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천인장님. 안 불편하십니까?"
삼 일 뒤. 요새로 복귀한 나는 카일과 마주쳤다. 그러자 녀석이 내 게 대뜸 하는 말이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내려 내 가슴 팍을 바라봤다.
훈장들이 덕지덕지 발려있었다.
제국 동성훈장, 은성훈장, 돌격장, 용맹장, 그리고 금성훈장까지.
피식 웃었다.
"불편하진 않은데 거추장스럽다."
"허어. 제국 군관들 중 훈장을 거추장스러워하는 분은 천인장님이 유일할 겁니다."
지금 나는 제국군 정복을 입고 있었다. 황제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나름의 격식을 차리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훈장을 패용해야 하는 일. 하지만 내 가슴팍에 자리해있는 훈장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에 꽤나 요란스러웠다.
"이거야 원 방탄훈장도 아니고."
훈장을 계속해 모은다면 정말 방 탄훈장처럼 되지 않을까?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낼 정도로 말이다.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저기서 엘락이 걸어왔다. 녀석이 경 례하며 내 앞에 섰다.
"천인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나는 천천히 엘락의 모습을 살폈다.
엘락은 아펠도른 요새 방어전 당시 옆구리에 화살을 맞아 부상당했었다. 그에 목숨이 위험했었는데 .
다행히 내가 제때 포션을 준 덕분에, 지금 녀석은 쌩쌩히 살아있다.
엘락의 어깨를 두드렸다.
"엘락. 나 없는 동안 천인대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엘락이 호탕하게 대답한다.
나는 녀석을 지나쳐 요새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여러 광경이 시야에 잡혔다.
이곳저곳에 쳐진 천막들. 그 안 에는 부상자들이 많았다. 피 묻은 붕대가 이곳저곳에 널려있고, 비릿한 혈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역시. 피해가 컸다.'
루벤 방위전. 이쪽이 승리했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피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에 참여한 병력의 삼분지 일 이전사했다고 들었다. 특히나 제 3군단의 피해가 심했다. 당장 내 아펠도른 천인대만 해도 병력이 반 토막이 나버렸으니 .
'뭐. 내가 황궁에서 돌아올 때까 지는 병력이 충원돼 있겠지.'
북부군 예비대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 한다. 그리 머지않아 병력이 충원되리라.
나는 계속해 걸어 아펠도른 요새 의 중앙, 3군단 지휘부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오스카가 있었다.
"아, 한지훈 천인장. 제시간에 맞 춰서 왔군."
오스카가 씩 웃고, 나는 경례하 며 지휘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처음 보는 인영이 보였다.
'황실마법사.'
화려한 금수로 장식된 로브를 입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등짝과 가슴팍에는 황실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있다.
저자가 바로 황실 마법사일 터다.
제피르처럼 전투에 집중하는 전투마법사들이 아닌, 황제를 보좌하 며 온갖 마법을 연구하고 활용하는 이.
비유하자면 제피르는 전쟁을 위해 마법을 배운 기술자, 그리고 저 황실 마법사들은 오직 마나와 마법 그 자체를 탐구하는 학자라 할 수 있으리라.
부스럭.
마법사가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것은 주름이 자글 거리는 노인의 얼굴.
그가 입을 열어 말한다.
"반갑네, 한지훈 천인장. 황실 마법단 단장 델티먼이네."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델티먼][황실 마법단장]
델티먼. 그이름을 듣는 순간,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나 과거 게임 속의 기억이었다.
[델티먼][황실 마법단장]
["폐하!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이곳은 저희 마법단이 막겠습니다! 저희가 시간을 끄는 동안 어서…!"]
마지막까지 황제의 곁에 남아 그 를 지키려 했던 이.
물론 그는 순식간에 죽어버렸었다. 그만큼 크라함의 혹마법은 강력 했었기에.
그 얼굴을 이곳에서 볼 줄은 몰 랐다.
나는 그에게 경례했다.
"북부 3군단 예하, 아펠도른 천인대장 한지훈 라이젠입니다. 황실 마법단장 각하."
"그래… 음, 좀 놀랍군. 내 예상 보다도 나이가 훨씬 젊어 보인다 만."
델티먼은 내 나이가 예상보다 어 리자 놀라워하고 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고작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천인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나는 씩 웃고, 그는 찬찬히 내 모습을 살펴본 다음 읊조렸다.
"확실히, 강하군 그래. 한지훈 천 인장. 마나의 농도와 그 기세가 심 상치 않구만. 정말 대단해."
과연 마법단장이라는 것일까. 그는 내 모습을 잠시 훑어보는 것만 으로도 내 경지를 읽어냈다.
문득 생각했다.
'그나저나 황실 마법단장이라니. 예상외인데.'
황실 마법사가 올 것이라고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설마 단장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올 줄이 야.
추측해본다.
'그만큼 황제는 나를 눈여겨보고 있다.'
단장을 직접 보낼 정도라면 그 정도로 신경 쓴다는 의미일 터.
내가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델 티먼이 입을 열어 말했다.
"이제 시간이다. 슬슬 황궁으로 가지. 초장거리 도약 마법을 준비하 겠네."
"알겠습니다."
그가 지팡이를 들어 올려 마법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웅웅웅웅…!
마법진이 지면에 떠오르고, 푸르른 마나광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웅혼한 마나가 끓어올라 내 몸을 휘감는다.
초장거리 도약 마법의 발현.
번쩍!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 * *
"… 오."
나는 나직이 탄성을 내쉬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주변의 경관이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칙칙하던 지휘부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고, 꽤나 고풍스러운 방안에 내 몸뚱이가 자리해 있었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게 초장거리 도약 마법…."
시야가 하얗게 물들고 잠깐 몸에 부유감이 스쳐 지나가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있다.
도약마법을 직접 접한 것은 처음 이기에 몹시 신기했다.
"이곳은 황궁 별관이라네. 한지훈 천인장."
솔직히 벌써 황궁으로 왔다는 체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차로 꽤나 긴 시간동안 달려야 간신히 도착하는 곳이 바로 제국 수도였다. 헌데 그 찰나의 순간 만에 이동하다니.
물론 그대가는 상당했다.
꿀꺽, 꿀꺽.
초장거리 도약 마법을 발현한 델 티먼이 마나포션을 삼켜댔다. 아무래도 거리가 너무 멀었으니 소모되는 마나 또한 막대했을 터.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마저 흐르고 있다. 아무래도 방금 전 도약마법에 대부분의 마나를 소비한 듯싶다.
"좋아. 이제 가지."
잠시 숨을 고른 델티먼이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천천히 걸어 그의 뒤를 따랐다.
덜컹.
커다란 문이 열리고, 별관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보인 것은 몹시 화려하게 꾸며진 드넓은 정원.
형형색색의 꽂과 나무들이 아름 답게 꾸며져 있다. 벌과 나비가 날 아다니고, 나무들은 하늘에서 내리 쬐이는 햇쌀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는 그 풍경을 잠시 동안 바라 봤다. 이 세상에 온 이후, 이토록 평화롭고도 온화한 광경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한시도 검을 근처에서 떼어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피 냄새에 절여 졌고, 적의 고함소리와 비명을 자장 가 삼았다.
헌데 이렇게 평화로운 광경이라.
그때 문득.
'…익숙한 풍경이다.'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느낄 수 밖에 없다.
이곳은 황궁. 게임 속에서 전투를 벌였던 공간이다. 당연히, 기억 속에 남을 수밖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갈람프 디 브리기테][황실 기사단장]
["너는 이곳을 지나가지 못한다. 한지훈."]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정원. 주변에 피를 줄줄 흘리며 나자빠져 있는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
그리고 그 위, 불타는 정원을 배경 삼아 검을 들고 있는 한 명의 기사.
그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앞을 가로막는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갈람프 디 브리기테][황실 기사단장]
["황제 폐하…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
이 정원에서 황실 기사단이 전멸 했었다.
계속해 발걸음을 옮겨 길을 걸었다.
바라보는 곳마다 게임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무둔치 아래 기사들이 죽어 시체가 켜켜이 쌓였다. 별관은 흑마법사들의 공격으로 무너져 내렸다. 저기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던 자리에는 병사들이 떼 몰살당해, 핏물로 지면이 물들었다.
마치 시야 위에 덧씌워지듯, 드문드문 떠오르는 과거 게임 속 광경들.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죄악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질끈 눈을 감는다.
'정신 차려!'
왜 나는 과거 게임 속 기억을 쫓 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전 시나리오에 불과했다. 지금은 내 행동에 따라 새로운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상황.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
고개를 들어 올려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거대한 건축물이 보인다.
"저기가 제국 황궁."
커다란 궁전. 벽면은 햇살을 받아하얗게 반짝였고, 그 규모는 마치 현대의 빌딩처럼 웅장한 멋이 있었다.
저 안에 황제가 있다.
나는 발걸음을 움직여 황궁 안으로 향한다.
"폐하. 북부 3군단, 아펠도른 천인대장 한지훈이 황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옵니다."
시녀가 황제에게 그리 보고했다.
"그래. 드디어 왔군."
황제 아르테니아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봤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한지훈 천인 장에 관한 인사서류였다. 그곳에는 한지훈이 세워왔던 온갖 전공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황제의 금색 눈동자가 서류를 훑 는다.
"… 정말 신기한 인물이군."
황제는 한지훈의 서류를 바라보 며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전장에서 오랫동안 구른 병사인 줄 알았다. 그의 무력과 전공은 결코 쌓기 쉬운 것이 아니었을 터이니.
하지만 아니었다. 놀랍게도 한지훈은 고작 스무 살 초반에 불과한 나이에 불과했으며, 군 경력 또한 그리 길지 않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의 성장.
그는 고작 반년 만에 일개 십인 장에서 고급 군관이라 할 수 있는 천인장 자리까지 올라섰다.
황제는 서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직접 만나볼 수 있겠군."
황제는 한지훈에게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서류를 다시 시녀에게 건네 고는 지시한다.
"안으로 들이거라."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덜컹!
알현실의 커다란 문이 열리며, 검은 머리의 사내가 들어섰다.
커다란 문이 좌우로 열린다.
그러자 드러나는 것은 몹시나 크 고 화려한 공간.
바닥에는 붉은색 카펫이 길게 깔 려 있다. 천정에는 화려하고도 커다란 샹들리에가 은은한 마나광을 반 짝였고, 이곳저곳에는 여러 예술품 들이 진열되어있다.
그야말로 돈지랄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기야, 제국의 정 점, 황제가 있는 곳이니 화려할 수 밖에.
저벅, 저벅.
천천히 걸어 앞으로 향한다.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좌우에 도열해있는 것은 제국의 대신들. 각 부처의 장관과 차관 등 고위 인사들이다.
시선을 정면에 두었다. 붉은색 카펫이 이어지는 알현실의 끝, 커다란 황금 옥좌가 자리해있다.
옥좌 위에 앉아있는 것은 나와 동년배 정도로 보이는 청년.
청년의 외양은 퍽 고귀했다.
머리는 찬란한 황금색을 띄고 있다. 피부는 고귀한 신분임을 증명하 듯 새하얬으며, 금색으로 물들어있는 눈동자에는 장엄한 빛이 스며들 어 있다.
나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젊은 나이에 황위를 계승한 제국 의 황제.
[갈람프 디 브리기테][황실 기사단장]
["황실에서 축출 명령이 내려왔다. 순순히 죽어라."]
[르왈로우 테일런스 엠프리아][근위군단장]
["한지훈을 단두대 위로 올려라. 놈은 제국 전복 음모를 꾸미고 있다."]
전생에서는 휘하 병력을 부려 나 를 제거하려 했었고,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제국 황제]
["… 한지훈, 너는 괴물이다. 권력에 미쳐버린 괴물!"]
결국 내가 죽여버렸던 이.
그가 저기, 저 황금색 옥좌 위에 앉아서 근엄한 얼굴로 이쪽을 내려 다보고 있다.
나는 무릎을 굽혀 예를 취한다.
"북부 제 3군단 예하, 아펠도른 천인대장, 한지훈 라이젠. 폐하의 부름에 응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래. 네가 그 한지훈이군. 정말 소문대로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라. 꽤 흔치않은 외양이야."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모습을 다시금 시야에 담는다.
아르테니아 황제. 그가 나를 바라보며 씩 웃는다.
"어서 오게, 한지훈 천인장."
- 띠링!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제국 황제]
마침내 황제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