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라이젠 남작령의 영주대리 랑스 오스텐트. 아니, 이제는 랑스 라이 젠이라 불리게 된 소년은 멍한 눈 으로 앞을 바라봤다.
"이, 이건 대체…."
그의 아연한 눈길이 전방으로 향 한다. 그러자 그곳에는 커다란 구조 물이 자리해 있었다.
조병창. 대량의 무기와 방어구들을 생산하는 시설. 그것이 루벤 마을 한켠에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조병창만 있었다면 그도 그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병창 안에서 일하는 이 들은 모두 인간이 아니었다.
"영주대리님. 새로운 드워프 부족 이 도착했습니다."
"… 또?"
"네. 또입니다. 이번에 온 드워프 부족은 강철방패 부족이라 하더군요. 부족원의 수는 약 이백여 명입 니다."
한지훈이 수도로 떠나고 난 뒤, 드워프 부족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있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희귀 금속자원들의 발견.
물론 드워프들이 처음부터 소문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드워프는 엘프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고, 그렇기에 엘프들이 전해준 소식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에 불과했다.
"형제여, 자네 강철방패 부족도 여기로 왔구만."
"그래. 그대 회색망치 부족이 자리를 잡았다 해서 찾아왔지. 어떤 가? 정말 희귀금속 광산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네, 칼디그. 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광산까지 개발했어. 이곳에 희귀금속 광맥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회색망치 부족이 자리를 잡고 광산을 개발하자 그 소식을 듣고 다른 드워프 부족들 또한 하나둘 모 이게 된 것이다.
드워프들은 엘프를 신용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너무나도 좋지 않 기에.
하지만 같은 드워프 부족이 있다 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드워프는 독립적인 부족 생활을 하지만, 각 부족끼리는 서로 연락망 이 연결되어있다. 회색망치 부족이 이곳 라이젠 남작령에 정착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
그에 다른 드워프 부족들 또한 찾아오고 있었다.
"… 드워프들."
랑스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로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드워프들은 흐물흐물 녹은 철 괴를 담금질 하고, 두드리며 단조작업을 진행하기도했다. 검과 창, 화살이 대량으로 양산되어간다.
당장 시야에 보이는 드워프들의 수만 수백여 명. 하지만 저 조병창 안과 북쪽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까지 합친다면 천을 넘는 수의 드워프들이 있으리라.
랑스의 옆에서 수석행정관 헨리 돌턴이 입을 열었다.
"드워프 여섯 개 부족이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드워프 부족들 또한 속속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드워프들이란 거, 원래 이렇게 보기 쉬운 종족이었나?"
"아닙니다, 도련님. 본래 드워프 들은 대부분이 중앙 대륙에서 살고 있다 들었습니다. 인간 세상으로 나 왔던 이들은 기술을 갈고닦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소수에 불과했지요."
헨리의 말에 랑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드워프들이란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황궁의 직속 대장장이들 사이에서나 한두 명 볼 법한 이들. 그들은 그만큼 인간들에게 있어 신비한 종족이었다.
"이 영지의 자원이 귀하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지요."
그런 드워프들이 무려 천이 넘게 이 영지에 도착했다. 그이유는 다름 아닌 영지가 가진 지하자원 때문.
미스릴, 아다만티움, 오리할콘. 저 마나가 풍부한 중앙 대륙에서도 몹시 귀한 자원들이다. 그것들이 이 변방 영지에 떼거지로 발견되었으니 , 장인의 종족인 그들의 관심을 얻을 수밖에.
그렇게 랑스가 조병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여기 있었군, 영주대리."
저벅, 누군가가 다가왔다. 랑스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가장 먼저 합류한 회색망치 드워프 부족의 족 장, 드루바였다.
그가 랑스에게 다가와 말한다.
"관사에 비콘을 설치하겠다. 허락 해줬으면 하는군."
"비콘? 지금 우리 영지에는 그럴 만한 자금이…."
"아니. 대가는 이미 한지훈 남작 에게 받았다."
드루바는 씩 웃으며, 허리춤에 찬 천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살펴보니 손톱만 한 초록색 광석 조각이었다.
"미스릴 조각을 미리 받았었다. 그에 우리 부족은 조병창과 영주성을 건설하고, 비콘을 설치해주기로 약속했지."
"조병창뿐만 아니라, 비콘과 영주 성까지?"
"그렇다. 이제 조병창을 설치했으니 , 비콘을 설치하고 영주성 또한 건설해야 하겠지."
드루바가 미스릴 광석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이어 말했다.
"그러니 관사에 비콘을 설치하는 걸 허락해줬으면 하는군. 아, 그리고 영주성을 건설할 부지 또한 짚 어주고. 한지훈 남작이 자신이 영지에 없을 때는 영주대리인 그대에게 물어보라는군."
"… 허어."
랑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드루 바를 바라봤다.
그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어."
라이젠 남작령이 급격히 발전하 기 시작한다.
- …드워프들이 모여 영주성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그 속도가 대단히 빠릅니다. 아마 며칠 만에 번듯 한 영주성이 세워질 것 같습니다만.
"그래? 순조롭네."
게딘이 쳐들어왔던 그날 저녁. 나는 내 영주대리 랑스에게서 온통신을 받았다.
보고받은 것은 드워프들의 영지 합류, 그리고 영주성의 건설, 더해 조병창과 광산의 개발 및 가동까지.
정말 순조로운 발전이다. 나는 흡족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그렇게만 해줘. 무언가 일 이 생기면 곧장 알려주고."
- 알겠습니다. 한지훈 님.
통신이 종료되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비콘이 있으니 편하단 말이야."
마침내 비콘이 영지에 설치되었다. 덕분에 나는 아펠도른 요새뿐만 이 아닌 내 영지와도 통신할 수 있게 되었다.
타지를 전전하는 군인이라는 직업 덕분에 나는 영지에서 오래 있을 수 없다. 때문에 비콘의 설치가 절실했는데, 마침내 해결된 것이다.
"앞으로는 영지에 갈 일이 많이 줄어들 테니까."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그리 읊조렸다.
눈을 감고 지금 대륙의 상황을 떠올린다.
네 방향에서 쳐들어오는 적국.
동부에서는 람셀의 보병군단이, 서부에서는 트웨인의 기병이 휘젓 고 있다. 남부에는 코르자카의 해군 이 연안에 상륙했으며, 북부는 카렌 의 산악병들이 장악 중.
이중 유일하게 승전을 이룬 것이 요한바르첸 방면을 수호하고 있는 제국군. 바로 내가 소속되어있는 북부군이다.
"앞으로 많이 굴러다니겠지."
황제는 나를 영웅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영웅으로 오롯이 서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도 더욱 많은 전공이 필요하다.
아마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격렬한 전투가 쉼 없이 이어지리라.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흑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공국전쟁이 끝나고 아직까지는 흑마법사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 지 않았다.
이렇게 조용한 놈들이 아닐 터인 데.
표정을 찌푸렸다.
"놈들이 뭘 준비하고 있는 거지."
직감했다. 흑마법사들의 음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놈들이 무언가 개수작을 부리리라.
나는 황궁의 숙소에서 가만히 생각한다.
"광기의 시대가 도래했다."
흑마법사 크라함이 그리 읊조리 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붉은색 안광이 저 밤하늘, 점차 만월에 다 가서는 커다란 달로 향한다.
크라함이 나직이 묻는다.
"준비는 되었나, 한스."
"언제든지 싸울 수 있습니다. 크 라함 님."
"그래."
씨익. 크라함이 질척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던 한스 요한바르첸.
한스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랐다.
전신의 근육은 더욱 팽창해 있었다. 눈가에 일렁이는 붉은색 안광 또한 보다 선명해져 있었으며, 더해 그의 전신에서 일렁이는 질척한 암흑색 기운까지.
시스템의 보정으로 인한 성장.
한지훈은 강해졌다. 하지만 강해 진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시스템은 시나리오의 주인공인 한지훈의 성장을 감지했고, 그에 대적자의 역할을 맡은 한스의 잠재력 또한 성장시킨 것이다.
크라함이 클클 웃으며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롬, 베이먼."
"네. 크라함 님."
크라함의 부름에,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롬과 베이먼이 고개를 숙여 반응한다. 크라함이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드디어 움직일 때다."
그가 스태프를 까딱였다. 그러자 지면에 검은색 마법진이 그려지며 묵직한 기세를 발한다.
크라함이 나직이 지시했다.
"암흑기사 오백과 흑마법사 백을 주겠다. 제국 수도로 가라. 모자란 주인공에게 충격을 줘야 하니."
흑마법사의 세력이 다시금 움직 인다.
다음날 아침. 나는 거울을 바라 보며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음."
고개를 끄덕였다.
입고 있는 것은 깔끔히 다려진 제국군 정복. 가슴팍에 달린 것은 천인장 계급장과 덕지덕지 붙은 훈 장들.
나직이 중얼거렸다.
"새로운 훈장이라."
이번에 나는 제국 영웅훈장을 받게 된다고 한다.
제국 금성훈장은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받을 수 있는 훈 장의 끝은 아니다.
제국 영웅훈장.
비단 무공훈장뿐만이 아니라, 모든 훈장들 중 왕이라 할 수 있는 훈장이다.
말 그대로 '영웅'이라 불릴 정도 의 공훈을 세워야만 받을 수 있는 훈장.
그 영웅훈장을 내가 받게 되었다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제피르도 영웅 훈장을 받았었지."
정복 전쟁 당시 전쟁영웅이었던 제피르 또한 영웅훈장을 받았었다 들었다.
"하긴. 그 제피르였으니까."
제피르의 정복 전쟁 당시 공훈은 그야말로 차마 세기 힘든 정도다.
군단을 지워버렸고, 왕궁을 불태 웠으며, 수많은 요새와 성벽을 무너 뜨렸다.
바꿔 말하자면, 그 정도로 대단 한 전공을 세웠던 제피르나 받는 훈장을 내가 받게 된 것이다.
"그만큼 황제가 나를 밀어주고 있다는 것이겠지."
검을 허리춤에 차며 픽 웃었다.
사실, 제국 영웅훈장은 지금의 내게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물론 내가 여러 전공을 세워왔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제피르처럼 오랜 시간동안 막대한 전공을 세웠 던 것은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앞으로는 그 정도 전공을 세울 수 있으니까."
여러 전투를 벌이며 계속해 전공을 쌓아갈 터다. 언젠가는 제피르처럼 막대한 전공을 쌓을 수 있게 되 겠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거울 속옷 매무새를 확인했다.
그렇게 내가 훈장 수여식을 준비 하고 있을 때였다.
덜컹.
숙소의 문이 열리며, 다수의 인영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황궁의 시녀들이었다.
그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고한다.
"한지훈 남작. 훈장 수여식 전 준비를 해야 합니다만."
"그렇습니까."
나는 시녀들의 등장에 고개를 끄 덕였다.
사실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대부분이 백작이나 후작 등, 고위 귀족가의 여식들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녀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시녀들이 다가와 내 모습을 찬찬 히 살펴본다.
"복장은 일단 합격이군요. 정복이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있어요."
"뭐,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 정복을 입은 경험이 그리 많지 않으니 .
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전투 복을 입고 보냈다.
"하지만…."
시녀들의 시선이 내 얼굴로 향한다. 그녀들이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내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
그녀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검은색이라. 불길해요. 아무래도 바꿔야 할 것 같네요."
"…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한지훈 경. 그대는 제국의 영웅 이 되어야 하지요. 그리고 오늘은 그대의 모습을 수많은 인파 앞에서 처음 드러내는 자리. 아, 파비앙. 황궁 마법사를 불러와줄래요?"
"알겠습니다. 시녀장님."
그녀들이 마법사를 부른다. 나는 꺼림칙한 기색을 느꼈다.
시녀장이라는 여성이 이어 말한다.
"제국의 영웅이라는 사람이 불길한 검은색 머리카락, 검은색 눈동자 라니. 어울리지 않잖아요?"
"그래서. 뭘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염색해야죠. 동화 속 영웅처럼 찬란하고, 세련되게 말이에요."
즉 훈장 수여식으로 이미지 메이 킹을 하겠다는 소리다.
시녀가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 더니, 결정했다.
"영웅이라면 역시 황금색 머리카락이 어울리겠죠?"
"눈동자는 파란색이 어때요?"
"좋네요!"
그네들이 내외모를 어떻게 바꿀 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망할…'
하마터면 혀를 찰 뻔했다.
굴라덴 이후로 염색할 일은 없으 리라 여겼었다. 하지만 이곳 황궁에서 또다시 그 망할 놈의 금발로 염색하게 되었다.
덜컹.
다시금 문이 열리며 시녀와 마법사가 방안으로 들어선다.
"시녀장님. 황실 마법사님을 모셔 왔습니다."
"좋아요. 자, 마법사님. 이분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바꿔주시겠 어요? 머리는 금색, 눈동자는 파란색으로요."
"어렵지 않은 일이군요."
황궁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을 발현했다.
나는 참담한 심정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