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왕실 마법단장. 대법의 준비는 어떻게 되었는가."
카렌 왕국의 알현실. 옥좌에 앉 은 거한이 그리 물었다.
라피엘 데이고르 카렌. 카렌 왕국의 국왕.
그의 물음에 마법단장이 답한다.
"모든 준비는 완성되었습니다. 지시하는 즉시 마법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
라피엘은 마법단장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였다.
그가 시선을 돌려 지도를 바라본다.
"보급로를 잃을 수는 없지."
카렌 국왕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 은 드발트 강 유역. 카렌 침공군의 보급로다.
저곳에 제국군이 상륙하고 있다. 막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 왕실 기사단과 근위군단을 저곳으로 보냈다.
물론 라피엘은 단순히 지원군을 보내는 것으로 손을 떼지 않았다.
"기상조작 마법."
말 그대로 기상을 조작하는 마법 이다. 비를 내리고, 눈을 몰아치게 하며, 습도와 온도마저 조율하는 .
라피엘은 왕실 마법단에게 기상 조작 마법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놈들이 강을 건너게 둬선 안된다."
제국의 대규모 군대가 드발트 강을 도하, 카렌의 보급로를 치는 상황이다.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
기필코 사수해야 한다.
"당장 마법을 발동시켜라."
"명령을 받듭니다. 국왕 전하."
왕실 마법단장이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들고, 무어라 읊조렸다. 그러자 이변이 일었다.
쿠르르르르….
장중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이곳 카렌 왕궁 어딘가에 모여 있는 왕실 마법사들이 기상조작 마법을 발현한 것이다.
"폭우를 내려라."
라피엘이 천천히 걸어가, 알현실 한켠에 나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본다.
야심한 밤. 어둑한 밤하늘.
그리고 그 밤하늘에는 푸른색 마법진히 고고히 떠올라 있다.
쿠르르르르…
계속해 중첩되며 마법진은 그 기 세를 키워갔다.
"대량의 물을 대지에 흘려라. 강을 범람시켜라. 유속을 높여라."
놈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번쩍!
마법진이 환한 빛을 흩뿌렸다.
기상조작 마법이 발동된다.
"문제가 생겼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스카 군단장 각하."
표정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적의 거점을 장악했다. 수장인 체르반 벨레 보급사령관을 처치했다. 임무를 완수했다.
이제 아군의 주력을 기다린 뒤.
완전히 보급로를 장악하기만 하면 모든 작전이 끝났을 터인데.
난데없는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 하늘을 보게. 한지훈 천인장.
수정구에서 오스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에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내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구름…."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아까 전 뗏목을 타고 도하 를 할 적만 해도 밤하늘은 깨끗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반짝이는 별무리들만이 시야를 메웠었다.
헌데 어떻게 된 일인가.
"먹구름."
하늘이 시커멓게 뒤덮여있다. 그 잠깐 사이 난데없이 두터운 먹구름 이 낀 것이다.
오스카가 고한다.
- 카렌 놈들이 기상조작 마법을 발현했다.
"기상조작 마법이라니."
- 왕실 마법사들을 움직인 거다. 우리가 강을 도하하는 걸 대비해 미리 준비해뒀겠지.
"망할."
쯧 혀를 찼다.
전혀 예상외의 상황이다. 설마 카렌 놈들이 도하를 막기 위해, 기상조작 마법까지 운용할 줄이야.
"놈들도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군요."
- 그렇지. 그럴 수밖에. 이대로 보급로가 차단당하고 놈들의 침공 군 배후에 우리가 자리잡는다면. 녀석들은 필히 패망할 터이니.
투두둑. 투둑. 투두두둑.
빗방울이 떨어져 내 투구를 두드렸다.
- 한지훈 천인장.
투두둑. 투둑. 투두두둑.
빗방울이 조금씩 거세게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내 전투복이 젖어 갔다.
- 폭우가 내릴 거다. 그리고 지금 당장 전 병력이 도하할 준비는 하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우리 선발대가 먼저 도착한 이유.
본대가 안전히 도착할 거점을 확보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전 병력 이 도하할 만한 뗏목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급한 대로 밀어 넣은 탓도 있었다.
즉 지금 당장 본대는 강을 넘어 올 수 없다.
- 그리고 적의 지원군, 근위군단 과 왕실 기사단이 그쪽으로 가고 있지.
솨아아아아-.
거센 비가 내린다. 차가운 물줄기가 투구를 타고, 내 전투복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 자네에게 3, 4, 5군단의 모든 선발상륙대 지휘권을 부여하지. 스스로 상황을 보아 결정하게.
"결정하라 하신다면."
- 폭우가 멈출 때까지 해당 거점을 계속 지킬지, 아니면 다른 방향 으로 후퇴할지.
콰르르르릉!
천둥번개가 쳤다. 밤하늘이 한순간 번쩍인다.
- 다른 특이상황이 발생한다면 바로 전파해주지. 통신 종료. 무운을 빈다, 한지훈 천인장.
통신이 끊겼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엿 같은 날씨야."
그리고 엿 같은 상황이다. 비가 쏟아져 내린다.
"상황은 모두 전파받았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모든 전투를 마친 뒤. 카 렌 놈들의 주둔지였던 뒤랑텅 보급 기지에 집결했다.
기지를 장악하는 과정에 약간의 소요가 있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점거할 수 있었다. 적의 병력은 강변에서 거의 죽었기 때문에.
나는 회의실 안에 자리 잡은 이들을 바라봤다.
모두 천인장 계급을 가진 이들.
"폭우가 내린다."
콰르르르릉!
내가 그리 말할 때 밖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밖에는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내리고 있다.
"이 염병할 기상조작 마법은 내일 아침, 동틀 무렵까지 이어질 거라 한다. 그리고 너희들도 알다시피 동틀 무렵에는…."
"적의 지원군이 오지."
누군가가 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시선을 돌려 녀석을 바라본다.
"왕실 기사단. 그리고 근위군단이 말이다."
천인장임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말인 즉 내가 소속된 3군단이 아닌, 4군단 혹은 5군단 휘하 의 천인장이라는 소리.
그의 정체는 곧 알게 되었다.
"4군단 선발상륙대 최선임 천인 장. 테리 에저턴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머저리인가.'
적 초병에게 도하하는 것을 들킨 4군단의 머저리 지휘관.
그가 입을 열었다.
"승산이 없다. 적이 너무 막강 해."
테리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인지. 회의실 안에 자리해있는 여러 천인 장들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적은 왕실 기사단. 그리고 근위 군단이다. 기사가 최소 오백, 최대 천에 이를 것이고. 근위군단도 그 규모가 이만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선발상륙대 뿐. 남아있는 병력이 고작 일만 하고도 오천에 불과하다."
이번 도하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각 군단별로 6개 천인대. 도합 18개 천인대였다.
무려 1만 8천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
그중 3천의 병력은 도하작전 와 중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이제 남 아있는 병력은 1만 5천 정도.
"기사는 전무. 마법사는… 제시간에 맞추기 힘들지."
기사는 거점이 안정화 된 뒤 본대와 함께 도하하기로 약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폭우로 도하가 불가능해 진 지금 그들은 넘어올 수 없다.
그리고 마법사 또한 당장 넘어올 수 없었다.
막 비콘을 설치했기에. 아군 마법사들이 아직 좌표계산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는 것은 최소 동이 틀 무렵이리라.
"기사도. 마법사도 없다. 일만 오 천의 병력은 모두 일반 보병들 뿐. 반면 이쪽으로 오고 있는 적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우리를 압도 하고 있지."
적은 기사를 보유하고 있다. 더 해 근위군단은 카렌 왕국의 가장 정예군이다.
"승산이 없다."
승산이 없다 보는 건 당연한 일. 때문에 그는 내게 제안했다.
"퇴각하세. 한지훈 천인장."
"퇴각이라."
"승산 없는 싸움이다. 차라리 이 보급기지를 불태우고 퇴각한다면. 병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다."
피식.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었기에.
"테리 에저턴 천인장."
입가를 비틀며 녀석에게 물었다.
"어디로 퇴각한다는 말이지?"
"… 음."
내 말에 테리 에저턴 천인장이 입을 닫았다.
"알고 있을 텐데. 우리는 본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
폭우가 내려 강물이 불어나고, 그 유속도 너무나도 거세졌다.
이런 상황에서 뗏목을 타고 되돌 아가는 건 훌륭한 자살행위다.
"그렇다고 이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간다 한들. 우리는 지리를 모르지. 보급도 해결할 수 없고. 게다가 이곳은 적진이다."
지금 우리는 앞뒤로 포위되어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남쪽으로는 카렌 침공군 주력. 북쪽으로는 왕실 기사단과 근위군단이 남하해오고 있다.
보급도, 정보도, 아군도 없으니 .
"다른 방향으로 가봤자 사냥당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솔히 부대를 움직인다면 철저히 유린당하는 것이 분명할 터.
나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 봤다. 밖에는 지랄 맞은 폭우가 떨 어져 내리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직이 고한다.
"이 염병할 폭우가 그치고 아군 본대가 올 때까지. 죽기 살기로 버 틸 수밖에 없다."
사실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버텨야 한다.
"지도 가져와."
적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올 것이다.있는 것이라고는 1만 5천의 목숨들 뿐.
이 목숨들로 제방을 쌓아, 적의 파도를 막아야 한다.
"피로 만든 제방을 쌓자."
많은 목숨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지도를 내려다봤다.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이 활성화 됩니다.]
스킬이 활성화 되었다.
"그래. 한지훈 천인장은 거점을 사수하기로 결정한 것인가."
오스카 군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그는 부관에게 어떤 보고를 받았다.
선발상륙대를 지휘하고 있는 이, 한지훈 천인장이 거점 사수를 결정 했다는 소식.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지. 갈 곳도 없으니 ."
오스카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제피르."
오스카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제피르가 있었다.
라브리에 마법전투단의 단장. 정 복전쟁 당시 영웅훈장을 수훈받은 제국의 전쟁영웅. 강대한 마법사.
그가 오스카의 앞에 마주앉아 연 초를 태우고 있다.
"초장거리 도약마법. 발현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음…."
오스카의 물음에 제피르는 턱을 궤고 생각한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대답했다.
"날씨가 좋았다면 두 시간이면 가능했겠지만. 폭우가 심하기에 공간을 접붙이기가 난해하군. 최소한 여섯 시간은 걸리겠어."
"여섯 시간이라…."
오스카의 눈가가 찌푸려진다.
"그때쯤이면 동이 트고도 한참 뒤군."
"그렇지. 카렌 놈들이 들이닥치고 한참 싸우고 있을 때다."
"빌어먹을."
으드득. 오스카가 분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기상조작 마법이라니! 이쪽의 허를 제대로 찔렀어."
"카렌 놈들, 머리를 좀 굴리는데 . 설마 전투마법사가 아닌 일반 마법사들을 전투에 유용할 줄이야."
후욱. 제피르가 연기를 한 차례 내뿜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이 기상 조작 마법을 어찌할 수 없다."
제피르는 전쟁의 전문가였다. 그는 대량의 마나를 운용. 강렬한 화력을 지닌 파괴마법으로 전장의 적을 학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기상조작 마법을 어찌 할 수는 없었다.
"내 전문은 전투마법이다. 이런 기상조작 따위 전혀 모르는 분야지."
기상조작은 전투계열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전투마법사인 그는 오직 같은 전투마법을 파훼하고 해체할 수 있을 뿐이다.
"표정이 안 좋은데 그래. 오스카."
치익.
제피르는 손가락으로 연초를 비 벼 꺼트리고는 오스카를 바라봤다.
오스카의 얼굴표정은 무겁게 가 라앉아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피르. 강 너머의 선발대가 전 멸당 할 위기다."
선발상륙대는 강 너머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고립되어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것은 저쪽의 전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전력의 적. 1천의 왕실 기사와 2만의 근위군이다.
버틸 수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한지훈 천인장이 죽을 수도 있단 말이다."
그 선발대를 지휘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한지훈이었다.
최근 제국 영웅훈장을 수훈받은 인물. 일개 병사에서 시작해 무수한 전공을 쌓아 단기간에 천인장이 된 입지적인 인물.
"그리고 한지훈 천인장은. 우리 제국의 영웅이지."
제국 영웅 한지훈 천인장.
점차 한지훈의 위명이 퍼지고 있다. 그리 머지않아 제국의 모든 신민들이 그의 이름을 알 것이고. 그는 제국의 영웅으로서 찬란한 빛을 드리울 것이다. 제국의 사기를 끌어 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직 한지훈이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
"한지훈의 죽음은 제국의 패배다.
녀석을 죽게 할 수는 없어."
그가 죽는다면 영웅은 없다. 죽 은 영웅은 없는 것만도 못하니.
사기가 하락하리라. 제국의 기세 가 곤두박질치리라.
그렇게 된다면 이전쟁이 더욱 힘들어지게 될 터.
피식. 제피르는 오스카 군단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스카. 녀석이 죽을까 불안하나 본데."
"… 당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제피르는 단언한다.
"한지훈은 허무하게 죽을 녀석이 아니다."
오스카는 시선을 돌려 제피르를 바라봤다. 눈동자를 주시했다.
제피르의 눈동자에는 한 점 흔들 림 없었다.
확신이 그득한 눈빛.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한지훈이란 놈을 나름대로 오랫동안 보아왔지."
공국 전쟁 초창기. 그를 처음 만 난 이후.
"녀석은 항상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일들을 해냈다."
매번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전세를 뒤집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장을 관통했다. 강렬한 카리스마 로 휘하 부대원들을 사로잡았다. 전투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동안의 놀라운 활약들.
때문에 그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지훈은 이번에도 활약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겠지. 언제나처럼 말이다."
"자, 녀석을 믿고 기다리지."
군단은 폭우가 멈추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