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자, 이거 받게."
요새로 돌아온 뒤, 나는 곧장 오스카 군단장을 마주했다. 그러자 그 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아서 살펴보았다.
"초대장이군요."
"그래. 황궁에서 온 초대장이다. 방금 전 마나도약으로 전송받은 물건이지."
말은 초대장이지만, 사실은 호출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제국 군관들 중 황제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간 큰 녀석은 없을 테니까.
부스럭.
초대장을 펼쳐서 읽어봤다. 섬세 하게 금박으로 장식된 종이 위에 나를 황궁으로 부른다는 내용이 기 재되어 있었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삼 일 뒤라…."
알현 예정 시간은 삼 일 뒤 정오 무렵. 그때에 맞춰 황궁으로 오라 한다.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헌데, 고작 삼 일 만에 제국 수도로 갈 수 있습니까? 거리가 만만 치 않습니다만."
사실 삼 일 만에 이곳, 요한바르 첸 총독령에서 제국 수도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국의 영토는 몹시 광활했기 때문에.
그에 오스카가 피식 웃는다.
"설마 마차를 타고 갈 거라 생각 했나? 그 황제 폐하의 초대인데 말이다."
"그 말씀은…."
"당연히, 도약마법을 사용해 이동 하지 않겠나."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영토 곳곳에 비콘을 깔아 마나통신망을 구축해두었다. 덕분에 마법사들의 협조만 있다면 먼 거리 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
"황실 마법사가 삼 일 뒤 이곳, 아펠도른 요새로 와 자네를 데려갈 걸세."
"그렇군요/ 고작 일개 천인장 하나 데려오는데 황실 마법사까지 동원했다. 그만큼 황제는 나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뜻일 터.
"한지훈. 조심하게."
문득 오스카가 그리 말했다.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조심하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수도에 가지 않나."
화륵. 오스카가 연초에 불을 붙였다. 가느다란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의 말이 이어진다.
"수도에 간다면 여러 정치세력들 이 네게 접근해올 거다."
"정치세력 말입니까?"
"뭐, 고루한 중앙귀족들 말이다.
수도에 틀어박혀서 아귀다툼이나 하는 모자란 놈들."
전장을 전전하던 군관이어서 그런 것일까. 오스카는 중앙귀족들을 혐오하는 것 같았다.
그 본인 또한 후작위를 가진 귀족임에도.
그가 피식 웃었다. 냉소의 감정 이어린 비웃음이었다.
"한지훈. 자네는 정치귀족들을 본 적이 없었겠지. 그동안 전장에만 있었으니까. 하지만 수도에 간다면 알 게 될 거다. 놈들은 오만하고 탐욕 적이다. 구역질이 나오는 놈들이지."
그의 예상과는 달리, 나 또한 정치귀족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엑시포드 루비에 백작.'
재무성 차관이자, 알키온 후작가 의 끄나풀 중 하나.
나는 녀석의 개수작에 의해 자원을 빼앗길 뻔했다. 놈은 마법까지 사용해 사기계약을 진행하려 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군단장 각하."
이미 당할 뻔한 경험이 있는 만큼 오스카의 조언을 기억하는 것이 좋으리라.
* * *
넓고도 화려한 방안. 두 사람이 자리해있었다.
하얀색 머리카락을 지닌 노신사 하나, 그리고 그의 맞은편 상석에 앉아있는 것은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커다란 풍채의 노인.
그들이 서로 대화한다.
"황제는 한지훈을 제국 영웅 자리에 올리려고 한다는군요."
"제국 영웅이라. 황제도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군."
그들은 바로 한지훈과 대립했던 이들. 케니의 아비 게딘 알키온과, 그의 하수인이라 할 수 있는 엑시 포드 루비에 재무성 차관이었다.
"아직 젊지 않습니까. 그리고 황제위에 오른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말입니다. 평민 출신 인물을 키워 저희 귀족들을 억제하려 하는 것이겠지요."
"그래봤자 애송이에 불과한 것을.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군."
달그락.
게딘 알키온이 와인잔을 들어 올려 입가를 축였다.
"그나저나. 전쟁이다."
게딘의 시선이 방 한켠의 지도로 향했다.
지도는 꽤 커다랗고도 섬세했다. 남부 대륙 전체를 그려놓은 대규모 지도.
그의 눈동자가 지도를 흘는다.
"전쟁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지."
게딘 알키온은 정복 전쟁 당시 세력을 키운 중앙귀족이었다.
정복 전쟁으로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사실 그의 가문은 군관가문이 아니었다.
알키온 가문은 상인가문이었다.
정복 전쟁 당시 대량의 물자를 이송하고 공급했으며, 그 와중에 막 대한 재화를 챙겨 성장했다.
전쟁 내내 대다수의 병장기와 보 급품 유통을 독점했던 그의 재력은 지금 제국에서 제일가는 수준.
"이번 기회에 막대한 이익을 취 할 수 있겠지요."
"그래. 전쟁만큼 좋은 비즈니스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전쟁의 시기가 재림했다.
협상동맹의 동시다발적 침공.
제국은 막대한 재화와 자원을 소비해 전쟁을 치르리라. 많은 병사와 군인들이 죽으리라.
그리고 게딘 알키온은 그들에게 장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공급하 게 될 터.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 이다.
씨익. 게딘 후작의 입가에 미소 가 드리워진다.
"나는 전쟁물자를 장악하고 있겠다. 엑시포드, 너는 황제와 재무성 장관을 설득해 더 높은 예산을 집 행할 수 있도록 움직이게."
"알겠습니다."
게딘 알키온은 전운을 감지하자 마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군마, 마차, 병사들이 섭취할 식량, 기타 피복과 보급품 등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았다. 그리고 풀지 않았다.
자신이 독점해 더 많은 재화를 얻기 위해서.
지금은 제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 진 상황. 평소보다 훨씬 비싼 가격을 치른다 한들, 제국은 자신의 물 자를 구매할 수밖에 없다.
"값을 통상의 네 배까지는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해보겠습니다."
"좋아."
게딘 후작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딘 후작이 이끄는 상단, 일리 아 상단은 제국 최대 규모의 상단 이었다.
그들의 영향력이라면 특정 물자 를 독점하고, 다른 상단을 압박하 며, 가격을 폭등시키는 일 따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제국에서는 추가 병장기 가 필요할 터."
후작의 눈길이 지도로 향한다.
지도에 자리해있는 자신의 영지에는 조병창이 있다.
"일리아 조병창을 완전가동하겠다. 무기를 생산해내지. 엑시포드, 무얼 해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게딘 님."
엑시포드가 해야 할 일은 국방성 장관의 포섭, 일리아 조병창의 무기 를 대량구매 하도록 유도하는 일이다.
"좋아. 그럼 전쟁을 즐겨보자고."
전장에서는 군인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나간다. 반면 중앙에서는 게딘을 비롯한 상인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돈을 쓸어 담고 있다.
그들이 움직인다.
"자. 다들 모였나?"
나는 요새 밖으로 나온 뒤, 영지 로 돌아왔다. 황궁으로 가기 전 영지내정을 손보기 위함이었다.
시선을 앞으로 두어 내 앞에 자리해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영주대리를 맡고 있는 랑스, 녀석을 보좌하는 수석 행정관 헨리 돌턴, 영지군을 다루는 마이사, 가장 최근에 합류한 회색망치 드워프 부족의 족장 드루바까지.
이들이 내 영지의 중심인물들이다.
나는 서류를 읽어가며 영지 상황을 파악했다.
"괜찮네."
서류를 확인한 후 나직이 중얼거 린다.
영지의 발전이 퍽 순조로웠다.
세수는 조금씩 증가하고 있으며, 영지군의 훈련 또한 순조롭다. 더해 광산의 개발까지.
딱히 무어라 짚어줄 것이 없을 정도로 무난한 발전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대중 영지는 안정화 된 것 같은데."
벌였던 일들 대부분이 별다른 문제없이 흘러가고 있다. 이제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랑스와 헨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랑스, 헨리. 지금 우리 영지를 지키기 위해선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 영지군을 증원할 여력이 있나?"
"영지군이라…."
헨리가 말끝을 흐렸다.
지금 내 영지에는 약 백여 명의 영지군이 소속되어 있다.
영지민 일만에 영지군 일백. 비율로 따지면 1% 정도. 현대 지구 기준이었다면 적당한 수준이었지만, 이 세계에는 다르다.
마물이 대지를 활보하는 세상이다. 비록 정규군인 제국군이 바로 근처에 주둔 중이라 하나, 그들은 곧 전쟁을 위해 이곳을 떠날 터.
그전에 최대한 영지군을 확충해 놔야 제대로 된 영지방위 능력을 갖출 수 있으리라.
그런 내 말에 헨리가 난처한 기 색을 보였다.
"예산이…."
"뭐. 그러겠지. 언제나 돈이 문제 야."
이미 예상했었다.
영주성조차 없는 가난한 영지다. 영지군을 확충할 여력 따위 있을 리 만무.
하지만 괜찮다. 자금 문제는 그리 머지않아 해결될 테니까.
"일단 계획서만 뽑아놔. 영지군을 확충한다면 얼마나 많은 자금과 시간이 소요될지. 돈은 그리 머지않아 구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그… 영지군을 몇 명으로 확충하는 것을 기준으로 잡습니까?"
"오백."
"네? 잘못 들었습니다?"
"오백."
"맙소사."
헨리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바라 보건데, 내 말을 말도 안 되는 개 소리라 여기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겨우 백명도 간신히 유지하는 지금, 오백의 병사는 꿈이나 다름없으니까.
"정말 자금을 확보할 수 있겠습 니까? 영지군 무려 오백을 유지할 자금입니다. 힘들 것 같습니다 만…."
헨리의 염려 어린 말에 나는 피 식 웃었다.
"나중에 어련히 알게 될 거다. 다음으로… 마이."
"어."
마이사가 내부름에 대답했다.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마이사의 모습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제국군 군복이 아닌 제대로 된 여성 용 의류였고, 머리카락도 나름대로 자라나 귀를 덮었다.
뭐, 그래봤자 아직도 반쯤 남장 같은 느낌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너는 영지군의 정예화에 집중 해."
"정예화? 그게 무슨 소리야?"
"훈련시키라고."
나는 마이사에게 영지군의 훈련을 지시했다.
"주기적으로 병사들을 몰고 마물을 소탕해. 당연하겠지만 네가 직접 병력을 지휘해야 해."
사실 마물소탕 지시는 영지군을 정예화시키는 목적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목적은 바로 마이사의 지휘경험 축적이었다.
'지휘관은 경험을 쌓을수록 노련 해지니까.'
마이사는 아직 애송이다. 하지만 과거 북쪽 산맥 탐사 당시, 그녀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해 지휘경험을 시켜준다면 언젠가 믿음직한 지휘관으로 성장하리라.
"그리고 드루바."
시선을 돌려 드워프 드루바를 바라봤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 으로 걸어 나온다.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내가 부탁한 물건은?"
"여기 있소."
그가 작은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열어 확인했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장검이었다.
그것을 쥐어들었다.
- 띠링!
[드워프제 제국군 보급 장검]
참 아이러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드워프제'이지만 제국군 보급 장검이라.
이 장검은 내가 드루바에게 의뢰 해 만든 물건이었다. 제국군 보급 장검을 대량 양산할 수 있는 수준 으로 만들어보라 시켰던 것이다.
검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좋아. 훌륭한데?"
겉보기에는 일반적인 제국군 장검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이 투박한 외양. 적당한 길이의 양날. 철광석을 아끼기 위해 파여 있는 혈조.
그저 군대에 보급하기 위해 실용 성을 중시한 디자인이다.
하지만 직접 만져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잘 만들었어.'
예술적인 담금질 덕분에 경도와 강도가 퍽 대단했다. 더해 무게 배 분까지 제대로 잡혀 다른 보급 장검들보다 휘두르기 훨씬 편해졌으니 .
겉보기로만 보급 장검이지, 그 품질은 어지간한 장인이 만든 명검 수준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합격점이야. 드루바, 이 장검을 최대한 많이 양산할 수 있나?"
"양산 자체는 가능하다만. 정말 할 셈인가?"
"그래."
과거 나는 요정들을 시켜 게딘 알키온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놈의 약점을 찾기 위해서.
그때 요정이 내게 알려주기를.
- 게딘 알키온은 일리아 조병창을 운영하는 귀족이야. 그 인간의 자본 중 많은 비율이 병장기 생산 과 납품에서 나와.
알키온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커다란 조병창인 일리아 조병창의 소유주였다. 그 무기를 납품하는 데서 얻는 이익이 굉장하다고.
그래서 나는 조병창을 내 영지에 유치하려고 한다.
"나는 당하고는 못 사니까."
녀석에게 되갚아주기 위해.
게딘은 내 영지의 자원을 탐내 개수작을 벌였다. 그러니 나 또한 녀석에게 한 방 먹여줄 셈이다.
"조병창을 만들어 녀석과 군납을 경쟁한다면,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겠지."
이쪽의 무기는 드워프들이 만든다. 아무리 게딘이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조병창을 운영한다 한들, 그 품질은 이쪽에 비해 훨씬 뒤떨어질 터.
영지에 조병창을 유치한다면 영지의 발전과 알키온 가문의 견제, 두 가지 목표를 한번에 이룰 수 있다.
"좋아. 그럼 이제 황궁으로 갈 준비를 해야지."
조병창을 유치하고, 영지를 발전 시키기 위해서는 황제의 지지가 필수. 그리고 나는 곧 황궁으로 가 제국 황제를 만날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