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지도를 내려다본다.
지도에는 많은 것들이 표기되어 있었다.
섬세한 등고선으로 표기되어있는 지형의 높낮이. 나무를 비롯한 여러 엄폐지형. 보급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길목. 미리 파악해뒀던 매복거점 들까지.
"카렌 놈들. 조사를 참 열심히 해뒀어."
이곳 뒤랑텅 보급기지는 카렌으로서도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렇기에 놈들은 정찰과 지형조사에 품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놈들이 그토록 공들여 만든 전술지도는 지금 내 손에 들려 있으니 .
나는 지도의 여러 길목을 손가락 으로 짚으며 입을 열었다.
"놈들은 기존 보급로를 통해 밀 고 들어올 거다."
수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은 기존 보급로가 유일하다.
분명 이쪽으로 밀고 들어올 터.
고개를 돌려 천인장들에게 묻는다.
"여기 뒤랑텅 보급기지에 있는 물자 목록. 찾았나?"
"여기 있다. 한지훈 천인장."
내가 묻자, 다른 군단의 천인장 이내게 어떤 목록을 건넸다. 이 보급기지에 있던 물자들이었다.
그것을 받아들고는 읽어나간다.
피식. 내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쓸 만한 게 꽤 많군그래."
이곳 뒤랑텅 보급기지는 카렌 침공군 전체에게 물자지원을 하는 중간거점이었다. 자연히, 많은 물량이 쌓여있다.
나는 목록에서 어떤 것을 눈여겨 본다.
"발리스타. 이게 있다면 기사 놈 들을 견제 정도는 할 수 있겠어."
발리스타. 우리가 상륙할 때 뗏 목을 파괴했던 그대형병기.
그 발리스타가 무려 30여 기나 있었다.
물론 이것들로 기사들을 모조리 사냥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놈들의 돌진 속도를 죽이는 것은 가능 할 터.
"그리고. 포션이랑 마나포션도 넉 넉한데."
있는 것은 발리스타뿐만이 아니었다.
포션과 마나포션류 또한 꽤나 많은 양이 비축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많은 양이라면, 병사들에게까지 포션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
병력은 열세지만 소모품은 넉넉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려 천인장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주목."
내 말에 회의실 안 모든 천인장 들이 집중한다.
나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연전을 펼치겠다."
눈동자를 굴려, 시야 한켠에 떠 올라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서브 퀘스트]
[1. 상륙 후 거점을 청소하라.(완료)]
[2. 본대가 올 때까지 거점을 사수하라.]
본대가 올 때까지 거점을 지켜야 한다. 다른 군관들이라면, 이곳 거점지역에 틀어박혀 농성하는 것을 택하리라.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놈들의 전력이 너무나도 압도적 이다. 회전으로 붙는다면 순식간에 쓸려나가겠지."
무려 일천의 기사와 이만의 대군 이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순식간에 박살날 뿐이다.
요새처럼 그럴듯한 방어거점이 있었다면 그곳에 전 병력을 밀어 넣어 방어할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 도 이 지역에는 별다른 요새가 없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뒤랑턴 보급기지도 실상은 커다란 창고에 여러 건물이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 .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은 지연전 이었다.
"자, 지도를 봐라."
지휘봉을 집어 들었다. 천인장들 의 시선이 지도로 향한다.
나는 지휘봉으로 지도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보급로의 지형은 그리 평탄하지 않다."
이곳은 제국 북부. 그리고 북부는 총독령과 달리 지형이 퍽 험한 편이었다.
이곳저곳에 울창하게 자라있는 숲. 드높게 솟아있는 산맥들. 다양 한 언덕지형들까지.
병력을 매복시킬 장소는 많다.
"다수의 방어구획을 만들겠다."
나는 지휘봉으로 보급로의 몇몇 지형을 두드렸다.
"이곳, 이곳, 이곳에서 적을 상대 하며 진군을 지연시킬 거다. 편의상 1번 거점, 2번 거점, 3번 거점이라 고 부르지. 각각의 거점에 오천씩 병력을 배치한다."
모두 보급로 중 울퉁불퉁한 지형을 지녔고, 울창한 숲이 자리해있는 곳이다.
저 각각의 거점에서 적을 마주해 싸우고, 최대한의 시간을 소모하게 한 뒤 뒤로 퇴각한다면 최대한의 시간을 벌 수 있을 터.
내가 계속해 설명하려 하는 그때였다.
"잠깐만. 한지훈 천인장."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4군단 최선임 천인장, 테리 에저턴이었다.
녀석이 말한다.
"병력을 세 개로 나눈다는 말. 진담인가?"
"그래."
고개를 끄덕여 수궁했다. 그러자 녀석이 이를 갈았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거점의 병력은 모두 죽는 게 아닌가!"
세 개의 방어거점. 놈들은 1번 거점부터 쳐부수며 밀고 들어온다.
당연히 앞자리의 거점일수록 위험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터.
"이래서야 버림말과 다른 게 무엇인가!"
쿠웅! 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확실히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희생을 전제로 한지연전이라. 절대 훌륭한 병력운용이라고 볼 수는 없었으니 .
허나 어쩔 수 없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테리에 저턴 천인장."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부대가 전멸하리란 걸 알아도 사지로 밀어 넣어야 해. 그래야 본 대가을 시간을 벌 수 있다."
"한지훈 천인장! 정녕…!"
"말했지 않나. 피로 만든 제방을 쌓을 거라고."
피로 만든 제방. 그건 절대 과한 비유가 아니었다.
"그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놈 들을 지연시켜야 한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전투의 승패가, 제국 북부전선의 전체 전황을 좌우한다는 걸."
이곳 드발트 강 유역은 놈들의 보급로였다.
이 장소를 제국이 장악한다면. 카렌 침공군 놈들을 말려죽일 수 있다. 이번 전투만 끝낸다면 무려 십 수만 단위의 거대한 적을 무너 뜨릴 수 있는 것이다.
"고작 일만 오천의 병력으로 놈 들을 고사시킬 수 있다면. 비교적 싼 대가지."
버림말. 사실 내게는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를 플레이 할 때 무수히 다루었으니 .
"… 한지훈. 네놈은 미쳤다."
"미친 건 내가 아니라 이전쟁이 야. 테리 에저턴 천인장."
"병사들에게 죽으라는 소리를 그토록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건가!"
분통을 터트리는 테리 천인장.
나는 싱긋 웃어 보이며 말한다.
"할 수 있지. 적어도 나라면 말이야."
철그럭. 테이블 한켠에 세워뒀던 장검을 집어 허리춤에 찼다.
"내가 제일 위험한 역할을 맡을 거니까."
"위험한 역할이라. 그게 뭐지?"
녀석이 이를 갈며 이쪽을 노려본다. 나는 투구를 뒤집어쓰며 이어 말했다.
"적 기사단. 내가 막아보지."
"… 그게 무슨."
"목록을 보니 전투마 몇 필이 있더군."
기사. 오러를 다루는 강자들.
그들은 전투마를 몰고 전열을 돌파, 전장을 관통하며 대열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기사 놈들이 전투에 고스란히 투입된다면. 우리군은 순식간에 갈 기갈기 찢겨질 거다."
일반 병사들로 이루어진 우리 선 발 상륙대로서는 놈들을 절대 상대 할 수 없다.
일반 보병대는 오러를 다룰 수 없으니까.
"누군가가 기사를 상대해야 해."
하지만 나라면.
시스템의 보정을 받고, 그동안 능력치를 키워온 나라면.
"내가 놈들을 상대해 최대한 주의를 끌지. 그렇다면 보다 오래 버 틸 수 있을 거다."
유저인 나라면 녀석들을 상대할 수 있다.
오직 나밖에 할 수 없는 일.
나직이 읊조렸다.
"내 정보."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한지훈][아펠도른 천인장]
[스킬 : 천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중급)]
[스킬 : 기마술(중급)]
[스킬 : 투창(입문)]
[스킬 : 은신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근력 50]
[민첩 153]
[내구 51]
[체력 51]
[마나 128]
(남은 포인트는 70pt 입니다.)
가지고 있는 포인트는 70pt. 쓸 때가 되었다.
두두두두두.
전투마들이 달려 나간다. 말발굽 이 지면을 박차고, 번쩍이는 전신갑 주가 막 떠오른 태양의 노을빛을 반사했다.
가장 선두의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에는 카렌 왕실의 문양이 커다 랗게 박혀있었다.
"킬리언 왕실 기사단장 각하. 곧 도착입니다."
"으"
부단장의 말에, 왕실 기사단장 킬리언 린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곧 뒤랑텅 보급기지지."
그는 그리 읊조리며 뒤를 바라봤다. 많은 인영이 보였다.
자신을 따르고 있는 왕실 기사단 의 단원들 약 팔백여 명. 그리고 보다 배후에서 뒤따르는 근위군단 약 이만의 군세.
"쉬운 싸움이다."
그는 그리 중얼거리며 전투마의 배를 박찼다.
콰앙! 두두두두!
그에 가속하는 전투마. 그런 그 를 따라 후속 기사들 또한 속도를 올렸다. 팔백의 기사들이 보다 빠른 속도로 기동한다.
"적의 전력은 고작 일만 오천. 모두 일반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킬리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전방으로 향한다.
보이는 것은 질척한 지면. 밤새 쏟아져 내린 폭우 때문에 이곳저곳에 물웅덩이가 생겨나있다.
"우리를 막을 적은 없다."
파앙!
그가 고삐를 옆으로 당겨 방향을 바꿨다. 그에 전투마는 능숙하게 진로를 틀어 물웅덩이를 피해간다.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터."
킬리언은 그리 단언했다.
합당한 추론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결코 기사들에게 대항할 수 없으니 .
압도적인 살육을 벌일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혀 긴장하지 않는 킬리 언이었다.
그런 그의 단언에 부단장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단장 각하."
"소문이라. 그게 뭐지? 부관."
"제국의 악마 말입니다."
제국에는 악마 같은 군관이 있다는 소문.
킬리언 또한 그의 소문을 들었다.
"한지훈 천인장이라고 하던가."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 를 가진 제국의 장교.
그는 공국 전쟁 당시부터 무수한 전공을 올렸고, 여러 고귀 군관들을 처치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소문은 이미 카렌의 군관들에게도 유명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크라그 연대의 더스틴 연대장도, 동부 침공군 총사령관 페다라 루고 후작도. 모두 놈에게 당해 전사했습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도 크게 활약 하고 있었으니까.
한지훈 천인장은 루벤 방면에서 정예부대였던 크라그 연대를 격파 했었으며. 동부 침공군 총사령관 페 라다 루고 후작과 그의 참모부를 전멸시키기도했다.
"그런 제국의 악마가 저기, 저희 가 가는 곳에 있습니다. 긴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부단장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제국의 악마를 자신들이 조우하 게 되었다. 수많은 고위 장교와 사령관들을 참살했던 그와, 직접 칼을 맞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허나 그런 부단장의 염려 섞인 말에, 킬리언 단장은 쯧쯧 혀를 찼다.
"부단장. 네 녀석도 참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킬리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리해있는 것은 자신과 함께 나아가고 있는 팔백의 기사들.
"우리 왕실 기사들의 수가 무려 팔백이다."
팔백의 기사들. 절대적은 수가 아니다. 더해 그들은 모두가 정예인 왕실 기사단의 단원들이었으니 .
"하지만 놈은 혼자지. 우리가 상대할 적들 중, 오러를 다루는 것은 오직 놈 하나뿐이란 거다."
반면 한지훈 천인장은 혼자였다. 만약 기사들을 상대해 전투하려 한 들. 그 하나밖에 전력이 되지 않는 단 소리였다.
"놈이 제 아무리 강하다 한들. 혼자서는 우리를 이길 수는 없다."
개개인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 압도적인 숫적 차이를 메꿀 수는 없다.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었 으니까.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 치워라, 부단장. 곧 있을 전투에 집중하도록."
"알겠습니다, 단장 각하."
부단장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다. 킬리언 단장은 고개를 돌려 다시금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 잠깐."
막 앞으로 향한 그의 시야 속.
어떤 인영이 보였다.
"저놈은 뭔가?"
단 한 명의 인영이었다.
마치 대로를 틀어막듯 서 있는말. 그리고 그 위에 탑승해있는 한 명의 기수.
"…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 라면. 제국군 군관인 것 같습니다 만."
그리고 기수는 제국군 경갑과 전투복을 장비하고 있었다.
피식. 킬리언은 입가를 비틀어 비웃었다.
"겁쟁이 제국 놈들. 보아하니 항복사절이로군."
킬리언은 저 한 명의 기수를 항복사절이라 여겼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기사 팔백, 병사 이만이 남하해오는 와중이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혼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 .
전투를 위해서 나왔다기보다는, 항복을 청하기 위해 등장했다고 여기는 것이 합당.
하지만 그런 그의 추론은 빗나간 듯했다.
파앙!
제국군 군관이 말의 배를 찼다. 그에 말이 지면을 박차고,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한다.
"… 뭐?"
전혀 예상외의 행동.
킬리언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그의 옆에 있던 부단장이 경악해 소리쳤다.
"단장 각하! 저놈'!"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이쪽 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군관을 가 리킨다.
"놈! 놈의 머리색을 보십시오!"
부단장의 외침에 킬리언은 제국 군 군관의 머리색을 바라봤다.
아직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기에 잘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 러를 다루는 기사. 마나로 시력을 강화하자,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검은색…."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는 군관의 머리색은 분명 검은색이었다.
부단장이 소리친다.
"저놈! 제국의 악마입니다!"
제국의 악마. 천인장 한지훈. 그가 돌진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