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다음으로, 작위를 수여하겠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말이 이어진다.
"한지훈 라이젠. 제국 남작. 제국 북부 3군단 아펠도른 천인대장. 요 한바르첸 총독국, 라이젠 남작령의 영주."
수석 행정관이 고급스런 상자를 들고 다가온다. 황제는 상자를 개봉해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상자 속에서 나온 것은 기다란 양피지였다. 아마도 귀족 증서이리라.
"그대의 공훈을 치하하는 바. 새로운 신분인 백작위를 하사한다."
황제의 시선이 내 머리 위로 향 한다. 그가 양피지를 바라보며 낭독 한다.
"황제에게 충성하고, 황실에 봉사 하며, 제국의 발전에 기여하라. 제국 황제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그의 말이 끝나고.
와아아아아아아!
다시금 울리는 함성소리.
"일어나라, 한지훈 라이젠 백작."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자네는 백작이다. 어엿 한 중앙귀족이 된 거지."
"감개가 무량하군요."
"표정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만."
"제가 백작이라는 것이 체감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하하."
아르테니아가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찰나뿐이지. 곧 절절히 체감할 수 있을 거네. 자, 뒤를 바라보게. 한지훈."
나는 황제의 말에 고개 돌려 뒤 를 바라봤다. 단상 위에 황궁의 고위 대신들이 자리해 있다.
"저들의 눈빛을 살펴보게."
그에 대신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어떤 기색들을 읽을 수 있었다.
픽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반응이 참 재밌네.'
어떤 이들은 내게 호감을, 어떤 이들은 적대를 보이고 있다. 간간이 계산을 하는 듯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는 이들도 있다.
"황제파, 귀족주의파, 그리고 중립파."
황제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 중에서도 파벌이 있다는 것.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저들 중 내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이는 것은 친황파일 터이고, 적대 적인 기색을 보이는 것은 귀족주의 파, 그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이들은 중립파이리라.
쯧 혀를 찼다.
'정치는 머리 아픈데.'
과거 게임에서도 그렇고, 이 염 병할 세상에 들어오기 전 현실에서 도 그렇고. 나는 정치란 놈과 친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백작이 되었다고 정치에 도 신경 쓰라는 건가.'
눈동자를 굴려 그들의 얼굴을 외 워 놨다.
우호적인 이들, 적대적인 놈들, 이익을 얻기 위해 기웃거리는 박쥐 같은 녀석들까지.
"이제 백작이 된 이상. 자네도 정치 감각을 길러야 할 걸세. 한지훈."
"…그냥 전장에서 구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만."
"뭐, 그렇게만 해도 내게는 도움 이 되지. 자네가 영웅적인 모습을 보일수록 내지지기반이 튼튼해지는 것이니."
그럼 그냥 전장에서 굴러야겠다.
정치 따위 짜증나서 못한다.
"자, 이거 받게."
황제가 내게 양피지를 들이밀었다. 백작 귀족작위 증서였다.
그것을 받아 품속에 잘 갈무리했다.
"백작이 된 것을 축하하네, 한지훈 라이젠."
그렇게 나는 백작이 되었다.
* * *
게딘 알키온은 우묵하게 가라앉 은 눈으로 단상 위, 한 청년을 바라봤다.
검은색 머리, 검은색 눈동자는 사라져 있다. 하지만 그 얼굴은 그 가 아는 외양 그대로였다.
한지훈.
자신의 사업을 방해했던 쥐새끼. 그는 제국 영웅훈장을 수훈받은 것 으로도 모자라 백작으로 승작까지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 이.
놈은 지금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 고 있다.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을 가로막을 이 따위는 없다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당한 웃음.
"기쁘겠지. 지금 즐겨 놔라, 한지훈. 기뻐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 니까."
하지만 게딘은 한지훈의 성장에 분노하는 것보다는 질척한 비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흑마법사가 있는 이상, 네놈의 목숨도 이제 끝이다."
흑마법사의 힘을 빌려 한지훈을 처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기에.
사실 게딘이 벌이고 있는 짓은 미친 짓이었다.
흑마법사와 협력하다니?
만약 적발된다면 고위귀족인 자신이 공개 처형되는 것으로도 모자 라, 제 식솔까지 떼 몰살당 할 정도 로 중죄였다.
그만큼 흑마법사란 인류에게 있어 죄악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게딘은 흑마법사와 협력해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결정 이었다. 그가 비록 재물과 권력을 탐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흑마법사라는 인류의 적과 협력할 정도로 아둔한 이는 아니었으니 .
하지만 그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목소리를 따른다면, 아무런 문제 가 없다.'
게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흑마법사와 협력하라고. 그들의 요구를 모조리 수용하라고.
그렇다면 저자 한지훈을 치워버 릴 수 있다고.
어째서일까. 목소리를 절대 거스 르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일개 필멸자가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을 인도하는 것만 같다.
압도적인 편안함. 그리고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그의 심상을 가득 채웠다.
게딘은 다시금 눈을 떴다.
"오늘 밤. 네놈은 죽는다."
그리고 자신은 이전보다도 훨씬 막대한 권력과 재화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게딘은 흑마법사의 연락을 기다 린다.
제국 영웅훈장. 제국의 모든 훈 장들 중 가장 높은 격을 지닌 훈장 이다.
그리고 그 영웅훈장 수여가 무려 십 년 만에 이루어졌다. 그에 제국 황궁에서는 새로운 영웅이 탄생함을 기념해 연회가 벌어졌다.
그렇다. 연회였다.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연회장 2층 테라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저곳에 그득히 쌓여있는 여러 진미들. 하인들이 술과 음식을 나르고,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고위 귀족들이 이곳저곳에 무리지 어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다.
시선을 옮겨 내부 인테리어를 주 시했다.
바닥에 길게 깔려있는 고풍스러 운 붉은색 카펫, 천정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 밤하늘이 보이고, 이곳저곳에 고풍스러운 장식이 즐비해 있다.
그 인테리어들의 정점에는 악단 이 있었다.
여러 연주자들이 악기를 다루었다. 현악기가 현을 긁으며 서정적인 음색이 깔리고, 그 밑바탕을 피아노 와 관악기가 받쳐준다.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연회장을 그득 메운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전쟁 중인지 평시 상태인 지구별이 안 가는데 ."
제국의 네 개 전선에 걸쳐 적이 파고들고 있는 와중이었다. 헌데 제국의 중심인 황궁에서 이토록 화려한 연회라니.
못마땅하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 진다.
내가 그렇게 가만히 서서 연회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한지훈. 안 들어가고 뭐 하고 있나?"
누군가 내 뒤에 다가왔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제국 황제 아르 테니 아였다.
그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는,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연회를 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나보군."
"… 뭐. 그렇습니다."
다시 시선을 내려 연회장 안을 내려다봤다.
저기서 사교 행위에 열중하고 있는 귀족 놈들.
저들은 알고 있을까. 지금 예술을 음미하고 술을 탐하는 이 순간 에도, 전선에서는 병사들이 죽어나 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는 내 기색을 알아 차린 것일까. 황제기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자네 시선으로는 부정적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 전쟁이 한창 인데 이토록 호화로운 연회라니 말이야."
"하지만 한지훈, 저 연회는 단순히 사치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이전쟁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와중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모여서 술과 음식을 즐기 며 수다나 떠는 것이 전쟁을 위해 움직이는 중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기를 보게."
문득 황제가 연회장 어딘가를 가 리켰다. 그에 내 시선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간다.
그가 가리킨 것은 연회장 안, 두중년 귀족들이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황제가 이어 말한다.
"저기, 저 남갈색 머리 중년인의 이름은 벨페 메릴리앙. 궁중백 작위 를 가지고 있다. 궁중백이라는 작위 를 보면 알듯이 내 파벌에 속해 있는 이지."
궁중백은 개인의 영지 없이, 황 가에 소속되어 공무를 처리하는 이 를 말한다.
작위는 백작이라 하지만 영지도, 실권도 없는 귀족. 사실상 황제의 가신가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다.
당연히, 친황파에 소속되어 있는 귀족들.
황제의 손가락이 돌아가, 벨페의 맞은편에 자리해있는 귀족에게 향했다.
"그리고 저 맞은편 귀족은 데비 트 백작. 꽤 큰 규모의 상단인 다 비츠 상단을 소유한 자본가지. 저자는 중립 귀족이고 말이다."
"그 말씀은."
"지금 벨페는 데비트 백작을 설득하고 있다."
나는 저 둘의 모습을 살펴봤다.
바라보니 일방적으로 대화를 거는 것은 벨페, 그저 고개를 주억이는 것은 데비트 백작이었다.
확실히 무언가를 설득하려는 듯 한 모습.
"지금 벨페는 데비트 백작에게 전쟁비용 지원을 권유하고 있다. 상 단에게 떼어줄 여러 대가와 이권 등을 조율하며 말이다."
"그렇습니까."
"자, 이번에는 저기를 보지."
황제가 다른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도 두, 세 명의 귀족들이 모여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가르강 변경백이다. 서부 대평원, 막대한 전마를 생산하는 영지를 관리하고 있지. 지금은 내 파벌의 귀족 하나가 붙어 전마를 지원해 달라 요청하는 중이군."
그제야 나는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연회를 바라볼 수 있었다.
단순히 겉보기에, 저들은 술과 음식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저들은 정치를 위한 사교 행위를 하는 중이었다.
황제파 귀족들이 타 귀족들에게 전쟁을 지원하기를, 나아가 황제의 지지 세력이 되어주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황금옥좌에 앉아 귀족들에게 전쟁에 열중하라고 해봤자 그 효과는 미미하지.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권위를 앞세워 명령한다면 반발 심리까지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사교 자리에서 서로 술 과음식을 즐기는 와중에는 설득이 훨씬 잘 먹힌단 말이지."
어떻게 보면 정치질이란 건 영업 과 별다를 바가 없지 않나.
만나서, 설득하고, 자신의 의견을 따르게 하는 일이니까.
황제의 말이 이어진다.
"한지훈. 사람이란 기계가 아니다. 백 마디 고압적인 말보다도 술 과음식, 그리고 사적인 대화 한마디가 훨씬 더 효과적이지."
"그 사적인 대화 자리가 이곳 연 회장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사실 귀족이란 그 누구 보다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라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귀족들의 생태에 관해서는 쥐뿔도 모르지만, 황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충 알 수 있었다.
'귀족의 정치. 사교.'
내가 모르는 영역. 황제는 그 정치라는 영역에 대해 알려주려 하고 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랑은 먼 세상의 이야기다.'
아무래도 정치에는 별다른 관심 이 가지 않는다.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내가 잘 하는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
병력을 다루고, 적을 참하며,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
그것은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 내게는 시스템의 보정이, 그리고 여태껏 키워온 능력치가 있기에.
하지만 정치는 다르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설득해, 자신의 편이 되도록 하다니. 생각만 해도 골이 아파진다.
"자네, 정치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군."
"뭐. 그렇습니다."
싱긋. 황제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의 와인잔을 흔들었다. 유리잔 속 붉은색 액체가 찰랑 인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게, 한지
"알아둘 것이라 하신다면."
"절대 정치를 우습게보지 말게."
나는 시선을 돌려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주시한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에 불과 하네."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에서도 꽤나 유명했던 이야기였다.
전쟁은 국가간 정치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국가간 가장 치열하고 격렬하게 하는 , 마지막 외교 행위가 바로 전쟁이라고 말이다.
"무능한 장군은 수만의 아군을 죽이지."
황제가 와인잔을 입가로 가져다 댔다. 잠시 와인의 향을 음미하던 그가 나직이 읊조린다.
"하지만 무능한 정치귀족은, 앉은 자리에서 수십 수백만의 자국민을 죽인다."
정치의 중요성은 알고 있다.
다만 나는 정치에 자신이 없을 뿐.
전쟁이나 잘하자는 생각이다.
"뭐. 굳이 강권하지는 않겠네. 자네가 정치에는 그리 흥미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황제의 시선이 다시금 연회장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여전히 서로서 로 모여 대화하고 있는 고위 귀족 들이 보인다.
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친황파, 중립, 귀족주의. 세 파벌 로 나뉜 귀족들이 이곳저곳에 흩어 져 무언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얼굴은 비춰야 하지 않겠나? 이번 연회는 자네의 영웅훈장 수훈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라네. 주인공이 빠져서야 쓰나."
"…꼭 가야합니까?"
"꼭 갈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 파벌귀족들과는 안면을 익혀둬 야겠지. 혹여 나중에라도 좀 더 수 월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터이 니."
"친황파 귀족들이라…."
적대적인 타 귀족들이 아닌, 내 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귀족들 이라면 만나서 별 문제는 없으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나는 고개 숙여 황제에게 예를 차리고는, 천천히 걸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저벅, 저벅.
내가 점차 일 층에 가까워질수록 여러 시선이 모여드는 것을 느껴진다.
다양한 감정이 어린 시선들이었다.
호기심, 호감, 적대, 관찰.
그 다양한 시선들을 한껏 받으 며, 저기 고위 귀족들을 향해 걸어 가는 와중이었다.
- 띠링!
갑작스레 알림음이 울리고,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염병."
나는 나직이 욕지거리를 뇌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