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시스템의 개입을 절삭한다니…."
엘리스의 말에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세계검. 그저 온갖 부정한 것을 잘라내 소멸시키는 성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라 한다.
"이름 없는 별 한지훈. 전의 시나리오에서 우리 연합이 세계검을 만들었던 이유는 그대가 이 세상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지요."
엘리스가 천천히 걸어 창가로 다 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 허공을 바라본다.
기나긴 밤이 끝나며 점차 날이 밝아오고 있다. 붉은빛 노을이 조금씩 어둠을 몰아내간다.
엘리스는 그 붉은 하늘을 바라보 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본신은 다른 차원의 지 성체였지요. 이곳, 이 세상에서 활동하던 당신의 육신은 그저 아바타에 불과했던 거예요."
"아바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전의 시나리오에서 나는 이 염병할 세상 속에 들어 오지 않았다.
그저 키보드와 마우스를 쥐고, 모니터와 스피커의 자극을 받으며 '플레이' 했었다.
과거 시나리오에서 활동했던 내 캐릭터들은. 그저 내가 조종하던 단 말들에 불과했으니 .
"전의 시나리오에서. 당신은 죽여도 죽지 않았지요. 그저 시간을 되 돌려, 다른 아바타를 조종해 이 세상에 개입해 올 뿐."
엘리스는 전의 시나리오에서 내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그녀는 계획했다.
"그래서 만든 게 세계검이에요. 시스템의 개입을 없애기 위해. 상위 차원의 인간이, 당신이라는 인물이 더 이상 세상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만든. 시스템의 개입을 절삭해 제거 하는 검."
전생의 엘리스는 그저 나를 막아 내기 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했다.
상위차원 그리고 시스템의 개입을 절삭한다.
그녀는 그것을 원해 세계검을 만들고자 했고,
"결국 실패했었지만요."
실패했다. 내 제국군이, 그리고 흑마법사들이 협력해 그들을 완전히 밀어버렸기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건 운명의 장난일까요. 전생에 세계검으로 처단하고자 하던 이가 아군이 되었고, 세계검을 경계하던 흑마법사들이 오히려 세계검을 만들고자 하고 있으니 ."
"엘리스."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때문에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온화한 황금빛 눈동자가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너는 나를 증오하지 않는 건가?"
물을 수밖에 없다.
아직도 또렷히 기억나기에.
[엘리스]
[엘프 여왕]
["아아… 그대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요. 모를 수밖에요."]
세계수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모습.
엘프 여왕 엘리스. 그녀는 내 군단과 흑마법사들의 협공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이 보살펴야 할 일족도. 지켜야 할 엘프의 숲도. 그들의 영물 인 세계수도.
[엘리스]
[엘프 여왕]
["당신이 이 세상을 멸망시킨 거예요. 한지훈."]
이 세상 그 자체도.
모조리 내가 빼앗아버렸다. 소멸 시키고 파괴했으며 타락시켜버렸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내게 자애로 운 미소를 짓고 있다.
어째서.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찢어 죽여도 모자라지 않은 원수에 불과할 터인데.
"증오라…."
내 물음에, 그녀는 씁쓸한 미소 를 지었다.
"했었지요. 예전에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
"네. 당신도 피해자이니까요."
엘리스가 이쪽으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그녀가 나직이 말을 이은다.
"저도 본래 당신을 증오했지요. 하지만 계속 이전의 운명들을 읽고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알 수 있었지요."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침묵하더 니, 나직이 말했다.
"당신 또한 시스템에 희생되었던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지. 엘리스."
"시스템은, 그리고 시나리오는 당신을 계속 학습시켰어요."
"학습이라 하면."
"인간성을 버리는 학습이요. 한지훈 씨."
인간성을 버리는 학습이라.
"당신은 처음부터 승리를 위해 뭐든 하진 않았어요."
아무래도 엘리스는 내가 마지막 으로 플레이했고 최초로 게임을 클 리어했던 '척후조장 한지훈' 이전 의,
"당신이 다루었던 아바타들. 다양했지요. 어떨 때는 반란군을 진압하는 치안군 십인장으로, 어떨 때는 기병들의 편대장으로, 어떨 때는 궁 병조 조장으로…."
과거 게임오버 되었던 다른 시나리오까지 읽은 듯했다.
"시나리오는 계속해 당신에게 비 인간적인 선택을 강요했어요. 승리 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런' 선택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과거 게임을 처음 할 적의 일을 떠올린다.
[그라스 리 바르티아][백인장]
[방어지시]
["역적 놈들은 이 길목을 타고 침입해 올 것이다. 길목을 사수하라. 절대, 물러서지 마라."]
[좌표 A31]
불가능한 임무를 부여했던 내 첫 상관.
당시에는 그저 임무대로 골목을 지켰다. 병력을 배치하고, 반군이 지나치지 못하게 지켰다. 그리고 당 연하게도,
[게임오베전멸당해 게임오버 당했다. 적인 반란군들의 병력이 이쪽을 훨씬 상 회했으니까.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 미션을 클리어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마을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다 면. 반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겠지.' 언뜻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이어 도. 그리고 불리한 전황이어도 승리 를 위한 열쇠는 반드시 있었다.
그리고 그 열쇠는 모두 그리 인간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휘하 병력을 버린다면 주력을 살 려 승리할 수 있었다.
마을을 불태운다면 정보를 차단 해 은밀히 움직일 수 있었다.
무능한 상관을 죽인다면 내가 전공을 세워 진급할 수 있었다.
흑마법사와 협력한다면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
상황이 막힐 때마다 그리고 열세에 처할 때마다 약간의 양심만 내려놓는다면 위기를 타파할 수 있었다. 계속해 나아갈 수 있었다.
"시스템이 그렇게 강요한 거예 요."
엘리스는 지금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은 시스템 때문이라고. 시스템이 나에게 계속 비인간적인 선택을 강요해, 나를 그리 학습시켰 다고 말이다.
"그러니 이름 없는 별, 아니 한지훈 씨. 저는 더 이상 당신을 증 오하지 않아요."
그녀가 내 손을 꽉 잡는다.
"당신 또한 시스템에 의한 피해자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내려 내 손을 잡은 엘리스의 손을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 봤다.
온화하고도 자애로운 얼굴표정. 그녀의 얼굴에서는 나에 대한 원망 과 증오 따위는 티끌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피식.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아니."
엘리스의 손을 뿌리친다.
"게임 속에서 승리를 위해 뭐든지 한 건, 내 선택이었다."
처음 꺼림칙한 감정을 느꼈던 것을 사실이었다. 그만큼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는 사실적인 게임이었으 니까.
유닛 하나하나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픽은 실제를 방불 케했다. 싸구려 스피커에서 흘러나 오는 소리는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
유닛의 죽음이 때때로 진짜처럼 느껴졌다. 꺼림칙한 감정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 꺼림칙한 감정은 그리 머지않아 사라졌었다.
"잠깐의 희열과 충족감을 얻기 위해 했던 일이었다."
게임이 주는 쾌락과 성취감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병력을 장기짝처럼 버려가며 전쟁을 수행했다. 적의 민간인을 학살 하고, 흑마법사들에게 실험체를 제공했다. 요새를 점령하고 도시를 불 태웠다. 산을 밀고 강을 피로 물들였다.
모니터 속 나타나는 장면이 자극적일수록 몰입했다. 식음을 잊고 시간을 갈아 넣었다.
[게임 클리어.]
그리고 마침내.
나는 게임을 클리어했고,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귀하의 시나리오가 최고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시나리오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엿 같은 세상 속에 떨어졌다.
변명하고 싶지 않다.
"중간에 그만둘 기회는 많았다."
때때로 모니터 속 인간들이 진짜 처럼 느껴질 때. 아니면 양심과 도덕의 훼손이 느껴질 때 그만둘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계속해 게임을했다. 인간성이라는 가치를 무시하고, 모니터 앞에 앉아 희열과 달성감을 ?았다.
시스템이 내 인간성을 버리도록 유도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현실을 등 한시하면서까지 게임에 몰입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내가 인성파탄자 쓰레기였기 때문에 끝까지 이 게임을 놓지 않았던 거다."
그렇기에 나는 시스템 탓이라고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쓰레기 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노라고 인 정했다.
"…한지훈 씨."
잠시 나를 바라보는 엘리스.
그녀는 재차 웃었다.
"역시. 당신은 강하군요."
"강하다니."
"변명할 수 있는데, 변명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 이지요."
엘리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녀는 다시금 창가를 향해 다가가고는, 내게 말해왔다.
"한지훈 씨. 흑마법사들의 세계검 은 아직 완벽하지 않아요."
다시금 세계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그녀가 대화 주제를 돌린다.
"본디 세계검이란 세계수를 비롯 한, 여러 고위의 격을 재료로 사용 해 만드는 것. 지금 흑마법사들의 세계검은 세계검이라 칭하기에도 아까운 졸작에 불과하겠지요."
"그렇다면 별로 위협적이진 않다는 건가."
"아니요. 그렇다 한들 결코 무시 할 수는 없어요."
철컥. 엘리스가 창문을 열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아직 미완이기에 사용하기 위해 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지요. 정해 진 때, 정해진 장소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베인다 면…."
우우우웅….
그녀의 몸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번이나 본 엘프 들의 도약마법.
그녀가 고한다.
"이름 없는 별. 당신은 모든 격 과 시스템의 보정, 그리고 운명을 빼앗기고. 목숨과 영혼을 잃겠죠."
"… 그런가."
예상하긴했다.
시스템의 간섭을 절삭한다는 것. 분명 그놈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을 터이니.
"한지훈 씨. 세계검을 완성해야 해요."
그녀의 몸이 더욱 사라져 거의 안 보이게 되었다.
"흑마법사가 세계검을 완성하게 전에. 이쪽 또한 세계검을 만들어야 만…."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지 더니, 곧 완전히 사라졌다.
적막한 방안.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은 해보지."
세계검이라. 그것이 이 개 같은 시나리오를 끝내는 열쇠이리라.
나는 엘리스가 사라진 공간을 우 두커니 서서 바라본다.
"잘 쉬었는가, 한지훈 경."
다음날 아침. 나는 황제와 만찬을 같이했다.
시선을 앞으로 두어 테이블 위를 바라봤다.
과연 이제국의 황제라는 것인 가. 지랄 맞게도 호화로운 만찬이 커다란 테이블을 그득 채우고 있었다.
그가 스푼을 움직이며 말한다.
"자네는 오늘 중으로 본대에 복 귀한다고 하지."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나 또한 포크를 들며 말했다. 그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군. 본래라면 자네의 전공을 널리 알리기 위해 퍼레이드라도 열어야 한다만."
흑마법사의 암흑진을 파훼했고, 수도를 구원해냈다. 본래라면 이 커다란 위기를 넘겨냈으니 축제라도 열어야 하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한창 피바람이 부는 와중에, 축제를 열 수는 없으니까요."
황궁 안은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저 창밖으로 보이는 황궁밖 수도는 그렇지 않았으니 .
"귀족 우월주의 파벌이 깔끔히 정리되겠군요."
창밖으로 보이는 수도의 전경에 는, 커다란 귀족 저택 몇 개가 불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수도에는 숙청 작업이 한창 이었다.
여러 고위 귀족들의 가문이 망해 갔다. 어떤 이들은 가문 자체가 멸망했고, 어떤 이들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황궁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어떤 이들은 일가족 전체가 처형되었다.
모두 귀족 우월주의 파벌에 속한 가문들이었다.
황제는 휘하 근위군과 중앙군을 움직여 게딘 알키온과 흑마법사에 게 협력했던 가문들을 하나둘 그 공과를 따져 숙청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귀족 우월주의 파벌이 청소되었 으니 , 이제 우리 제국은 더욱 단결 할 것이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우월주의 파벌은 제국의 발전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 하던 이들. 그들이 흑마법사가 관련된 반란에 엮인 이상. 더 이상 설 곳 은 없다.
앞으로 제국은 더욱 단결할 것이고, 전쟁을 수행하는데 보다 수월 해지리라.
"그나저나, 한지훈."
문득, 황제가 말을 돌렸다.
"듣자하니, 황실 기사단장의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고."
그가 꺼내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황실 기사단장 갈람프의 영입제 안.
나는 가볍게 수긍했다.
"저는 최전선 체질이라서 말입니다. 더해 폐하께서도 영웅이 되어야 할 제가, 이곳 중앙에 틀어박혀 있는 건 원치 않지 않으십니까."
"본래는 그런 생각이었다만. 이제 얼굴 보기 힘들어진다 생각하니 아 쉬워져서 말이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포크를 움직여 음식을 입에 쑤셔 넣었다.
황제가 이어 말한다.
"한지훈. 본대로 복귀하기 전, 영지에 들르게."
"영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몇 가지 '선물'들을 보내놔서 말이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황제를 바라봤다.
황금색 머리칼,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저 청년은, 평소의 근엄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짓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선물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자네에게 맡기겠네."
무슨 선물을 보냈기에 저리 득의 양양한 미소를 짓는 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한번 가서 확인해봐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