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정말 신기한 인물이군."
한지훈이 빠져나가 적막해진 집무실에서 황제는 그리 중얼거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테이블 건너편을 바라본다. 방금 전 한지훈 이 앉아있던 자리.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설마, '피난민'을 보상으로 요구할 줄은."
한지훈은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귀족 우월주의 파벌의 수장이던 게딘 알키온을 처단할 명문을 찾아 냈다. 흑마법사의 침공을 막아내 수도를 구해냈다.
그야말로 제국을 위기에서 건져 냈다 할 수 있는 수준의 공훈. 그에 황제는 한지훈에게 보상을 수여 하려했다.
막대한 재화, 작위의 승급, 영지 의 확장, 최상급 아티팩트 하사.
황제는 한지훈이 원하는 것을 골 라 그에게 합당한 보상을 수여하려 했었다.
하지만 한지훈의 요구는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으니 .
그는 한지훈이 했던 요구를 떠올 려본다.
- 북부의 피난민들을 제 영지, 라이젠 백작령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들 모두를 영지민으로 받아들이 겠습니다. 황제 폐하.
그는 놀랍게도 물질적인 것을 바라지 않았다.
막대한 양의 재화도, 뛰어난 무구도, 보다 드높은 지위도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고향을 잃은 피난민 무리들이었으니 .
피난민.
사실 대다수 귀족들이 보기에는 골칫거리에 불과한 이들이었다.
모든 재산을 잃었기에 영지 발전에 도움이 되질 않으며, 오히려 치안을 어지럽히고 언제 비적 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이들이니.
영주 입장에서 그리 반기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
- 누군가는 그들을 품어야 합니다. 제가 품겠습니다.
헌데 한지훈은 그들을 품으려했다.
영지에 들인다면 문제를 일으킬 확률이 높은데도. 그는 굳이 그 위험까지 안아가며 피난민들을 받아 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피식. 황제는 나직이 웃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황제는 한지훈을 다소 냉혈한 인물이라고 보았었다.
그만큼 그가 두른 분위기가 차가웠었기 때문에.
눈동자는 날카롭게 벼린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고, 시선과 몸동작 은 기계처럼 정교했다. 검은색 머리 와 암흑색 눈동자는 언뜻 불길해 보였다.
냉철하고도 삭막한 분위기. 오직 전장에서밖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 하는 전사의 분위기다.
때문에 황제는 한지훈의 그런 요청을 들었을 때. 그를 다시 볼 수 밖에 없었다.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을 수용하 려 하다니. 그 어떤 귀족들도 스스로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었는데….
"그만큼. 한지훈 그자는 제국의 민중들을 아끼는 것이겠지."
그 또한 평민 출신이었기에, 그 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어서일까. 한지훈은 다른 귀족들과 다른 행보 를 보였다.
피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영지에 자리를 잡고 다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인정을 가진 인물이었을 줄이 야."
황제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피 어올랐다.
냉철한 얼굴 뒤에 자리한 의외의 일면.
그는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들었다. 통신 수정구였다.
황제가 지시한다.
"내무성 장관, 그리고 재무성 장관을 호출하라."
그는 한지훈의 요청대로 피난민 들을 라이젠 백작령으로 보내고자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도 함께.
황제의 통신이 이어진다.
"좋아. 이제 인구유치는 해결했다."
황제와의 독대가 끝난 뒤. 숙소 침대에 몸을 뉘이며 그리 읊조렸다.
나는 황제에게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피난민의 이송을 요청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기피하는 대 상이 바로 피난민이다. 영지에 그다지도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치안을 어그러트리는 존재들이니.
대다수 영주들은 피난민들을 배 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르다.
내 영지, 라이젠 백작령은 거의 모든 것이 완벽했다.
넓고 기름진 옥토, 막대한 지하 자원, 드워프의 합류로 인해 얻어진 무지막지한 공업 능력까지.
허나 단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 으니 .
' 인구.'
인구가 부족하다.
라이젠 백작령의 인구는 고작 일만 가량. 턱없이 적은 수다.
물론 내 영지가 발전할수록 점차 인구가 늘어 언젠가는 과거 게임 후반기에 봤던 거대도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때문에 나는 결정했다.
'피난민을 받아들여, 인구수를 늘 린다.'
피난민을 받아들여 영지에 정착 하게 한다면 내 영지를 급격히 성장시킬 수 있다.
상업의 활성화로 인한 막대한 재 화. 공업의 발전으로 인한 아티팩트의 생산. 영지군 병력의 폭증. 그리고 피난민들을 수용했다는 인도적인 명예까지.
모조리 얻을 수 있다.
"앞으로 랑스랑 드워프들이 바빠 지겠네."
피난민을 수용하고 그들을 영지에 자연스럽게 정착시키려면 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거주공간을 확보해야 하고, 그들 이 일할 농토를 개간하며, 더해 여러 행정작업들까지 수행해야 한다.
한동안 영지가 바빠지리라. 그리고 급격히 발전하겠지.
나는 눈을 감고 떠올렸다.
'루벤.'
떠올리는 것은 과거 게임 속에서 보았던 거대 도시, 루벤.
루벤은 그야말로 남부 대륙의 중심지였다.
무수한 지하자원. 강대한 공업능력. 블랙 오케스트라 속 루벤은 막 대한 인구수를 가진 거대도시였으 며, 내가 다스렸던 제국의 최고 요 충지였다.
나는 블랙 오케스트라 속 루벤처럼 내 영지를 발전시킬 생각이다.
계속해 눈을 감고 고뇌한다.
루벤의 성장속도를 가속시키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내가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에 나는 눈을 떴다.
- 똑똑.
다시금 들려오는 노크 소리.
소리는 놀랍게도 방문에서 나지 않고, 창문에서 나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간다. 커튼을 걷어내자, 투명한 유리창 너머 한 명의 인영이 보였다.
"니 디아."
- 이거 열어요.
놀랍게도 창가에 자리한 것은 니 디아였다.
내심 질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황궁의 경계를 뚫고 접근한 건지.'
황궁의 경계는 결코 허술하지 않다.
황실 마법사들이 빈틈없이 탐색마법을 발현하며, 요소요소에 기사 들이 배치되어 침입로를 지키고 있다. 더해 외곽에 두텁게 펼쳐진 근위군의 감시망까지.
헌데 과연 엘븐 가디언이라는 것 인가. 니디아는 그런 삼엄한 경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렇게 내 숙소 창가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끼이익.
나는 창문을 열었다. 그에 싱긋 미소 지으며 방안으로 넘어오는 니디아.
"제가 말했잖아요? 일이 다 끝나 면 찾아간다고."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 는데 ."
내가 영지로 돌아간 뒤에나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황궁 창문을 넘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니디아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저희 뒷정리 결과를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요."
뒷정리라.
분명 니디아는 말했었다. 이곳 제국 수도에 한스 또한 잠입해 있었다고, 녀석을 추적한다고 말이다.
지금 니디아는 내게 그 결과를 알려줄 생각인 것 같다.
그녀가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스는 잡지 못했어요."
"잡지 못했다고?"
의아한 결과였다.
니디아는 엘븐 가디언. 잠재력 높은 종족 엘프 중에서도 수위에 이르는 능력을 지녔다.
게다가 한스를 추적했던 것은 니 디아 혼자만이 아니었다.
타냐, 마게브 다른 엘븐 가디언 들 또한 한스를 추적했었다.
헌데 놓치다니.
그녀는 내 의문에 대답했다.
"한스는 대적자의 별을 타고난 인물이니까요. 그자를 잡을 수 있는 건 오직 한지훈 씨. 이름 없는 별, 주인공의 운명을 타고난 그대밖에 없어요."
"또 그놈의 운명론인가."
"이름 없는 별."
순간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항상 서글서글한 얼굴을 하던 니 디아. 하지만 지금 그녀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있다.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본래 녹색 빛을 발하는 니디아의 눈동자.
헌데 어째서일까.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다.
"알려드릴 것이 있어요."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전. 니디아의 정신에 누군 가가 개입했다. 지금 나와 대화하는 것은 니디아가 아니었다.
아마도….
"엘리스군."
엘프 여왕 엘리스. 그녀이리라.
이미 한번 겪었던 일이다. 니디 아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물들고 분위기가 변화하는 것.
지금 엘프 여왕 엘리스는 니디아 의 육체를 빌려 나와 대화하고 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네. 맞아요."
"이번에도 니디아를 꼭두각시로 부리는 건가?"
"저는 이곳 엘프의 숲을 나설 수 없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에 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내 게 말해왔다.
"이름 없는 별. 흑마법사들이 세계검을 만들고 있어요."
"?.?뭐?"
그녀의 말에, 내 얼굴이 와락 구겨 졌다.
"크라함 님."
어둑한 지하 공간. 한스가 무릎 꿇고 부복했다.
그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자잘한 상처가 나있었다. 팔다리는 거의 망가져 새카맣 게 죽어있었고, 얼굴에는 검은색 피 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명백한 중상.
그럼에도 한스는 담담히 보고했다.
"임무를 실패했습니다."
이번 제국 수도 공략. 흑마법사 들이 광기의 시대를 맞아 준비했던 일.
본래라면 성공했으리라. 그래서 한지훈을 죽이고, 그의 격을 빼앗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스는 임무에 실패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엘프들이 개입했습니다."
엘본 가디언이 한스를 추격했다. 그에 한지훈을 노리고 있던 한스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엘븐 가디언들은 강력했다.
하나하나가 고위의 격에 이른 이 들. 제아무리 광기의 시대에 이르러 보다 드높은 강함을 가진 한스라 한들 간신히 목숨만 건지는 것이 한계였다.
"… 엘프."
묵묵히 한스의 보고를 듣던 크라 함이 입을 열었다.
그가 메마른 목소리로 읊조린다.
"놈들이 벌써부터 활동하다니. 시나리오와 다르군…."
본래 시나리오에선, 엘프들은 후반에서야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그전에는 그저 중앙 대륙에 웅 크리고 있었을 뿐.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벌써부터 엘프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지훈의 움직임을 보조하고, 흑마법사인 그들을 견제하려 한다.
기존 시나리오와 다른 움직임.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했다.
"엘리스. 그 모자란 년도 '격'을 획득했던 것인가."
쯧. 크라함이 혀를 찼다.
전의 세계에서 격을 상승시키고, 기억과 영혼을 유지한 채 넘어온 것은 크라함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엘프 여왕 엘리스.
그녀 또한 이전 세계의 기억을 지니고 이번 세상에 관여하고 있다.
"어쩔 수 없군. 일을 서두를 수 밖에."
크라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푸스스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검은색 연기가 그의 전신에서 떨어져 내리 기 시작했다.
마치 신체가 붕괴하는 것 같은 외양.
"미완인 세계검으로는 놈과 엘프 를 동시에 상대할 수 없을 터. 먼저 세계검의 완성에 집중한다."
그의 삭막한 목소리가 지하동굴을 울렸다.
"세계검을 흑마법사 놈들이 만들 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니디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니디아의 모습을 한 엘리스를 바라봤다.
세계검.
대전 말기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인간들이 총력을 다해 만들었던 아티팩트.
엘리스는 그 세계검을 흑마법사 들이 만들고 있다 한다.
나는 이어 말한다.
"놈들은 세계검을 만들 이유도, 기술도, 재료도 없어."
세계검은 이 세상의 온갖 부정한 것을 잘라내는 성검이었다.
그렇다. 성검(聖劍)이다.
흑마법사의 흑마나는 물론 그들에게 오염당한 언데드와 키메라, 그리고 혼탁해진 영혼까지.
그 모든 것을 절삭해 제거해버리는 검.
헌데 흑마법사들은 그런 세계검을 만들고 있다 한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
하지만 그런 내지식이 틀린 것 일까.
"이름 없는 별. 그대는 세계검이 란 아티팩트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듯하네요."
엘리스는 내말을 부정했다.
그녀가 말한다.
"세계검은 정확히 말하자면, 시스템의 개입을 '절삭'하는 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