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123화 (123/390)

123화.

선봉에 선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대단히 영예로운 일이다.

적게는 수천, 많게는 만 단위의 군대를 선도하며, 적의 전열을 향해 달려든다. 과연 영웅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뒈질 확률이 정말 높겠지만."

나는 그리 중얼거렸다.

오스카 군단장이 내게 선봉을 맡 으라 지시했다.

군단 단위의 회전에서 선봉이라. 자살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회전에서의 선봉자리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확실히. 내가 선봉에서는 게 제일 나을 테니까."

품속에서 마나포션을 꺼내 들이 켰다. 그러자 청아한 기운이 심장 속에 들이찬다.

피식 웃었다.

"다른 천인장들에게 맡긴다면, 간단하게 뭉개지겠지."

물론 다른 천인장들 또한 우수한 군관들이다. 제국군에서 고급 군관 이라 할 수 있는 천인장 자리에 있다는 것은, 적어도 수준 이상의 능력을 갖추었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다수가 오러를 다루지 못한다. 오러를 다루는 이였 으면 대부분 보다 대우가 좋은 기사단에 들어가길 희망하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기사 제의조차 걷어차고 보병대 군관이 되었다. 오러를 다룰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스킬들을 지녔다.

내가 앞서나간다면, 보다 깊숙이 놈들의 진형에 파고들 수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해볼까."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이번에 꺼낸 유리병은 마나포션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수액(극도로 희석됨)]

세계수의 수액. 몸의 모든 이상을 순식간에 치료하는 물건.

지금 쓸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세계수의 수액을 들이켰다.

- 띠링! 띠링!

[유저가 '아이템 : 세계수의 수액 (극도로 희석됨)'을 섭취했습니다!]

[신체가 즉시 회복됩니다.]

내 몸이 회복되어간다.

혹사해 부들부들 떨리는 근육도, 삐거덕거리는 관절도, 온몸에 쌓인 피로까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아쉬운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 띠링!

[아이템의 효과로 능력치가 상향 됩니다.]

[내구 +2]

[체력 +2]

"이번에는 능력치 상승이 예전보 다 낮은데."

처음 세계수의 수액을 섭취했을 때는 내구와 체력이 3씩 올랐었는데, 이번에는 고작 2밖에 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 번째로 섭취하는 것 인지라 효과가 줄어든 모양.

하지만 몸은 완전히 회복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주위에 있는 백인장들을 바라봤다.

"카일, 맷, 크리스토퍼."

"네! 천인장님!"

"너희 1번부터 3번 백인대는 정면을 맡는다."

"명령을 따릅니다."

"다음으로 드웨인, 노먼."

"여기 있습니다, 천인장님."

"너희 4번, 5번 백인대는 각각 좌측과 우측을 커버해. 나머지 백인대는 선두의 뒤를 따른다. 질문 있는 백인장?"

그리 말하고는 백인장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그득했다. 하루 종일 너무나 많은 적병들을 상대로 전투했다. 피로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눈동자에는 깊은 정열이 생생하게 일렁이고 있으니 .

믿음직한 녀석들.

"좋아. 왕국새끼들에게 들이받아 보자고."

이제 왕국새끼들이 바글거리는 전열에 파고들어야 할 때다.

선봉장. 가장 앞에서 전투에 참여하는 이.

내가 제 3군단의 병력을 선도해 야 한다.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천인대 전투지휘술. 활성화."

- 띠링!

['스킬 : 천인대 전투지휘술' 이 활성화 됩니다.]

이제 미친 듯이 싸워볼 때다.

"요새 공략은 순조롭습니다, 사령관 각하!"

부관이 고개 숙여 그리 보고했다. 그에 카렌 왕국 동부군 최고사 령관, 도나드 글리슨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이는군."

그는 앞에 자리해있는 요새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침공로를 완전히 틀어막듯이 자리해있는 두 개의 요새.

그 요새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성벽에는 공성탑과 사다리차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몇몇 성벽은 붕 괴해 커다란 빈틈이 나있으며, 이곳저곳에서는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야말로 함락 직전에 임박한 요새의 모습.

저 요새를 함락시킨다면, 아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부관에게 묻는다.

"좌우를 포위했던 적의 양익은 어떻게 되었지?"

"아군 기사들과 기병대가 움직여 응전 중입니다. 하지만 저쪽 기사전력의 수가 너무 많아서, 좀처럼 제 압하기는 힘들군요."

"쯧."

요새 공략은 순조롭다. 하지만 적의 양익이 꽤나 불편했다.

적의 기사들과 기병들이 아군의 측면을 흔들었고, 이후 적의 보병대 가 이쪽의 영역을 야금야금 파먹듯 파고들고 있는 상황.

물론 아직까지는 그리 큰 위협은 아니었다. 허나 전투가 길어질수록 이쪽이 불리해지는 것은 사실.

"어서 요새를 장악해야 한다. 그래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가 요새를 노려보며 읊조린다.

저 요새만 차지한다면, 밖의 적 병들이야 간단하게 밀어버릴 수 있다. 그들에게는 그 정도의 전력이 있으니 .

그가 그리 요새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부우우우우---.

기다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도나드 후작이 표정을 찌푸렸다.

"저 뿔피리 소리는 뭔가? 보아하 니 요새 방향에서 들려온 것 같다 만."

분명 뿔피리 소리는 요새 방향에서 들려왔었다. 과연 요새에서 무슨 명령을 내린 것일까.

그에 부관이 씩 웃으며 답했다.

"아마 후퇴명령 아니겠습니까? 놈들도 요새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도주하려 하는 것이겠지 요."

"글쎄… 과연 그럴지. 놈들이 요새를 포기하고 후퇴할 것 같지는 않다만."

저 요새를 점령하느냐, 못하느냐 가 바로 회전의 결과를 좌우한다. 이사실을 제국군이 모를 리는 없을 터.

때문에 제국군은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요새를 지킬 것이라 예상 하는 도나드였다.

그가 그렇게 요새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령관 각하!"

그의 참모 중 하나가 도나드를 향해 달려왔다. 그가 다급히 외쳤다.

"요새의 제국군이 이쪽으로 전진 하기 시작했습니다!"

"… 뭐?"

도나드는 참모의 말을 바로 이해 하지 못했다. 그만큼 상식 밖의 일 이었기에.

참모의 말이 이어진다.

"두 요새에서 적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 요새를 사수하지 않고, 전진한 다고?"

도나드는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 봤다.

제국 병사들이 요새에서 우르르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펠도른 천인대! 전진!"

나는 그리 외쳤다. 그에 병사들 이전진했다.

"전진! 전진!"

"한지훈 천인장님의 뒤를 따라 라!"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내 뒤 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수가 대략 오백여 명.

오백. 정말 적은 수다. 저 눈앞에 수만 단위의 왕국군 놈들에 비해 한 줌에 불과한, 정말 턱없이 적은 수의 병력.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내 천인대 뿐만이 아니었다.

"파트라헴 천인대! 전진! 아펠도른 천인대 뒤로 붙는다!"

"3번 천인대! 앞으로 가!"

"대열에 붙어! 낙오되지 마라!"

다른 천인대들 또한 아펠도른 천인대의 뒤를 따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좋아. 어디까지 파고들 수 있으 려나."

오스카 군단장이 내게 지시한 것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깊숙이 파고들어 적의 진형을 어그러트리는 것.

우리 3군단은 놈들의 가장 안쪽 까지 진입해 진형을 흐트러트려야 한다.

즉, 난전으로 몰고 가는 것이 우리의 임무.

나는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 간다.

"제국 놈들이다! 막아라!"

"전열을 짜라! 창병들은 방진을 구성해!"

우리의 돌진에, 성 밖에서 파상 공격을 해오던 놈들이 허겁지겁 진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기다랗게 늘어진 전진 진형에서, 정사각형으로 모여 꾸린 방진으로.

하지만 놈들의 움직임은 늦었다. 녀석들이 허둥지둥 방진을 꾸리려 할 때, 이미 우리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상태.

나는 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릉!

공기가 찢어발겨지는 굉음이 터져 나온 직후. 방진을 막 꾸린 적의 장창병 대여섯이 죽어 나자빠졌다. 놈들의 시체를 즈려밟고 안으로 파고들며,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단검에 마나를 밀어 넣는다.

"펑."

내가 의성어를 입에 담고.

콰앙!

단검이 폭발했다. 무수한 파편들 이전방으로 쏘아졌다. 적병 수십이 단번에 제압되어 우르르 쓰러진다.

내 옆에 있던 카일이 허허 웃었다.

"참, 공국 수도 공방전 때도 그 랬지만. 그 단검 터트리는 거 정말 유용해 보입니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물론 멀쩡한 단검을 완전히 버리 게 되는 것에 더해 마나를 다소 낭비하는 감도 있지만, 이런 평범한 병사들을 단숨에 쓸어버리는 데는 꽤나 유용하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 적의 전열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

"망할! 제국군이다!"

"막아!"

적들이 계속해 보인다. 놈들에게 재차 단검을 들이밀었다.

콰앙!

터져 비산하는 칼날 파편들. 왕국군 병사들이 우르르 쓰러지고, 나는 그 빈틈을 파고들어 검을 휘두 른다.

콰르르릉!

오러 서린 검날이 커다란 반월을 그린다. 그러자 단번에 스무 명의 병사들이 몸통이 절단되어 쓰러지 니.

"맙소사, 한지훈 천인장! 정말 대 단한 무력이군."

"베르겐 단장 각하께서 자네를 탐내는 것이 이해가 갈 정도야."

다른 천인장들이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하기야 저들 또한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어지간한 기사들의 무력을 간단히 압도할 법한 무위를 내가 보이고 있으니 .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나는 시선을 내려, 시야 속 홀로그램을 바라본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미니맵. 미니맵에는 내 직속 천인대원들이 초록색 점으로, 우군인 다른 천인대들 이 파란색 점으로. 그리고 적인 왕국군 놈들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나는 움직이는 와중에도, 틈틈이 미니맵을 보며 생각한다.

'수월하게 파고들 수 있는 경로.'

미니맵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아군의 진형, 적의 배치, 그리고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적들의 움직임까지.

그것을 보고 움직인다면 보다 수 월하게, 더욱 깊이 파고들 수 있다.

나는 앞서서 병력을 움직였다.

"전방의 왕국군 보병대가 방진을 꾸렸다! 천인대, 진로 꺽어! 우측으로 움직인다!"

내가 선도하고, 병사들이 뒤따른다. 우리는 계속해 달려 적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대단해…!'

카일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감탄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상관, 한지훈 천인장.

한지훈의 모습은 대단했다.

"모조리, 다, 죽여버려라!"

콰르르르릉!

한지훈은 눈앞의 적을 도륙하고 있었다. 검을 휘둘러, 때때로 오러 를 발현해 그를 막아서는 왕국 놈 들을 죽여 없앴다.

검날이 번뜩일 때마다 적의 비명 과 단말마가 울렸고, 파공성이 울릴 때마다 피 분수가 치솟았다.

기사들을 초월하는 대단한 무위. 한지훈은 분명 보병대 지휘관에 불과할 터인데도, 기사처럼 적 보병들을 거의 학살하다시피 하고 있다.

물론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카일이 이렇게까지 감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보아왔던 한지훈의 모습이었으니 .

허나 지금 한지훈의 모습은 평소 와 달랐다.

"우측에서 두 개 천인대가 접근 중이다. 좌측으로 우회!"

"후방에서 적 기병부대 출현! 이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견제한다. 궁 병대! 내지시에 따라 견제사격!"

"적 천인장 발견. 내가 놈을 죽 여 지휘권을 흐트러뜨리겠다. 그 틈에 밀어버려라."

"저기, 적 기병새끼들이 온다. 적보병대 안으로 파고들어 적과 섞여 라! 기마돌격을 못하게 해!"

한지훈의 지휘가 이어졌다.

그는 마치 이전장 전체를 파악 하고 있다는 듯, 부대를 순조롭게 인도했다.

적의 기세를 읽어 보다 손쉬운 방향으로 밀고 들어갔다. 수월하게 제압할 수 있는 부대만을 노려 격파했고, 격파된 적 부대는 구멍이 되었다. 아펠도른 천인대가 전진하 면 뒤따라온 후속 부대가 잔당을 완전히 분쇄하며 뒤따른다.

마치 송곳으로 균열을 만들며 파고들듯, 고작 반 토막 난 일개 천인대가 일만의 후속 부대를 선도하는 모습.

'무슨,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 며 지휘하는 것만 같군.'

카일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한지훈의 지휘는 정교하고도 세심했다.

"…하. 말도 안 되지."

피식. 카일은 가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지휘한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저 한지훈의 용병술이 너무나 섬세하고 치밀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카일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실없는 추측은 반쯤 정답이었다. 실제로 지금 한지훈은 미니맵을 바라보며 지휘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

제국군 병사들이 왕국군의 전열 깊숙이 진입해간다.

놈들의 중앙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