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황실 마차 내부는 외양처럼 퍽 화려했다.
넓은 실내 공간. 이곳저곳에 섬 세한 장식들이 조각되어있고, 마차 천장에는 마나등이 매달려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더해 이 푹신한 의자.
부드러운 양가죽으로 잘 마감한 의자는 덜컥거리는 마차의 흔들림조차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착석감이 좋았다.
게다가 마차 안 이곳저곳에 있는 각종 와인과 음료들까지.
마차 안을 둘러보던 나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무슨 회장님 자동차 같네."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고급 리무 진이 이러할까.
고개 돌려 차장 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밖에 분주히 돌아다니는 인영들의 모습이 시야 속에 잡혔다.
'치안을 확립하려는 수도군단.'
흑마법사의 마법진 때문에 동요한 시민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일까. 요소요소에 병사들이 창칼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처억.
그들이 마차가 지나칠 때마다 이쪽을 향해 경례했다.
그들의 표정을. 그 속에 녹아있는 감정을 읽었다.
' 안도.'
수도의 치안을 지키는 수도군단. 그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들 또한 안 것이다. 흑마법사 의 마법진이 완전히 파훼되었음을.
내가 그렇게 차장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지훈 전대장."
문득 갈람프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본다.
그가 제안해왔다.
"황실 기사가 되는 게 어떤가."
하마터면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누군가와 반응이 퍽 비슷했기 때문에.
' 베르겐.'
볼로냐 기사단장, 베르겐 라 프 랜시스. 그는 나에게 기사가 되기를 제안했었다.
"황실 기사가 되어라. 지금처럼 전대장 자리를 약속해주지. 임시가 아닌, 정식 전대장 말이다."
그리고 눈앞의 인물. 갈람프 디 브리기테 또한 나에게 휘하 기사가 되기를 제안하고 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입니다만."
"전혀 갑작스럽지 않다. 그런 활 약을 보여줬으니 . 욕심이 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연회장에서는 황제를 지켜냈고, 결국 휘하 전대원들을 이끌고 흑마법사의 마법진까지 파훼했으니 .
눈에 띄는 활약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자네. 그 잠깐 사이에 완전히 전대원들을 사로잡았더군."
퐁. 갈람프가 마차 안에 배치되 어있던 유리병을 하나 꺼내 개봉했다. 와인병이었다.
저거, 황제가 마시라고 비치해둔 것일 텐데. 마셔도 되려나.
그런 내 시선을 깨달은 것일까. 그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괜찮네. 폐하께선 공을 세운 부하의 대우에 섭하지 않으신 분이니. 음료에 손댄 정도로 무어라 하실 분이 아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잔 하겠는가?"
"주면 받지요."
쪼르륵.
갈람프가 와인잔에 붉은색 액체 를 따라 내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그는 자신의 잔을 들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렇게 임무가 끝난 뒤 마시는 술 한 모금이 각별하지."
그는 술로 가볍게 입을 적시고 는, 이어 말했다.
"한지훈 경. 자네도 알다시피 황 실 기사들은 결코 다루기 쉬운 녀석들이 아니다. 혈통, 가문, 전공, 실력, 재능. 모든 것이 충족된 녀석 들이 바로 황실 기사단의 단원들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황실 기사. 황제의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이들.
약할 리 없다.
"헌데 자네는 일면식도 없는 녀석들을, 그토록 단시간 만에 완전히 사로잡았어. 정말 드문 일이지."
당연히 황실 기사들은 지휘관에 대한 눈 또한 높다.
하지만 나는 고작 몇 시간 만에 휘하 전대원 모두를 장악했다.
갈람프는 그점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자네라면 다른 단원들도 모두 납득할 거네. 어떤가? 황실 기사단 의 전대장 자리. 탐나지 않나?"
사실 그의 제안은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황실 기사단이다. 제국의 모든 기사들이 입단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엘리트 기사단.
그것도 백 명의 기사들을 이끄는 전대장 자리. 거절하는 것이 멍청한 일일 터.
"죄송합니다. 갈람프 단장 각하."
물론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저는 전선으로 돌아가, 기존 천인대를 계속 지휘하고자 합니다."
재고의 여지 없는 단호한 거절.
"흐음… 역시."
내 대답에 갈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것일까. 갈람프는 내 거절에도 별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최전선의 보병대 천인대장보다 는, 황실 기사단의 전대장 자리가 더 좋을 터인데. 어째서 거절한 건 지 내게 알려주겠나? 한지훈 천인 장."
다만 그이유를 물을 뿐.
그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천인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본래 전장으로 돌아간다는 의사를 밝히자, 그에 맞춰 호칭을 바꾼 것이다.
나는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대답했다.
"제국 영웅훈장을 받았습니다."
시선을 내려 내 가슴팍을 바라봤다.
연회장에서부터 줄곧 정복 차림 이었기에, 여전히 내 가슴팍에 걸려있었던 그것.
제국 영웅훈장.
훈장에는 검붉은 핏물이 들러붙 어 있었다. 절반은 내가 흘린 피, 나머지 절반은 적이 흘린 피였다.
"힘든 시기입니다."
카렌, 람셀, 트웨인, 코르자카. 네 개국가의 침공.
지금 이 순간에도, 최전선에서는 힘겨운 전투가 벌여지고 있다.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영웅이 필요하죠.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제게 영웅훈장을 수 여하셨습니다."
손으로 가슴팍에 달린 훈장을 쓸었다. 말라붙은 피딱지가 투툭 떨어 져 점차 황금색 광택이 드러났다.
"저는 최전선에서 전투하고, 전공을 세워야 합니다.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황제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내가 최전선에서 계속해 전공을 세우는 것.
내가 승리할수록 내 이름과 활약 은 널리 퍼질 것이고, 아군의 사기 가상승하리라.
"하지만 황실 기사가 되어 , 이곳 중앙에서 대기한다면."
투툭, 툭. 계속해 피딱지를 털어 냈다. 그러자 가슴팍의 훈장이 본래 의 영롱한 광택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저 영웅훈장을 가진 일개 기사가 될 뿐. 절대 영웅이 될 수는 없겠지요."
안전한 수도에 얌전히 처박혀 있다면 그 누가 나를 제국의 영웅으로 볼 것이며, 그 누가 나를 보고 용기를 얻는단 말인가.
물론 이깟 훈장쪼가리 받았다고 영웅이라 불릴 순 없다. 스스로 전 장에서 싸우고 이겨 증명해야 한다.
내가 영웅이라는 것을.
"그래서 저는 황실 기사가 될 수 없습니다."
다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올려 갈람프를 바라봤다. 그는 흐뭇한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클클, 그가 웃는다.
"참, 아이러니 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한지훈. 자네는 내가 본 그 어떤 기사들보다도 더욱 기사 같네."
달칵. 그는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토록 기사다운 인물이 정작 기사는 아니라니. 이상한 일아닌가'?"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싱긋 웃었고, 그는 미련이 남은 듯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 언제든지 생각이 바뀐다면 말 해주게. 황실 기사단 전대장 자리.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 ."
마차가 황궁으로 향한다.
"어서 오게, 한지훈 경."
황궁의 알현실. 그곳은 평소와 달리 번잡했다.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각종 서류 무더기. 빛을 일렁이는 비콘들. 여러 군관과 장성, 그리고 제국의 대신들까지.
그들이 모두 알현실에 모여 있었다.
"정말, 큰일을 해내주었다."
황제가 옥좌에서 일어서 걸어온다. 나는 황궁 예의를 따라 무릎을 꿇으려했다.
허나 황제는 그런 나를 만류했다.
"일어서게."
그가 직접 내 어깨를 잡아 일으 킨다.
"지금은 궁중예의 따위는 잊게. 자, 따라오게. 그대와 할 말이 있으니 ."
황제는 천천히 걸어 어딘가로 걸 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른다.
저벅, 저벅.
걸어가는 와중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피신하지 않았던 건가.'
수도 상공에 거대한 사령마법진이 나타났다. 하마터면 이 수도 전체가 멸망할 뻔했다.
황제 아르테니아는 이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 본래 라면 몸을 피해야 하리라.
하지만 황제는 피신하지 않았다. 굳건히 옥좌를 지켜 이 긴급한 사 태를 통제했다.
미소가 새어나왔다.
'하긴. 게임 속에서도 그랬었으니 .'
과거 황제는 게임 속에서도 이곳 제국 수도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이끄는 군단과 흑마법사의 세력이 황궁 안까지 쳐들어왔음에 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었던 것이다.
게임 속에서도 지금도 황제라는 인물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이제국을 위 하는 인물.
그는 분명 이상적인 지도자였다.
"한지훈. 자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릴 것 같군."
황제는 걸어가는 와중 문득 그리 말했다.
"저길 봐라."
그가 황궁 복도에 달린 창밖 너머, 지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에 나는 황제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웬 저택이 불타고 있군요."
황제가 가리킨 것은 황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불타고 있는 커다란 저택이었다.
수도군단 소속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어 그저택을 포위하고 있다.
황제가 내게 묻는다.
"저 저택. 누구의 저택 같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알키온 가문의 저택이다."
그의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키온 후작가. 제국의 최고 명 문가중 하나다. 허나 그들의 저택은 지금 저리 불타고 있으며,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평소라면 절대 상상하지 못했던 일.
그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자네 덕분에 알키온 후작가가 흑마법사에 협조, 반역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 그리고 자네 도 알다시피. 반역에 대한 처벌 은…."
"가문의 멸족이었지요."
"맞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불타고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지금은 수도군단과 근교 기사단 들을 동원해 놈들의 일족을 추적 중이다. 곧 잡히겠지."
이 시대. 반역의 대가는 처절했다.
가문의 멸족.
"놈의 4족까지 멸할 것이다. 알 키온이라는 가문은 이시간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녀석의 가문은 완전히 사라 졌다.
반역을 저지른 게딘 본인뿐만 아닌, 그 후계를 이을 일족과 친족까지 죄다 죽임당한다.
"더해 중앙군의 병력을 일부 기 동, 알키온 후작령으로 급파했다. 곧 녀석의 영지까지 완전히 몰수될 것이니."
황제는 잠시 불타는 저택을 주시 하고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뒤를 뒤따랐다.
"알키온이 무너졌으니 . 그리 머지 않아 귀족 우월주의 파벌은 붕괴할터."
알키온 후작가는 귀족우월주의 파벌의 수장격인 가문이었다. 그런 알키온 가문이 반역을 저질러 멸족 되었으니 , 그들의 세력이 크게 흔들 리는 것은 당연한 일.
덕분에 황제의 영향력은 더욱 공 고해지 리라.
"모두 자네 덕분이다."
황제가 커다란 문 앞에 섰다. 그에 문을 열어주는 호위 기사들.
"자네 덕분에 귀족 우월주의 파 벌을 붕괴시켰고, 이제국 수도까지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다."
황제가 성큼성큼 걸어 방안으로 들어선다.
"한지훈. 그래서 자네에게 무슨 보상을 줄지 곰곰이 생각해봤네."
방안에는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자리해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독대하기 위해 미리 자리를 만들어둔 듯싶다.
그가 의자에 앉았다. 나 또한 그 의 맞은편에 앉는다.
"재물, 작위, 무기, 영지, 명예."
그는 내게 줄 보상을 결정하려 하는 듯했다.
"그중 자네가 무얼 원하는지 모르겠군."
황제가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에게 직접 물어보지. 뭘 받고 싶나?"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 면, 무엇이든지 주겠네."
무엇이든 주겠다는 황제의 말.
절대 허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내가 해낸 일은 범상치 않은 것 이었으니 .
"재물을 원하나? 주마. 막대한재화를 안겨주지."
그는 하나하나 나열했다.
"작위와 영지를 원하나? 주겠다. 후작위를 부여해주지. 더해 후작령에 걸맞은 더 넓은 영지를 하사하 겠다."
내가 받을 수 있는 보상들을.
"그대 또한 무인이니 무기에 관심이 많겠지. 원한다면 황실 창고에 보관되어있는 최상급 아티팩트를 주지."
과연 제국의 황제라는 것인가. 그가 언급하는 보상들은 하나하나 가 대단했다.
막대한 재화, 작위와 영지, 그리고 최상급 아티팩트까지.
그 무엇이든 막대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알 수 있다.
'언젠가는 얻게 될 것들이다.'
나는 황제가 입에 담은 보상들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막대한 재화?
어차피 영지가 발전한다면 얻게 된다.
내 영지에는 수많은 희귀자원들 이 매장되어 있으니 . 재화 따위야 그리 머지않아 차고 넘칠 정도가 될 거다.
작위와 영지?
필요 없다. 이미 나는 백작이라 는, 절대 낮지 않은 지위를 획득했다.
게다가 지금 내가 가진 루벤 영지조차 그 잠재력을 완전히 개발하지 못한 상황. 굳이 관리할 영역을 늘려 쓸데없이 덩치를 비대하게 키 울필요는 없다.
최상급 아티팩트?
내 영지에 있는 드워프들의 수가 벌써 천을 넘어간다. 그들을 이용한다면 아티팩트를 수월하게 얻을 수 있으니 .
그리고 명예.
이미 나는 제국 영웅훈장을 얻었 으며, 수도를 구원해냈다는 업적을 이루어냈다.
이 이상 가는 명예를 어떻게 얻 어낸단 말인가?
즉. 지금 황제가 입에 담은 것들은 내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거나, 언젠가는 얻을 것들이다.
때문에 나는 제안한다.
"황제 폐하. 만약 제가 다른 것을 원한다면,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말해보게."
황제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희미하 게 일렁이고 있다.
과연 내가 어떤 보상을 택할지 궁금한 것이겠지.
나는 나직이 말한다.
"저는 사람을 원합니다."
"사람이라면?"
전혀 의외인 말일까. 그가 의아 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이어 말했다.
"전쟁이 점차 격화되고, 우리 제국의 영토가 유린당 할 것입니다. 많은 도시와 마을이 불타겠지요."
나는 사람을 원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결코 특별 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아니다.
"대량의 피난민이 생길 겁니다."
전쟁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 들.
그들을 원한다.
"북부의 피난민들을 제 영지, 라 이젠 백작령으로 보내주십시오. 그 들 모두를 영지민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황제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