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 어머.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러게요. 방금 전과는 완전 딴 판이에요."
"와…머리랑 눈동자 색 좀 바꿨 다고 인상이 이렇게나 달라지네 요?"
시녀들이 그리 떠들며 거울을 내 밀었다.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봤다.
쓸데없이 반짝이는 금발. 눈동자는 투명한 호수색. 이전의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애송이 같아.'
무슨 고위 귀족 자제처럼 생겼다. 전혀 내 취향의 외모가 아니다.
무릇 사내라면 강인한 인상을 가 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내 반응과 달리, 시 녀들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 정도면 제국의 민중들도 영웅의 고귀함을 알아보겠 죠!"
"고귀함은 개뿔이…."
나는 평민 출신이다.
"자, 그럼 이제 나가볼까요? 슬 슬 훈장 수여식이 시작될 테니까 요."
그녀들이 일어서 나를 안내한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 시녀들의 뒤를 따른다.
곧 나는 제국의 영웅으로서, 신민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 * *
"개새끼!"
콰앙!
갈색 머리칼을 가진 중년 인이 거칠게 주먹을 테이블에 내리 찍었다.
그에 와지끈 무너지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와인과 유리잔들 이 지면에 떨어져 쨍그랑 깨져나간다.
주먹을 휘두른 중년인, 게딘 알 키온 후작은 씩씩 숨을 골랐다.
"계약 파기라니…!"
최근 게딘은 막대한 손해를 봤다. 진행 중인 군납 계약이 파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제국군 군납계약의 파기. 그것은 제아무리 막대한 자본을 가진 게딘 이라 한들 큰 손해였다.
"한지훈, 그 버러지 새끼가 감히…!"
그 모든 것이 최근 부상하기 시작한 신흥귀족 한지훈 때문이었다.
놈은 이쪽의 부정을 어떻게 알아 차려 황제에게 고했을 뿐만 아니라, 더해 자신에게 할당되어야 할 군납 계약까지 뺏어가 영지를 발전시키 고 있다.
물론 본래라면 아무리 부정행위가 발각됐다 한들, 계약파기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막대한 양 의 군납계약을 감당 할 수 있는 곳 은 일리아 조병창과 일리아 상단이 유일했을 터이니.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설마 드워프까지 끌어들일 줄 은…."
그의 영지 루벤에 드워프들이 정 착했기 때문이다.
드워프는 장인의 종족. 그런 드워프들이 무려 수십, 수백을 넘어 천이 넘는 수가 그의 영지에 정착 했다 한다.
천여 명의 드워프라니! 그 정도 라면 제국군 전체에 병장기를 보급 할 수 있는 수다.
때문에 게딘은 일리아 조병창의 운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간 장인들로 이루어진 일리아 조 병창이 아무리 용을 써본다 한들, 한지훈의 루벤 조병창을 제치고 다시금 계약을 따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만큼 드워프 천여 명은 무지막 지한 경쟁력이었다.
"엿같은…."
게딘이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문득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게딘의 시선이 문짝으로 향한다.
"후, 후작 각하. 손님입니다…."
뒤이어 들려오는 것은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하인의 목소리.
헌데 어째서일까. 하인의 목소리 에는 겁먹은 기색이 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게딘은 별 대수롭게 여기 지 않고 대답했다.
"…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군. 다음에 찾아오라 전하거라."
지금은 그저 혼자서 화를 삭여야 하기에. 손님을 돌려보내라 지시하는 게딘이었다.
그는 다시금 테이블을 일으켜 세우고 다른 술병을 꺼내 개봉하려했다.
그때였다.
"만나지 않다면 후회할 텐데. 게 딘."
"그게 무슨 개소리…."
게딘은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자신은 이제국의 후작이다. 막대한 세력과 금력을 지녔다. 그런 자신에게 평어를 사용하다니.
저 건방진 녀석은 누구란 말인 가.
그가 그리 생각할 때.
콰앙!
문일 열리고, 한 명의 인영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게딘은 그의 모습을 살폈다.
"무슨…"
일순 그의 눈동자에 당혹이 올라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제국 수도에서 결코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흐, 흑마법사!"
입고 있는 것은 검은색 로브. 로 브 안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다. 더해 얼굴 이곳저곳에 새겨진 검은색 문신들까지.
분명한 흑마법사의 외양이었다.
"허억!"
콰당탕!
게딘은 당황해 뒤로 나자빠졌다. 바닥을 기며 그가 크게 외쳤다.
"흑마법사다! 어, 어서! 호위 기사들을 불러라!"
게딘은 황급히 호위 기사들을 부 르려했다. 하지만, 게딘의 목소리에 달려오는 기사 들은 없었다. 그저 방안에 적막한 침묵만이 감돌 뿐.
피식. 흑마법사가 비웃는다.
"기사를 찾는가? 여기 있다."
탱그랑!
흑마법사가 무언가를 던졌다. 기사용 투구였다. 그것이 바닥을 구르 며 쇳소리를 내고, 게딘의 눈동자가 커졌다.
"뭣 델먼…
바닥을 구른 것은 자신의 호위 기사들의 지휘관 델먼의 잘린 목이였다. 그것이 바닥을 구르며 이 화려한 집무실을 핏물로 적신다.
게딘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흑마법사를 바라봤다.
저 흑마법사는 무려 십 수명의 기사가 지키고 있을 이 저택으로 쳐들어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지휘관의 목을 따 이쪽에게 보인 것이다.
씨익. 흑마법사가 미소 짓는다.
"게딘. 너는 한지훈과 적대하고 있지."
"…한지훈이라니. 설마! 네놈!"
일순 게딘의 눈동자에 분노가 어린다.
"네 녀석이 이곳에 온 것은, 놈! 한지훈의 수작이냐?! 나를 죽이기 위해서!"
"아니. 그 반대다. 게딘 알키온."
게딘의 어수룩한 추리에, 흑마법사가 클클 웃으며 방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게딘은 화들짝 놀라 더욱 뒤로 기어간다.
그에 흑마법사는 저벅저벅 걸어 게딘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고는, 자세를 낮춰 그와 시선을 맞췄다.
흑마법사가 나직이 말한다.
"게딘 알키온. 우리에게 협력해라. 그렇다면 한지훈을 죽이고, 놈 의 세력을 완전히 쳐부숴주지."
"…그게 무슨."
"한지훈. 치우고 싶지 않나?"
게딘은 당황한 눈으로 흑마법사 의 눈을 바라본다. 흑마법사의 눈동자는 꺼림칙한 붉은색 빛을 일렁이 고 있었다.
하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게딘은 흑마법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묻는다.
"정말, 한지훈을 죽일 수 있겠소…?"
"그래. 그쪽이 우리에게 협력한다 면 말이다."
흑마법사가 질척하게 웃는다. 그리고 게딘은….
"당신에게 협력한다면, 한지훈을 죽일 수 있다고…."
그저 흑마법사의 말을 되뇌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에게 협력한다면…."
무언가가 게딘의 정신에 간섭하고 있다.
황궁 앞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다. 정복 전쟁 승전비와 초대 황제 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는 곳.
그대광장에는 무수히 많은 인파 가 모여 있다.
"… 더럽게 많네."
정말 많은 인파였다. 그야말로 시야를 꽉꽉 메울 듯이 들어찬 사람들의 무리.
몇 명이나 될까. 최소한 만 단위는 가볍게 넘길 것 같다. 그 정도 로 시야에 보이는 사람들의 수는 많았다.
내 중얼거림에 옆에서 있던 황 실 근위기사가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자리이니까요."
"하긴."
단순한 훈장 수여식이었다면 이 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리해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며 높은 인물, 황제가 직접 훈장을 수 여하는 자리다. 그에 일반 평민들이 라 한들 황제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나온 것이리라.
그만큼 제국에서 황제의 권위와 인망은 드높았다. 평민들 대부분이 그에 따를 정도로.
"자, 가시죠."
기사가 손을 뻗어 안내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겨, 저기 동상 앞에 설치된 단상으로 향했다.
곧 훈장을 받는다.
"10년 만에 영웅훈장 수여식이로 군."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10년 전 정복 전쟁 당시, 라브리에 전투마법 단장 제피르가 받았던 이래로 처음 이지요."
"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소리지."
행정관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 덕였다.
그의 시선이 이 드높은 단상 아래, 시야를 꽉 채울 정도의 대인파 에게로 향한다.
그야말로 이 드넓은 대광장을 꽉 채울 정도로 막대한 인파.
피식. 황제가 웃었다.
"내 인망도 나쁘진 않았구만 그래."
"이제국에서 황제 폐하를 존경 하지 않은 이는 없습니다."
"글쎄. 요즘 대신들을 바라보니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말이야."
황제의 시선이 단상 위, 훈장 수 여식에 참석한 고위 대신들에게로 향했다.
어떤 이는 존경의 눈빛을, 어떤 이는 계산적인 시선을, 어떤 이는 혐오의 감정을 담은 채 자신과 한지훈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존경의 시선을 보내는 이는 황제 파 귀족들, 계산적인 시선은 중립, 그리고 혐오의 감정을 내비치는 이 들은 귀족우월주의자들이다.
황제가 푹 한숨 쉰다.
"정치란 빌어처먹게도 어렵군."
"여러 세력끼리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일입니다. 쉬울 리 없지요."
황제는 선정을 베풀었다. 과거 정복 전쟁에서 얻은 이윤을 일반 민중에게도 돌아갈 수 있도록 여러 정책을 꾸려왔던 것이다.
당연히 반발하는 이들이 없을 리 만무.
"귀족우월주의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황제의 차가운 눈이 단상의 귀족 들로 향한다.
귀족 우월주의자들. 제국의 모든 이익은 오롯이 상위계급인 귀족에 게 모여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
그들이 이제국을 좀먹고 있다.
쯧. 황제는 혀를 찼다.
"보아하니 한지훈 경의 승작 또한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만."
"그렇습니다. 한지훈 경의 승작과 훈장수여를 재고해달라는 청원이 계속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멍청한 놈들."
아이러니하게도 저들 귀족 우월주의자들의 가문 대부분이 선대에 막대한 공훈을 세운 명문가들이다.
어떤 이는 제국의 건국 당시, 또 어떤 이는 정복 전쟁 당시 여러 공훈을 세워 제국의 발전과 확장에 이바지했던 충신들의 후손들.
그들은 선대와 달리 이제국을 좀먹어가고 있다.
"마치 누군가가 개입해서 우리 제국을 약화시키려는 것만 같군."
황제는 그리 중얼거리고는, 피식 웃었다.
너무나 실없는 상상이었기에.
무언가가 개입해서 명문가문들을 타락시키고, 제국을 약화시키려 한 다니. 그딴 짓이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황제는 시선을 돌려, 한지훈을 바라봤다.
자신이 보았던 한지훈은 본래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를 지 니고 있었다.
진중한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불길하게 느껴졌던 것 또한 사실.
하지만 지금 한지훈의 모습은 그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찬란한 황금색으로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눈동자는 청아한 호수색으로 물들어 있다. 더해 그가 입고 있는 것은 여러 훈장이 보란 듯이 메달려 있는 제국군 정 복전장의 화신에서 마치 귀족가의 미청년처럼 완전히 바뀐 모습이다. 그에 황제가 픽 웃는다.
"참. 사람이란 게 저토록 바뀔 수도 있군."
"남자는 원래 머리빨이라는 소리 도 있지 않습니까."
"그 변화가 너무 극단적이라 좀 놀랍단 말이지."
황제가 단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가 마나를 담은 웅혼한 목소리로 말했다.
"훈장 수여식을 시작하겠다."
"제국 북부 3군단, 아펠도른 천인대장, 한지훈 라이젠 남작."
아르테니아 황제가 입을 열고, 그의 옆에서 있던 국방성 장관이 나무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훈 장이 들어있다.
황제가 훈장을 집어 든다.
"그대는 군직에 종사한 이래로 수많은 전공을 세워왔다."
훈장을 바라봤다. 황금색으로 번 쩍이는 금색 훈장이었다.
언뜻 제국 금성훈장과 비슷한 모양의 훈장. 다른 점이라면, 그 훈장 의 한가운데에는 퍽 커다란 크기의 보석이 박혀있다는 것이다.
보석에는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정교히 세공되어 있다.
"요한바르첸 공국전쟁에서는 요새를 점령했고, 기사와 맞서 싸웠으 며, 흑마법사를 제압했다. 적의 수 괴인 헤임스 요한바르첸을 처단했다."
황제가 훈장을 내 가슴팍에 걸어 준다.
"카렌 왕국의 침공에서는 단신으로 적의 종심을 돌파, 적의 총사령 관과 그 참모부를 홀로 제압했다."
눈동자를 굴려 내 가슴팍을 흘깃 바라봤다.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금속쪼가리가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제국 영웅훈장.
근 10년 동안 아무도 받지 못했 던 훈장이다.
"이용맹하고도 영웅적인 행적을 치하하는 바."
그 제국 영웅훈장이 내 가슴팍에 달려 있다.
"이자 한지훈 라이젠 남작에게 제국 명예훈장을 수여한다. 제국 황제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황제의 말이 끝남과 동시.
와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나는 시선을 돌려 전방을 바라봤다.
시야를 가득 메운 대광장의 인파 들. 그들이 함성을 내지르고 있다. 그들을 멍하니 주시한다.
정복 전쟁 이후, 십 년 만에 제국 영웅훈장이 수여되었다. 저 광장에 모인 무수히 많은 민중들이나 를, 신성의 등장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직 단상에서 내려가기는 이르다.
"다음으로, 작위를 수여하겠다."
아직 승작식이 남았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