열해 있었다.
그가 묻는다.
"부단장. 자네의 왕실 기사단, 한지훈 놈이 지연시켰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시선이 향한 것은 다름 아닌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 하보크였다.
기사단장 킬리언의 전사로 그를 대리해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이.
하보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제국의 악마는 계속 해서 집요하게 저희를 노리며 진군을 지연시켰습니다."
"그리고 전대장들을 사냥했고, 기사단장까지 처치하며 말이야."
"…그렇습니다."
하보크가 우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딜라이는 그의 축 가라앉 은 얼굴을 보고는,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쫄았군. 멍청한 놈.'
그의 얼굴에서 공포의 감정을 엿 보았기 때문에.
저자, 하보크는 한지훈이라는 인물에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뭐. 이해하지 못할 노릇은 아니지.'
세 시간 동안 제국의 악마, 한지훈에게 계속해 시달렸다고 한다. 더 해 기사단의 가장 드높은 무위를 지니고 있던 킬리언조차 그에게 당 해 전사해버렸으니 .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기사단원의 수가 무려 수백에 달한다 해도, 그리고 그 모두가 드높은 카렌 왕실 기사단의 단원들 이었음에도.
저들은 한지훈이라는 인물에 대 한 공포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전진하는 카렌 왕실 기사단을 바라본다.
딜라이의 얼굴에 자리해있는 실망이 더욱 진해진다.
'그나마 부단장 놈이 나았군.'
단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 웠다. 긴장 가득한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으며,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렸고, 안색은 창백했다.
부단장인 하보크뿐만이 아닌, 카 렌의 왕실 기사단원 거의 전부가 한지훈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차라리 궁금할 지경이 었다.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왕실 기사들이 저토록 공포에 굳어있는 것인지.
딜라이는 잠시 그리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한지훈. 그놈,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군."
그의 말에 하보크는 고개를 끄덕 여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자네의 보고대로라면, 악마 놈은 한 시간 내 두세 번꼴로 등장해 진군은 지연시켰다고 들었는데 .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 거지?"
"그건… 저도 짚이는 구석이 없군요."
"으음…."
딜라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왕실 기사단과 근위군단이 합류 하면서부터 함께 전진했다. 목표지 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상, 한번에 모든 전력을 투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지훈의 등장에 대비했다.
놈은 왕실 기사단을 괴롭혔던 것처럼, 그들 합동군단의 진군 또한 지연시키리라 여겼던 것이다.
헌데 어째서일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군."
벌써 함께 진군한 지 삼십여 분 이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 악마 놈 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상황.
왕실 기사단을 그토록 집요하게 노렸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설마. 지쳤나.'
딜라이는 그리 생각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놈의 움직임은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발리스타 투사체를 파괴하는 놈의 모습을 떠올렸다.
선명한 푸른색 오러광, 강렬한 기세. 그의 무력은 너무나 웅혼했었다. 그런 한지훈이 지쳐 쉬고 있으 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딜라이는 계속해 추측한다.
'아니면, 거점을 포기한 건가.'
하지만 재차 고개를 가로질렀다.
카렌 침공군 12만을 고사시킬 수 있는 기회다. 제국 국방성에서는 그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이곳 보급로 를 장악하고자 할 터. 그리 쉽게 병력을 물렸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딜라이의 추측은 길게 이어졌다.
제국군의 내분, 적 병력의 우회, 매복기동. 여러 경우의 수가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한지훈이 갑 작스레 나타나지 않는 합당한 이유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 군단장 각하.
통신이 들어왔다. 선발 정찰을 보냈던 기병 연대장의 보고였다.
그가 알려온다.
- 제국군의 다음 방어선을 발견 했습니다. 그 수는 약 오천.
"역시."
딜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군이 이쪽의 진군지연을 위해 다음 방어선을 만들어 두었으리 란 사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병연대장의 보고는 그리 특별할 것 없었으니 .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보고는 그 의 예상을 벗어났었다.
- 놈들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 뭐? 후퇴라고?"
- 그렇습니다. 군단장 각하. 놈들이 모조리 후퇴하고 있습니다.
- 추격합니까?
딜라이는 턱을 괴고 고민했다.
제국군이 후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쪽의 진군을 지연시키기 위해서는 아까 전 초전처럼 거점을 사수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것인 가.
그는 잠시 고민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추격은 하지 않는다. 무언 가 심상치 않군. 본대로 복귀해라."
- 명령을 따릅니다. 군단장 각하.
기병 연대장과의 통신이 종료되었다. 딜라이는 쯧 혀를 찼다.
"놈들이 무언가 꾸미고 있군."
적의 본대가 상륙하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이른 시간이다. 헌데 어떻게 된 것인가. 저들은 방어선을 뒤로 미루고 있다.
마치 최후방에서 모든 전력을 모아 방어하려는 것처럼.
"설마…!"
무언가 떠올린 것일까.
그가 눈을 크게 떴다.
* * *
- 제 2거점의 병력을 모두 3거 점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지금은 방어진 형성과 발리스타 설치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그래. 서둘러야 한다. 놈들이 언제 올지 모른다."
-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통신이 끊겼다. 나는 고개를 끄 덕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내가있는 곳은 뒤랑텅 보급 기지의 회의실이었다. 그곳에 자리 해있는 인물들의 모습이 보인다.
4, 5, 6군단의 선발상륙대 천인 장들, 그리고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의 단장 제피르까지.
이들이 우리 선발상륙대의 최고 지휘관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병력의 재배치는 끝난 것 같군요."
말을 올렸다. 지금 이자리에는 나보다 직급이 높은 제피르 단장이 있었기에.
"그럼. 이제 작전계획을 알리겠습니다."
지휘봉을 들어올려, 지도를 짚었다.
"지금 저희가 방어진을 형성하고 자 하는 곳은 이곳, 제 3번 거점입 니다. 이곳에 일만의 보병대를 모아 방어진을 꾸리고 있지요."
놈들은 보급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제 3거점에 당도하리라.
나는 가진 병력을 모아 그들을 막아낼 셈이었다.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 있으니까.
시선을 돌려 한 인물의 이름을 부른다.
"제피르 단장 각하."
제피르.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단장. 그에게 물었다.
"적의 일반 보병전력 2만. 소거 할 수 있으십니까?"
사실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후욱. 제피르가 연초 연기를 뿜 으며 답한다.
"그동안 우리 라브리에의 화력은 잘 보아왔지 않나, 한지훈 천인장. 이거 섭하군그래."
저자신만만한 표정을 보고 싶어 서 던진 질문이었을 뿐.
나는 씩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적 보병대의 소거는 맡기겠습니다."
"그래."
이쪽으로 쳐들어오는 카렌 왕국 군에게는 마법사가 없다. 놈들의 전투마법사는 모조리 북부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즉 놈들에게는 마법전력이 전무. 라브리에의 화력을 고스란히 감당 해야 하리라.
물론 그렇다 한들 만만한 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지훈, 명심해야 해. 우리 마법사들이 화력을 발하는 것은 안전이 확보되어있을 때뿐이다. 하지만 놈들에게는 기사단이 있지."
그렇다.
기사단. 놈들이 문제였다.
"고작 1만의 병력으로는 적 기사단의 돌진을 제대로 저지할 수 없을 거다. 그리고 우리 전투마법사는 기사들에게 취약하지. 놈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 알고 있나?"
마법사는 원거리에서 강하다. 그들은 합동마법을 발현해 강대한 화력으로 적 보병전력을 쓸어버릴 수 있으며, 건축물 등을 부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거리에서, 안정적으로 화력을 투사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기사를 저지해야 한다. 한지훈 천인장.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기사단이 없지."
기사는 강력한 돌진능력을 가지 고 있다. 고작 일만의 병사들로는 그들의 질주를 저지할 수 없다.
기사를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기사뿐.
"마법을 운용하기 시작한다면. 기사 놈들은 우리 마법사를 노리고 돌진해올 거다."
그리고 우리는 기사가 없다. 그 말인 즉, 놈들이 돌진해온다면 저지 하기 상당히 힘들 것이란 이야기.
후욱. 그가 다시금 연기를 내뿜었다. 회색 연기가 공기 중에 희석 되어 점차 흐릿해진다.
매캐한 연초향. 나는 손으로 연기를 휘저으며 대답한다.
"물론 방법은 있습니다."
"그래. 무슨 방법이 있지? 어서 한번 말해보게. 한지훈 천인장."
치이익. 제피르가 연초를 손가락 으로 비벼 끄며 그리 물었다.
나는 지휘봉으로 지도의 한지점을 가리켰다.
"… 흐음."
제피르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그려진다. 나는 지휘봉으로 짚은 장소를 재차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이 고지대에 봉화탑이 있습니다."
"봉화라…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나?"
"아마 맞을 겁니다."
"그런 구닥다리 시설이 아직도 있다니. 적어도 고대전쟁 시절의 물건일 터일 텐데."
봉화峰火.
나라에 사변이나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 불을 피워 알리는 그것이 맞다.
물론 지금 시점으로선 구닥다리 시설물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나통신이 상용화된 이 세상에서 불을 이용한 장거리 신호 체계 따위는 불완전하고 조잡한 것이었 으니까.
하지만 그 시설물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퍽 쓸 만했다.
"이곳에 설치된 봉화탑은 꽤나 대형 구조물입니다."
아까 전 직접 가서 그 모습을 확인했었다.
과거 고대시대에는 나름대로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일까. 봉화탑은 퍽 커다란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폭은 대형 등대마냥 넓었고, 높이는 사오 층정도.
말이 봉화탑이지, 백인대 정도가 주둔할 수 있는 소형요새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구조물이다.
당연히 탑이니만큼 시야는 제대로 확보되어 있다. 그곳이라면 보급 로를 제대로 관측할 수 있을 터.
"저 봉화탑에 라브리에 전투마법 단을 배치할 겁니다."
"흐음."
제피르가 지도를 바라본다.
그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훑었다. 거리를 가늠하는 모양.
잠시 지도를 살피던 그가 쯧쯧 혀를 찼다.
"안일하구만, 한지훈 천인장. 물론 봉화탑은 그 자체로 훌륭한 방어구조물이다. 높이는 낮은 성벽 정도에, 시야까지 제대로 확보되어있지. 하지만 보급로와 너무 가깝다."
그의 말대로. 봉화탑이 설치되어 있는 고지대는 보급로와 그리 멀지 않았다.
일반 보병대라면 힘들겠지만, 힘 좋은 전투마를 탄 기사들이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할 거리.
"우리 마법단이 적 근위군단을 전멸시키기 이전에, 기사 놈들이 들 이닥칠 거다. 기사의 기동력은 얕볼 수 없으니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 봉화탑에 기사들이 당도 할 것이라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 또한 아무런 생각 없이 저곳에 마법사들을 배치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제가 입구를 틀어막을 겁니다."
"입구를?"
"그렇습니다."
봉화탑의 높이는 사오 층 정도. 제아무리 오러로 신체능력을 강화 한 기사들이라 한들 기어오르기 힘 든 높이다.
즉 입구로만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입구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폭도 좁지요."
문득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과거 공국전쟁, 갈레이 요새 공성전 당시 나는 오러를 각성해 성문을 사수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저 혼자 입구를 사수하겠습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좀 더 오래 버텨야 할 뿐.
"제피르 단장 각하께선. 봉화탑 옥상 전망대에서 광역마법을 퍼부 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마법사들이 적을 유린할 동안, 나는 일층 입구에서 열심히 기사 놈들을 썰어대면 된다.
물론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놈들의 진군을 지연시킬 때와 달리,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다. 도 주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능력치와 스킬을 키 워왔다 한들. 이번에는 정말 목숨이 위험할 터.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오직 나만이 저기사 놈들을 막을 수 있으니 .
"제목숨을 걸고 각하와 마법사들을 지켜드리지요."
마법사들을 지킨다면 전투에 승리한다.
제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