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129화 (129/390)

129화.

"… 대단하군."

베르겐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는 전투하는 와중 어떤 이의 모습을 보았다.

전투마를 타고, 온갖 마법 세례 를 뚫고 질주해가는 한지훈.

대단했다.

전투마를 제 손발처럼 다루었다.

쏟아지는 마탄들을 검을 휘둘러 지 워버렸고, 쇄도하는 얼음창조차 말을 움직여 회피해버렸다. 말을 박차 얼음벽을 간단하게 뛰어넘기도했다.

기사단장으로서 오랫동안 전투마 를 다루었던 베르겐으로서도 하기 힘든 기동.

피식. 그가 웃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 야."

개인의 무력이 대단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처음 타는 것이 분명할 전투마조차 저토록 손쉽게 다룰 줄이야.

"나중에는 전투마라도 하나 선물 해줘야겠군."

베르겐은 그리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적의 본영, 지휘부가 있을 곳에 높이 솟아있는 적의 대장기.

그것이 기우뚱 쓰러지고 있다.

베르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결국 해냈군. 한지훈."

저 대장기가 쓰러졌다는 것은, 한지훈이 적의 지휘부를 완전히 쓸 어버렸다는 것을 뜻할 터.

후욱. 베르겐이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쉬더니, 크게 외쳤다.

"볼로냐 기사단! 전 단원, 주목!"

그의 목소리는 크고 우렁찼다. 이혼잡한 전장에서 똑똑히 들려올 정도로.

철그럭. 베르겐 단장이 장검을 들어 올려 적 지휘부 방향을 가리 켰다.

"적의 지휘부가 궤멸되었다!"

그에 기사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려 베르겐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다.

분명 방금 전까지 높이 솟아있었을 적의 대장기. 그것이 사라졌다.

"놈들은 통제를 완전히 상실했 다!"

베르겐의 눈이 다시금 정면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수많은 인영들이 시야에 자리하고 있다.

적 지휘부의 궤멸 소식에 사기가 오른 아군 기사들. 그에 대비되듯 혼란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적 기사와 병사들.

놈들은 갑작스런 지휘체계 상실에 당황하고 있다.

그리고 당황한 적은 손쉬운 먹잇감이다.

씨익. 베르겐이 웃었다.

"카렌 새끼들을 모조리, 다! 쓸어 버려라!"

"명령을 받듭니다! 단장 각하!"

휘하 기사들이 절도 있게 대답했다.

두두두두두!

제국의 기사들이 왕국군의 전열을 향해 몰아치기 시작한다.

* * *

"그래. 잘 해낸 것 같군. 한지훈천인장."

제피르는 그리 중얼거리며 전열 너머, 적 본영 방향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굳건히 서 있던 적의 대장기. 그것이 쓰러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피식. 그가 웃는다.

"손이 많이 가는 애송이로군. 이 몸이 직접 마중 나와줘야 하다니 말이야."

제피르는 다 타들어간 연초 쪼가 리를 질겅질겅 씹더니, 퉤 뱉어냈다. 아직까지 미약하게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는 그것은 적 마법사의 시체 위에 툭 떨어졌다.

제피르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가 만들어낸 참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십의 마법사 시체들이 불에 타 들어가고 있다. 이글거리는 불길은 그들의 로브를, 살점을 태워갔다. 고기 타는 역한 냄새가 주변을 휘 감는다.

화르륵.

제피르는 품속에서 새로운 연초 를 꺼내 불을 붙였다.

"뭐, 어떻게든 되었군."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배후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휘하 마법사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마법사들이 도열해있다.

그들의 모습은 결코 좋지 않았다.

어떤 마법사는 사지 곳곳에 부상을 입었고, 어떤 마법사는 마나고갈 로 안색이 창백했다. 또 다른 마법사는 부스터의 후유증으로 입가에서 계속해 피를 줄줄 흘려내고 있다.

살아남은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수는 고작 오십여 명. 절반에 불과 한 수다.

하지만 꽤 괜찮은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왕국 마법사 새끼들. 역시 오합 지졸이었어. 난전으로 가니까 정말 숫자 빼고는 별 볼일이 없었군."

후욱-. 그가 연기를 내뿜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제피르의 시선이 다시 앞으로 향 한다. 그러자 지면 이곳저곳에 널브 러져있는 적 마법사들의 시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체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당장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수십. 보이지 않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능히 수백에 달하리라.

제피르는 고작 백여 명의 전투마법사들을 이끌고 무려 오백의 왕국 군 마법사들을 제압한 것이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그들은 정 복 전쟁 시절부터 무수한 전쟁 경험을 가진 정예 중 정예였다. 난전 경험이라면 그들의 경지를 따라올 이들은 없었다.

피식. 그가 웃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할 일은 남아있지.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네. 단장님."

가장 선두에 있던 휘하 마법사가 대답했다.

그의 입가에는 붉은색 핏물이 반 쯤 굳어 들러붙어 있었다. 부스터 음용으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하 마법사의 모습에 제피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과거 정복 전쟁 당시, 수도 없이 보았던 모습이기에.

그가 나직이 입을 연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 알고 있겠지?"

"네.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우우우웅-.

마법사들이 하나둘 스태프를 들어올리고,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푸른색 마나광이 번들거리며 피 어오른다.

"적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겠습니다."

"크흐, 좋아."

제피르가 클클 웃으며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마나공조가 시작되었다.

쿠르르르르르….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라 붉은색 빛을 번들거렸다. 웅혼한 기운이 공기를 진동시킨다.

"먼저, 가볍게 30중첩부터 간다.

적의 우익부터 부수겠다. 타격점 조율."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 적의 잔 당들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 정말, 해냈군."

오스카 디 로드게리스. 제국 북부 제 3군단의 군단장. 그는 요새 의 성벽 위에서서 전장을 바라봤다.

전장은 난장판이었다.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싸웠다.

깃발이 이리저리 휘날렸고, 흙먼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함성 과 고함소리,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쾅쾅 울려왔었다.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전장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콰르르르르릉!

제피르의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 발현한 광역 마법, 30중첩 폭렬폭 풍이 발현되었다.

무수히 많은 폭발이 일었다. 굉 음이 터져 나오고, 붉은색 화마가 적을 집어삼켜간다.

왕국군 병사들이 죽어나간다. 그 들이 폭발에 휘말려, 후폭풍에 날려, 불길에 집어삼켜져 절명했다.

완전한 압도.

제피르가 이끄는 라브리에 전투 마법단은 난전으로서 적 마법전력을 궤멸시켰고, 더해 지금은 보병전력까지 청소하고 있다.

"제피르. 저 인간도 참 대단하 지."

진심으로 전쟁을 즐기는 그다.

거리가 너무나 멀기에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아마 지금쯤 제피르는 입가에 연초를 꼬나물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적을 죽여가고 있을 것이다.

"전쟁에 미쳐버렸긴 했지만. 저자 만큼 든든한 아군이 없지."

오스카는 피식 웃고는 시선을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이번에 그가 바라보는 방향은 적의 좌익이었다.

두두두두두.

좌익에서는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볼로냐 기사단 의 전진이었다.

그들이 전투마를 몰고 병사들을 밟고 치어가며, 오러 서린 기다란 랜스를 휘둘러 적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있는 것은 오스카가 잘 아는 이였다.

"베르겐."

베르겐 라 프랜시스. 그는 적의 지휘부가 궤멸한 틈을 타, 놈들의 진형 깊숙이 파고들며 진형을 어그 러트리고 적을 학살하고 있다.

중앙에서는 제피르가, 우익은 베 르겐이 부수고 있다. 적들은 그저 그들에 휩쓸려 우르르 쓸려나갈 뿐.

저 광경을 만들어낸 이를 오스카는 알고 있다.

"한지훈."

오스카의 시선이 돌아가 적의 중앙 깊숙한 곳, 방금 전까지 대장기 가 서 있던 곳으로 향했다.

한지훈. 그가 이 광경을 만들어 냈다.

병력을 이끌고 중앙까지 밀고 들어갔고, 전투마를 노획해 단신으로 지휘부까지 진입했다. 적의 참모단을 궤멸시켰다. 놈들의 지휘체계를 완벽히 파훼했다.

오스카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 진다.

"장한 녀석."

오스카는 그이상으로 한지훈을 치하할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나직이 입을 연다.

"부관."

"네! 군단장 각하!"

"황실과 마법통신을 준비해주게. 이번 전투의 결과를 보고해야 하니."

"명령을 따릅니다, 군단장 각하!"

부관이 움직인다. 오스카는 달려 가는 부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중앙에서 한지훈을 주목하겠군."

네 국가가 동시에 침공해오는 이 힘든 시기에 이토록 대단한 전공을 세웠다. 중앙이 주목하지 않을 순 없을 터.

오스카는 한지훈이 드높이 올라 갈 것임을 직감했다.

"폐하! 요한바르첸 총독령, 제국 북부군에서 보고입니다!"

병사가 황궁의 알현실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그리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다른 병사들과 달리기쁨의 기색이 가득했다.

병사가 입을 열었다.

"라이젠 남작령에서…! 루벤 방 위전에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 대승이라고?"

병사의 보고에 아르테니아 황제 가 그를 바라본다. 병사는 고개를 한껏 숙이며 재차 고했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북부 제 3, 4, 5군단은 라이젠 남작령 변경 요새에서 카렌 왕국군 병력 8만을 조우, 회전 끝에 대승을 거뒀습니다!"

병사의 말에, 알현실 안에 있던 여러 대신의 얼굴에 기쁨의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네 국가의 침공이 시작되고, 들려오는 소식은 패전밖에 없었다.

동부는 비티베 산맥 방어를 실패, 전선을 크게 뒤로 밀었다.

서부는 네 개의 요새가 점령당했고, 기사단은 전멸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다.

남부에서는 적병이 해안에 상륙 해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있다.

북부는 리비타 전선에서 거듭 패배해 남쪽으로 퇴각 중.

말 그대로 패배했다는 소식밖에 들려오고 있지 않았었는데, 총독령에서 유일한 승전보를 얻은 것이다.

"여기, 전투 보고서입니다. 황제 폐하!"

병사가 부복하며 서류를 내밀었다. 시녀가 받아들어 황제에게 전달 하고, 황제는 그것을 펼쳐 읽어보았다.

황제의 눈동자가 커진다.

"병사. 이 보고가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황제 폐하! 저희 통신병들 또한 여러 번이나 확인하였습니다."

"그래… 정말 사실이라면, 대단한 일이군."

병사의 확신 어린 말을 들은 뒤 에야 황제의 입가에 흠족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대승이었다.

제국 북부군은 6만의 병력으로 8만의 침공군을 막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놈들의 최고지휘관을 사로잡 았으며, 참모단을 완전히 전멸시켰다. 지금은 놈들의 잔당을 제압?섬 멸하는 와중이라고.

바스락.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 서류를 읽어나갔다. 한참 서류를 바라보던 그가, 문득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지훈이라."

서류에는 결정적인 전공을 세운 군관의 이름 또한 자리해 있었다.

한지훈. 과거 공국전쟁 당시 커다란 전공을 세웠으며, 출신의 한계 를 극복해냈던 이.

그가 또다시 전공을 세웠다.

병력을 이끌고 가 중앙으로 파고 들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단신 으로 종심을 돌파. 적 지휘부까지 침투해 참모단을 모조리 제거하고 최고사령관을 생포했다.

대단한 전공이 아닐 수 없다.

"한지훈 라이젠."

황제는 이 놀라운 전공을 세운 인물의 이름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알현실 한켠에 자리해있는 지도를 바라봤다. 제국 전체를 표시한 황실의 전략지도였다.

지도는 꽤나 혼란스러웠다.

제국의 영토 안으로 파고드는 것은 적을 의미하는 붉은색 화살표. 안쪽으로, 깊숙이 안쪽으로 밀려나는 것은 아군을 의미하는 푸른색 화살표였다.

루벤을 제외한 다른 전선에서는 모두 밀리고 있다.

명백히 불리한 상황.

"루벤 방위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고는 하나. 전황은 그리 좋지 않다."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네 국가의 동시다발적인 침공. 과거 정복 전쟁 당시에도 타국들은 이토록 협력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제각기의 국토를 방어하기 위해 각각 따로 움직였을 뿐.

하지만 지금의 적들은 조직적으로, 서로 협력하며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힘든 전쟁이 되겠지."

무려 칠십 내지 팔십만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와중이다. 그야말로 총력전. 과거 열강의 지위를 가졌던 대국들의 전쟁이다.

많은 피해가 일 것이다. 수많은 인명이 죽어나갈 것이다. 광활한 국 토가 불타오를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북부군."

유일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던 제국의 군대. 그들을 움직인다면 이어려운 전황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 수 있을 터.

피식. 그가 미소 지었다.

"전쟁영웅을 만들어야겠군."

이 힘든 전쟁에는 반드시 구심점 이 필요하다.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고, 주변을 규합하며, 따르는 이들로 하여 금 빛을 드리워주는 존재.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향해 영웅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황제는 영웅을 만들 셈이다.

"한지훈을 황궁으로 호출하도록.

직접 만나보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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