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제국 황제]
["그래. 자네가 그 명성이 자자하 던 한지훈 군단장이로군.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되었어."]
모니터 속 보였던 아르테니아의 모습.
그는 고귀했다.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제국 황제]
["한지훈 군단장. 자네는 병력을 너무 소모적으로 운용하는 것 같더 군. 전공을 세우는 것도 좋겠지만, 좀 더 부하들을 헤아리게."]
아르테니아는 이 세상 속 대다수 위정자들과 달리, 아랫사람을 아끼 고 보듬는 이였다.
그 누구보다도 높은 자리에 있으 면서 아래를 굽어살피는 이.
사실, 그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제국 황제]
["이번에도 맡기겠네, 한지훈 북부사령관. 오직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나는 계속해 전공을 세워 위로 올라섰고, 황제는 나를 신임해 중요 한국면의 전투가 있을 때마다 내게 지휘를 맡겼다.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제국 황제]
["… 흑마법사와 손을 잡다니. 자네 제정신인가."]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가 흑마법사와 동맹을 맺기 전까지의 이야기 였지만.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제국 황제]
["흑마법사 놈들은 인류의 적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녀석과의 관계 를 끊게, 한지훈."]
그는 내게 단 한번의 기회를 줬었다.
하지만 나는 흑마법사와의 동맹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전투는 흑마법사의 협조 없이 절대 이길 수 없었으니까.'
너무나 힘든 전투였다. 적의 수는 내 병력을 압도했으며, 마법전력 또한 크게 달렸다. 기사단은 연달아 일어났던 전투로 인해 전멸했던 상황.있는 것이라고는 적에 비해 열세 인 보병전력과, 한줌에 불과한 마법 전력이 고작.
'흑마법사의 동맹 제안.'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거절 할 수 없었다. 계속해 이어왔던 승리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저 게임이라 여겼기에.
나는 흑마법사를 받아들였다.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제국 황제]
["결국 이렇게 되는군."]
["한지훈. 너는 더 이상 내 군신 이 아니다."]
["너는 제국의 반역자이자, 인류 의 적이다."]
이후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황제는 나를 반역자로 결정, 축출하려했다.
중앙군이, 근위군이, 그리고 황실 기사단이 쳐들어왔다. 격전을 벌였다. 나는 한때 내 아군이었던 이들을 상대로 병력을 지휘해 전투를 이어갔다.
결국 나는 병력을 몰고 황궁으로 쳐들어가,
[제거]
그를 죽였다. 황제의 자리를 찬 탈했다. 제국의 주인이 되었다.
정복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선을 들어 올려 눈앞의 인물을 바라봤다. 저 커다란 황금옥좌 위에 앉아 오연히 이쪽을 내려다보는 이.
아르테니 아.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다.
* * *
'신기한 외양이군.' 황제 아르테니아는 한지훈의 모습을 살폈다.
시커먼 머리와 눈동자 때문에 언 뜻 불길해 보이는 외양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에게 불길함을 느끼기보 단 무게를 느꼈다.
강자의 여유라는 것일까. 그의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고, 시선은 또렷하고도 선명했다. 그리고 그 눈망울 속에서 번들거리는 곧은 심지란.
황제가 상상해왔던 믿음직한 군인의 모습. 그것을 저 눈앞의 한지훈 천인장이 보여주고 있었다.
아르테니아는 한지훈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문득,
'… 이상하군.'
의아함을 느꼈다. 한지훈 천인장 의 반응이 그의 예상과 퍽 달랐기 에.
아르테니아는 황제가 된 뒤, 이거대한 황금옥좌에 앉아 수많은 고위 대신과 군관, 상인들을 마주했다.
그때마다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 어떤 이는 황제인 자신에게 위압되었고, 어떤 이는 탐욕의 눈빛을 내비쳤으며, 누군가는 제국의 주인인 황제를 직접 보았다는 것에 영광을 느끼기도했다.
하지만 한지훈의 반응은 그로서 도 색다른 것이었다.
'후회.'
눈을 본다면 알 수 있다. 한지훈 의 암흑색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는 후회의 감정이 아른거리고 있다.
어째서 후회하는 것인가?
황제는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한지훈의 후회하는 눈빛은 아주 찰 나에 불과했기에.
그의 눈빛은 우묵하게 가라앉는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서관, 내다음 일정은 확실히 비워뒀겠지?"
"네. 확실히 일정을 비워뒀습니다, 황제 폐하."
"그럼 나는 한지훈 경과 독대하 겠다. 자리를 만들어주게."
"명령을 따릅니다, 황제 폐하."
비서관이 물러간다. 황제가 옥좌에서 일어섰다.
"자, 따라오게 한지훈. 자네와는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 ."
나는 황제의 뒤를 따라 기다란 복도를 걷고, 계단을 타고 올랐다.
황제의 뒷모습을 살핀다.
황금색 제복을 입은 그의 뒷모습. 젊은 나이임에도 당당한 위엄을 전신에 두르고 있다.
그의 뒤를 따르며 고뇌한다.
'이번에는 어떻게 되려나.'
게임의 시나리오에서는,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황제를 적대했었다. 그의 자리를 찬탈했다. 황제를 죽였 던 것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정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가급적 황제를 적대하고 싶진 않다. 그는 결코 악인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그리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을 때.
"다 왔군."
황제가 어떤 문 앞에 멈춰 섰다. 그에 호위기사가 문을 열어준다.
문 안쪽으로 보이는 것은 커다란 방안이었다. 곳곳에 값비싸 보이는 장품이 걸려있고, 천정에는 샹들리 에가 매달려있으며, 드넓은 테라스 가 달린 방.
그 방 창가 앞에는 작은 테이블 이 놓여있다.
황제가 걸어가 착석한다.
"앉게, 한지훈."
나 또한 저벅저벅 걸어가 의자 위에 앉는다.
달그락, 달칵.
시녀들이 차를 날라 온다. 황제는 피식 웃었다.
"자네. 꽤 과묵하군 그래."
"어찌 황제 폐하 앞에서 손쉽게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
"걱정 말게. 나는 말실수 정도로 무어라 하는 속 좁은 인간은 아니 니."
그건 이미 알고 있다.
달칵. 황제가 찻잔을 들어 올리 며 운을 뗐다.
"한지훈 천인장. 나는 자네를 영웅으로 만들 생각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반 쯤 예상했던 일이기에.
' 프로파간다.'
황제는 프로파간다를 계획하고 있다.
겉보기로는 중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마법이 발전한 세계다. 제국의 영토 전체에 걸쳐 마나 통신망이 연결되어 있다.
선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자네를 제국의 영웅으로 선포, 제국 영웅훈장을 수여할 거다. 그리고 전군에 걸쳐 자네의 전공과 활 약을 전파할 것이지."
제국의 힘을 과장하고 영웅을 만들어 민중의 시선을 모은다. 반면 적의 전력을 깎아내리고 폄하한다.
사기진작을 위한 선전활동.
그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는 영웅 역할에 내가 낙점되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묻는다.
"어째서 접니까, 황제 폐하."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출신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평민 출신이었다.
"혈통도, 전통도 없지요."
시선을 들어 올려 황제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이. 그가 평민 출신 남작인 내게 제국 영웅이 되라 제안했다.
"다른 영웅 역할을 할 만한 귀족 군관들도 많은데 말입니다."
내가 활약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동안 많은 전공을 세웠으니 .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 또한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다.
"오스카 디 로드게리스 후작."
공국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번 루벤 방어전 또한 성공적으로 완수한 장성. 북부 3군단 군단장 오스카 디 로드게리스 후작.
"베르겐 라 프랜시스 백작."
천여 명의 기사들을 이끌며, 전 장의 전열을 돌파하는 강력한 무위 를 보인 기사단장. 베르겐 라 프랜 시스 백작.
"제피르."
과거 정복 전쟁 때도 제국의 전쟁영웅이었으며, 이번 루벤 방어전에서도 막대한 무위를 보위 전투마법사.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단장 제피르까지.
영웅으로 세울 고위층은 결코 적 지 않다. 저 셋만 해도 충분히 영웅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만큼 의 활약을 보여줬으니 말이다.
일반 민중들을 통제하고, 상위 계층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서는 고위 귀족을 영웅으로 내세우는 것 이 합당 할 터인데.
헌데 황제는 저들 고위 귀족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평민 출신, 그것 도 아직은 기껏해야 천인장에 불과 한 나를, 굳이 제국의 영웅으로 낙 점했다.
"어째서 저입니까? 황제 폐하."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라성 같은 고위 귀족 고위 군관들과 전투마법사를 제치고, 어째서 나를 선택했냐고.
그에 황제는,
"자네가 평민 출신이기 때문이다. 한지훈 천인장."
그리 답했다.
달그락.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의 발걸음 이 향하는 곳은 창가.
창밖을 바라본다.
그러자 황궁의 드높은 시야 아래 제국 수도, 오르페이아의 전경이 보 인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것처럼 늘 어져있는 건물들의 무리. 드문드문 높은 건물과 마탑이 서 있고 인파가 움직인다.
"저기를 봐라."
그가 손가락을 움직여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멀리, 수도 한켠에 있는 시장이었다.
시장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시장의 인파군요."
"그래. 그리고 저들 모두가 평민 이지."
황제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제국을 움직이고, 빛을 드리우는 것은 귀족을 비롯한 고위 계층이지.
이건 부정할 생각이 없다."
무얼 말하려 하는 걸까.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그 제국을 떠받치는 것은 저기 평민들이다."
황제의 시선이 다시 돌아가 창밖, 수도의 전경으로 향한다.
"이 세상의 절대다수는 평민이다. 검을 들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것은 평민 병사들. 그 병사의 검을 만드는 것도 평민 대장장이. 그대 장장이에게 철광석을 가져다주는 것도 평민 상인이지. 제국은 오롯이 저 평민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자주 잊어먹는 사실이다.
제국을 움직이는 것은 고위 귀족 들이다. 그들이 이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한다.
하지만 그런 제국의 약진을 떠받 들 듯 지탱하는 것은 귀족이 아닌 이들.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이다.
"한지훈."
황제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르테니아의 황금색 눈동자 속에서는 어떤 신념이 굳건히 자리해 있다.
"너를 내세워 민중들에게 전할 것이다. 제국은 헌신을 잊지 않는다 고. 언제나 입신의 길은 열려있다고 말이다."
입신의 길이라.
나는 마침내 황제가 어째서 나를 제국 영웅으로 내세우려 하는지, 깨 달을 수 있었다.
'나를 평민들의 구심점으로 삼으 려고 하고 있다.'
나는 평민 출신으로서 천인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작위를 얻었다. 출신의 한계를 극복해 점차 위로 올라서고 있다.
황제는 그런 나를 내세워 평민들에게 선보이려 한다.
목적이야 많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 고위 귀족 들의 견제, 일반 민중들의 지지.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황제 그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 때문일 것이다.
"선대 폐하께서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 노력에는 경의를, 성과에는 합당한 보상을, 실패에는 인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서를."
황제는 인망을 가진 이였다.
아래를 보살피고, 신하가 최대한 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해주는 이.
그의 아래에 여러 인재들이 모여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제 평민 인재들마저 취하 고자 한다.
"한지훈. 절대 지지 말게."
그가 시선을 돌려 다시금 창밖을 바라본다. 아르테니아 황제의 말이 이어진다.
"영웅의 어깨는 무겁지. 자네의 실패는 자네를 믿고 따르는 이들, 그리고 자네의 행보를 지켜보는 일반 민중들의 실패이기도 하다."
알고 있다.
황제가 나를 내세운 것은 단순한 프로파간다 공작이 아니다. 제국의 일반 민중들에게 의욕과 사기를 불 어넣기 위해 나를 세웠다.
내가 실패한다면 그 여파가 만만 치 않을 터.
피식. 황제가 웃는다.
"영웅이 된 걸 축하하네. 한지훈 ' 백작'."
아무래도, 황제는 내게 백작위를 수여해주려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