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놈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전투가 끝났다. 베이어의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흑마법사들의 시체들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다. 검은색 피웅덩이 들이 이 질척한 지하공간을 적셔간다.
녀석에게 물었다.
"포로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모조리 죽였군."
"몇놈 생포하려 했지만, 바로 자 결해버려서 말입니다."
흑마법사 놈들은 진정 독한 녀석 들이었다. 생포당하는 것을 뿌리치 고 죽음을 택할 정도였으니 .
"아군의 피해는?"
"전사 열둘, 중경상자는… 다소 많군요."
베이어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이었다.
당장 편대장인 베이어만 해도 전 신에 마탄을 얻어맞아 이곳저곳에서 피를 줄줄 흘려대고 있다. 오러 를 운용해 신체를 강화했어도 급소 를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역시. 전사자가 없을 수는 없겠지.'
나 역시 최대한 노력했지만. 전사자의 수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흑마법사들은 약한 적이 아니었다. 놈들은 근접전투가 일어났음에 도 격렬하게 저항했고, 때문에 황실 기사들도 열이 넘는 수가 전사했다.
"… 이제 돌아가야지."
하지만, 그들의 희생과 분투 덕분에 이제국 수도가 지켜졌으니 .
나는 지시한다.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부축 해라. 포션은 충분하지?"
"그렇습니다. 전대장님."
"그럼 이제 가자. 다들 포션 섭 취하게 하고."
나는 베이어의 어깨를 부축했다. 녀석이 사양하려했다.
"혼자서 걸을 수 있습니다."
"그냥 기대라."
내 진로를 열어주기 위해 몸을 던졌던 녀석이다. 내 어깨라도 빌려 줘야 하리라.
그렇게 우리는 전사자를 등에 업고, 부상자들을 부축하며 지하공간을 되돌아왔다.
저벅, 저벅, 철그럭.
올 때는 달려오느라 순식간이었 지만 가는 길은 멀었다. 그만큼 체력이 방전되었기 때문이다.
가는 와중에 문득, 베이어가 입을 열었다.
"한지훈 전대장님께선 정말 대단 하신 것 같습니다."
"대단하다니?"
녀석의 생뚱맞은 말에 되물었다. 그가 픽 웃는다.
"저 이래봬도 정복 전쟁에 종군 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직후부터 있던 흑마법사 토벌에도 참여했지 요."
그럴 것이다. 황실 기사, 그것도 일개 편대의 수장인데 실전 경험이 적을 리 없을 터이니.
베이어는 베테랑 기사였다.
"그동안 많은 지휘관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 시선을 멀리 던지며 말을 이었다.
"훌륭한 지휘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휘관 들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휘하 기사들을 소모품 취급하곤 했지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오러의 길을 걷는 이. 전장을 관통하는 창날.
말은 좋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훌륭한 기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
지휘관들 중 전공 욕심이 없는 이는 드물었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능력 이상의 전공을 세우기 위해 무리하곤했다. 그 와중에 죽 어나가는 것은 휘하 기사들이었고.
문득, 나는 해리슨 기사단의 편 대장 가스파르 월럿을 떠올렸다.
내가 막 아펠도른 요새에 배치되어 크라그 연대와 전투했을 당시. 가스파르는 게딘의 사주를 받아 내 작전을 방해하려 했었다.
추후 가스파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전투의 승리보다는 개인의 출세를 더 우선시했던 것은 사실.
그런 기사가 오직 녀석만은 아니 리라. 아니, 오히려 이기적인 기사 가 더 많다고 봐야겠지.
갈람프나 베르겐처럼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니.
"하지만 한지훈 전대장님께서는 다르시더군요."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씩 웃었다.
"다른 지휘관들은 오직 출세하고 가문의 이름을 세우는 것에만 관심 이 있었습니다. 부하들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죠."
저벅.
녀석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이 느껴졌다. 덕분에 부축하는 것이 좀 더 수월해졌다.
"허나 전대장님께서는 부하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자처하셨습니다."
베이어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 폈다. 나 또한 녀석을 따라 시선을 돌려 바라봤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귀환하고 있는 황실 기사들이 보인다.
"암흑기사의 전열을 돌파할 때. 전대장님께선 가장 먼저 앞서나가 길을 만드셨습니다."
그가 천천히, 허나 목소리에 확 실한 힘을 담아 내게 말한다.
"적의 추격이 붙었을 때, 대열의 최후미로 가 놈들을 저지하셨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번 수도전투에서 내가 보였던 모습들.
"그리고 이곳 지하에서도 흑마법사의 공격을 가장 앞에서 무력화 시키셨지요."
지휘관으로서 부하를 살리려 분투했던 내 모습이다.
베이어가 다시금 시선을 돌려 나 를 바라본다.
"전대장님께서 저희 모두를 살리 신 겁니다."
피식.
절로 싱거운 미소가 새어나왔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얼굴이 너무나 진지했기에.
내게 부축되어 질질 끌려가는 와 중에 저런 소리라니.
"그래서. 존경스럽냐?"
"존경스럽습니다."
"나잇값 좀 해라."
베이어의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 았다. 아무리 젊게 쳐줘야 삼십 대 초중반 정도일까.
반면 나는 스물 중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나이차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베이어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지휘에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그저 존경스러운 상관과 무능한 상관. 둘이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나는 존경스러운 상관이 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얼굴에 금칠을 해주니 왠지 기분이 멋쩍어진다.
파악!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강하게 두드렸다.
"으윽!"
그 고통에 표정을 와락 찌푸리는 베이어. 녀석을 다시 부축하며 말한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걷는데 집중해. 계속해 떠들다간 자칫 상처 가 벌어질 거다."
"… 알겠습니다."
나는 녀석을 부축해 계속해 걸었다. 기다란 지하통로를 걷고 계단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밖이다."
우리는 지하 밖, 지상에 도착했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자 지하의 눅눅하고 습한 공기 대신, 조금이나마 맑은 공기가 폐부 속으로 파고든다.
뭐, 비릿한 혈향이 느껴지는 것은 그대로였지만.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다수의 인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왔군. 한지훈 전대장."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황실 기사단장 갈람프 디 브리기테.
그가 미소 지으며 말한다.
"사령마법진의 파훼를 확인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고고 히 떠올라 묵직한 기세를 발하던 커다란 마법진은, 그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있었다.
"정말 큰일을 해주었어. 한지훈 전대장."
"… 황실 기사들이 잘 해준 덕분입니다."
"겸손이 과하군. 황실 기사들 모두가 알고 있네. 자네가 없었다면 저 사령마법진을 파훼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의 치하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제가 덕분에 살았습니다.'
입으로 내뱉지 않고, 속으로 그리 읊조렸다.
아티팩트 장검. 카르벨데.
갈람프가 검이 없는 나를 위해 준 상급 아티팩트 장검이다.
'갈람프의 선물이 없었다면 나는 살아남지 못했겠지.'
흑마법사들이 운용한 저주 마법. 부패의 장막. 무려 흑마법사 백여 명이 모여 발현한 합동마법이다.
나는 그것을 무력화시켰다. 갈람 프가 줬던 카르벨데를 완전히 소모 해서 말이다.
장검에 달린 절삭력 강화와 오러 증폭 효과가 없었다면. 아마 놈들은 금세 마법을 복구해 계속해 밀어버렸으리라.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티팩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것보다 자네에게 손님이 있는 것 같군."
내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와 중, 갈람프가 그리 말하며 비켜섰다.
그에 나는 되묻는다.
"손님이라 하시면."
"이거 참. 세계수의 수액을 보고 혹시나 싶긴 했다만, 설마 엘프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놀랍군 그래. 한지훈 전대장."
그가 완전히 비켜서자, 그 뒤쪽에 있는 세 명의 인영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귀. 하나같이 가느다란 선을 지닌 미형의 외양. 더해 전신에 일렁이고 있는 방대한 마나 와 자연력까지.
나는 저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
'엘븐 가디언.'
내 시선이 저들의 가운데로 향한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엘프 여인이 보였다.
'니디아.'
엘븐 가디언 중 하나. 강력한 무력을 지닌 정령사.
구면이다. 시선을 돌려 그녀의 좌우에서 있는 엘프들 또한 눈여 겨본다.
'그리고 검사 하나와 마법사 하나.'
저들 또한 엘븐 가디언이리라. 이토록 농밀한 마나와 자연력을 두 르고 있는 이들이라면 달리 없을 터이니.
"안녕하세요, 이름 없는 별. 정말 오랜만이에요."
니디아가 천천히 걸어오며 말한다.
"이번에도 열심히 구르신 것 같 네요?"
"그래. 정말, 열심히 굴렀지."
니디아의 얼굴을 보고는 씩 웃었다. 녀석에게 고마움의 감정이 느껴 졌기에.
'니디아가 갈람프를 보호해줬겠지.'
주변의 상황을 둘러본다면 알 수 있다.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암흑 기사들의 시체들. 그 수가 언뜻 보 아도 일천을 아득히 넘어선다.
아무리 황실 기사들이라 한들, 저토록 많은 암흑기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을 터.
'엘븐 가디언들이 제때 도착해준 덕분에 갈람프가 살았다.'
만약 엘프들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갈람프 또한 이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까지도 죽었을 수도 있지.'
더해 암흑기사들이 지하공간에까지 들이닥쳐. 우리는 앞뒤로 포위당 해 압사당했을지도 모른다.
즉. 저들 엘프 덕분에 나도, 갈람 프도, 그리고 이제국 수도의 모든 인간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때문에 순순히 감사를 표한다.
"정말 고맙다. 너희 엘프들의 협력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어머?"
그에 화들짝 놀라는 니디아.
"어? 제 생각과 다르네요? 한지훈 씨라면 이번에도 재수 없는 표정으로 뻐겨댈 줄 알았는데 ."
나를 뭐로 보는건지.
"뭐, 하여튼…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요. 타냐? 마게브?"
니디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하고는,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니디아의 양옆으로 두 명의 엘프 가 자리한다. 그들이 입을 열어 자신을 소개했다.
"엘븐 가디언 타냐다. 검을 주로 다루지."
먼저 입을 연 것은 붉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엘프 여인.
그녀의 외양은 퍽 강렬했다. 정 열적인 붉은 머리. 눈동자 또한 머리색과 비슷한 적갈색으로 물들어 있다.
물론 알고 있는 이름이다.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타냐]
[엘븐 가디언]
엘븐 가디언 타냐. 검의 극한에 이른 인물. 엘프들의 검성.
전시나리오에서 내가 죽였던 엘프.
물론 이자리에 선 새로운 얼굴 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엘븐 가디언, 마게브입니다. 보다시피 마나의 길을 걷고 있지요."
다음으로 소개한 것은 푸른색 로 브를 입고 있는 엘프 남성. 그의 머리는 청아한 하늘색이었다.
역시나 알고 있는 이름.
- 띠링!
떠오르는 홀로그램.
[마게브]
[엘븐 가디언]
"타냐, 마게브…."
그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 떳떳하지 않은 기억들이.
제국의 군대를 움직이고 흑마법사와 협력해 중앙 대륙을 침공한 기억. 마우스 클릭으로 간단하게 세상을 밀어버리던 기억.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꿀 수 있다.
엘프들은 적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아군이 되었다.
이전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지훈 씨?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표정을 지어요?"
"…아."
방금 전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 던 것일까.
다시 고개를 들어올려 니디아를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선물이 있어요."
"이건."
"좋아하시죠? 세계수의 수액."
니디아가 유리병을 들어 올려 흔들어댔다. 그러자 유리병 안에는 녹색 액체가 넘실거리며 밝은 빛을 발하고 있다.
직감했다.
'더 높은 품질의 수액.'
유리병 안에서 넘실거리는 세계수의 수액은 이전에 받았던 것보다 더욱 진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말인 즉, 내가 가졌던 '극도로 희석'된 세계수의 수액보다도 더 나은 품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터.
"자, 받아요."
그녀가 유리병을 내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살펴본다.
[세계수의 수액(상당히 희석됨)]
역시나.
니디아가 건넨 수액은 '상당히 희석됨' 등급이었다. 이전에 받았던 것보다 한 단계 높은 등급.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제 뒷정리를 하러 가볼게요."
"뒷정리라니?"
"칠칠맞은 주인공이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있거든요. 마게브, 위치파악은 끝났나요?"
니디아는 그리 물으며 마게브를 바라봤다. 그에 마게브는 고개를 끄 덕였다.
"위치는 확실히 특정했습니다."
"그럼 이제 가볼까요?"
우우우웅….
그들의 몸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저 마법, 알고 있다.
은신, 그리고 도약 마법.
저 엘프들은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다.
"너희들. 누구를 ?고 있는 거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상황은 끝났다. 사령마법진 은 완전히 파훼되었으며, 흑마법사 와 암흑기사들도 모조리 소탕되었다.
누군가를 추적할 일 따위는 더 이상 없을 텐데.
그에 니디아가 입을 열어 나직이 고한다.
"한스."
한스 요한바르첸. 그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다시금 긴장을 끌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항상 이쪽을 방해해왔으니 .
놈이 이곳 수도에 있는 건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왔으니 , 녀석도 '계획'을 무리해서 수행 하지는 않겠죠."
안심하라는 듯 말하는 니디아.
그녀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간다.
"뒷정리가 끝나고 나중에 뵈요. 제가 그쪽으로 찾아갈게요."
이윽고 엘프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 휑한 공간을 잠시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렸다.
"그래. 손님과의 담소는 다 끝났 는가?"
"그렇습니다. 단장 각하."
엘프가 완전히 사라지자 갈람프 가다가온다. 그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지. 폐하께서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신다네."
갈람프가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의 뒤를 따른다.
"마차를 불렀다."
"마차. 말씀이십니까."
"그래. 올 때처럼 전투마를 타고 돌아갈 순 없지 않은가. 전투피로에 찌들었는데 말이야."
계속해 걸어 물류창고 밖으로 나 섰다. 그러자 그곳에는 의외의 장관 이 펼쳐져 있었다.
"저기 오는군."
멀리서 어떤 것이 오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고는, 허허웃을 수밖에 없었다.
'황실 마차.'
커다란 팔두마차였다. 전투마 여러마리가 끄는 꽤나 화려하게 꾸 며진 마차. 그리고 그 마차를 호위 하는 백여 명의 기사들.
마차에는 황실의 문양이 선명하 게 박혀 있었다.
갈람프는 익숙한 모습으로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황궁으로 가지. 자네는 이제국 수도를 구원해냈다. 분명 폐하께서 무언가 보상을 내려 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