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베르겐! 그게 정말인가?!"
- 그래. 지금 놈들의 측면과 배 후는 완전히 통제를 잃었다. 이제 이쪽이 몰아붙일 때야.
베르겐의 말에, 오스카의 얼굴에 화색이 어렸다.
전투는 이제 분수령을 넘어 성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모루' 역할을 맡았던 3군단 두 개의 요새가 시간을 끌었고, 그 틈에 양익으로 전개되었던 4군단, 5군단이 적의 배후와 측면을 두드리 고 있다.
명백히 순조롭게 풀려가는 전투 양상.
-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한 수가 부족하지.
베르겐의 말에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놈들의 중앙은 건재 할 테니까."
아무리 요새가 버티고 있으며 좌우에서 협공하고 있다 한들 병력의 수 자체는 이쪽이 열세였다.
놈들의 중앙을 흔들고 진형을 뭉 갤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타격이 있어야만, 승기를 완전히 잡을 수 있으리라.
그에 베르겐이 요청한다.
- 오스카. 요새의 병력을 앞으로 전진시켜줬으면 좋겠군.
"…전진시키라고?"
- 그래. 이미 우리는 놈들을 몰 아붙이고 있다. 모루의 역할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않나.
베르겐의 말에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겐은 지금 기사단을 몰고 3, 4군단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곽을 두드리는 것에 불과한 상황.
놈들의 진형을 더욱 효과적으로 흔들어야 한다.
이쪽 3군단이 전진기동 해 놈들 의 진형을 흐트러트린다면, 기사단 이중앙까지 파고들 수 있을 터다.
물론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베르겐.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우리 3군단은 요새를 사수하는 것 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만약 이번 돌진이 실패한다면 그나마 지키고 있던 요새마저 함락당 할 수도 있어."
3군단이 받는 압박은 너무나 강 렬했다. 적의 수는 많았고, 그들은 맹렬히 밀어닥치고 있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버텼으나. 그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것은 사실.
만약 요새의 병력을 앞으로 전진 시켰다가 회전에서 패배한다면, 아예 모루인 3군단이 붕괴해 적은 새로운 활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에 베르겐의 말이 이어졌다.
- 아니. 실패하지는 않는다. 내 장담하지.
"베르겐. 어떻게 그리 장담하는 거지?"
오스카가 품속에서 연초를 꺼내 꼬나물었다.
그가 막 불을 붙이려 할 때.
- 자네의 군단에는 한지훈이 있지 않나.
베르겐이 그리 말했다. 그에 오스카는 표정을 찌푸렸다.
"한지훈을?"
- 그래.
"한지훈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한지훈. 분명 그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가진 무력은 이미 상급 기사를 초월했다. 더해 군략에도 재능을 가 져 십인장 시절부터 뛰어난 지휘능력을 보여왔으니 .
출중한 인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무려 군단 단위의 회전이다. 그리고 한지훈의 지위는 기껏해야 천인장.
군단 단위의 전투에서 승패를 좌우할 만한 활약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 오스카의 기색을 읽은 것일 까. 수정구 너머, 베르겐의 말이 이어 들려온다.
- 오스카. 어떤 직감이 들더군. 한지훈이 요새 밖으로 나와, 왕국 놈들의 전열로 뛰어든다면. 이전투 를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직감.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내 직감은".
"꽤 잘 들어맞지."
피식. 오스카가 웃었다.
베르겐은 예전부터 그러했었다.
분명 베르겐은 냉철한 지성과 치밀한 전략으로 부대를 다루는 이는 아니었다.
오직 순수한 무력과 번뜩이는 찰 나의 직감만으로 군을 움직이던 이.
그렇기에 베르겐은 군관가문의 피를 타고났음에도 기사가 되었다. 스스로 군략이 없었음을 인정했었 기에.
하지만 그의 직감은 때때로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특히나 이런 전투 중일 때의 직감은 더더욱.
그에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3군단은 이 시간부로 기 동. 요새를 빠져나와 놈들의 중앙을 치겠다. 만족하나, 베르겐?"
- 아주 만족한다, 오스카. 그럼 부탁하지. 자네의 3군단이 전진한 다면, 우리도 최대한 호응하겠네.
"알겠다. 통신 종료."
비콘의 마나광이 가라않고, 통신 이 끊겼다. 오스카는 피식 웃으며 다시금 비콘을 조작한다.
"선봉장으로서 한지훈이라."
후욱. 오스카가 뿌연 연기를 뿜 으며 중얼거렸다.
베르겐. 뛰어난 직감을 가지고 있는 그의 친우이자 동료 군관. 그런 그가 한지훈을 전면에 세운다면, 이전투에서 승리하리라 예감했다.
그는 베르겐의 제안을 수용할 셈 이다.
"한지훈 천인장. 군단장 오스카다."
그가 한지훈과 통신하기 시작했다.
* * *
'내가 몇 명이나 죽였지.'
퍼억. 콰드득.
나는 바로 앞, 적병의 모가지에 검날을 박아 넣고, 검신을 비틀며 그리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시체들. 무수히 많은 시체들이다. 제국군과 왕국군 주검들이 이곳저곳에 나자빠져 질척 한 핏물을 흘려대고 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로 인해 지면이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파앙.
검날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냈다. 사실 그리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낸다 한들, 어차피 잠시 후 방금 전처럼 핏물에 물들 테니까.
"개 같은 왕국새끼들."
답답한 마음에 나직이 욕지거리 를 뇌까려본다.
저 왕국 놈들은 왜 저토록 정열 적으로 덤벼들고 있는지.
나는 검을 휘둘렀다.
파앙! 서걱.
검날이 민첩하게 움직여 적병의 목을 절단했다. 핏물이 뿜어져 투구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본래라면 비릿한 혈향에 표정을 찌푸려야 했겠으나, 그리하지 않았다. 이미 후각이 마비되어 아무런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가라! 사령부를 점령하라! 제국 놈들의 사령부는 요새 중앙에 있다!"
"돌격! 돌격!"
왕국군 병사들이 계속해 몰려들 어온다. 나는 이를 악물며 계속해 놈들을 죽여 나갔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적 병이 죽어 쓰러진다. 놈들의 비명과 고함이 청각을 두드리고, 푸확 튀어 오르는 붉은색 핏물이 망막에 박힌다.
내가 그렇게 검을 휘둘러 적병을 도륙해갈 때였다.
"천인장님! 더 이상 막을 수 없습니다!"
"놈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내 휘하 병사들이 그리 외쳤다.
확실히 놈들의 수가 너무나도 많다. 공성탑을 타고, 사다리를 기어 올라서, 무너진 성벽을 넘어 꾸역꾸 역 밀려들어오고 있으니 .
우리는 계속해 뒤로 밀려나며 발 악할 뿐이었다.
"천인장님! 성벽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러다간 전멸입니다!"
엘락이 그리 외쳤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된다. 아직 철수 명령 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엘락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피잉! 핑! 핑!
다수의 화살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검을 휘둘러 그중 몇 개 를 쳐냈다.
하지만 모두 쳐낼 수는 없었다.
푸욱.
"크아악!"
엘락이 비명 지르며 쓰러졌다.
살펴보니 녀석의 옆구리에는 화살 이 깊게 파고들어가 있었다.
으득. 분함에 이를 갈며 지시했다.
"2번, 3번 백인대! 원호하라!"
"명령을 받듭니다!"
좌우를 지키고 있던 2번과 3번 백인대가 앞으로 나서 녀석들을 제 압한다. 그 틈에 나는 화살에 맞아 쓰러진 엘락을 질질 끌며 뒤로 빠져나왔다.
지면에 엘락을 눕히고는 생각한다.
'적이 너무 많다.'
여태까지는 어떻게는 버텼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해가고 있다.
휘하 병사들의 상태를 살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극도로 지쳐 있는 상황. 벌써 몇 시간 내내 수 많은 적들을 맞아 싸웠다. 쉴 틈조차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들이 지치는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나도 이제는 한계야.'
오른손에 들린 검을 바라봤다.
드워프 장인이 만들었다는 철제 장검. 제국군 보급 장검보다도 훨씬 뛰어난 품질을 지닌 명검이다.
그 검이 지금은 걸레짝이 다 되어 있었다.
이곳저곳의 이가 다 나가 있었다. 검신이 미약하게나마 휘어있었 으며, 곳곳이 오러에 그을려 푸른색 으로 변색해 있다.
아무리 드워프제 명검이라 한들. 죽어라 오러를 발현해가며 적 병사 수백은 처치했을 테니, 망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걸레짝이 된 건 내 검뿐만 이 아니었다.
부르르.
검을 쥔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
몸의 상태를 살폈다.
온 근육이 과한 움직임으로 욱신 거린다. 관절이 뻬그덕 거렸다. 너무 많은 오러를 사용했기에 미약한 현기증 중상마저 겪고 있다. 몸이 자꾸만 휘청거린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오기로 버틴다.
이곳, 서쪽 성벽지대가 뚫린다면 요새가 정복당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무리 많은 희생을 치른다 한들, 저 요새 밖에서 전투 중인 주력군이 나름의 결과를 낼 때까지 버텨야 한다.
"아펠도른 천인대. 모두 주목."
내 주위에 있는 백인장을 비롯한 휘하 병력이 이쪽을 바라본다.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곳 서쪽 성벽을 끝까지 사수한다. 절대, 후퇴는 없다."
"… 천인장님. 정말이십니까?!"
경악한 눈으로 그리 말한 것은 2번 백인장, 맷 마이어스였다.
녀석이 절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천인장님! 아군의 손해가 너무나도 막심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전 멸입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지금 우리 의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휘하 천인대 병사들의 절반이 죽 어나갔다. 긴 시간동안 쉴 틈도 없이 이어진 전투에 모두 지쳐있었으 며, 사기 또한 뚝뚝 떨어져가고 있는 상황.
"반론은 받지 않는다. 우리는 서쪽 성벽을 지켜야 해."
그럼에도 버텨야 한다.
시선을 돌려 성벽 방향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 우글거리는 왕국군의 무리. 이곳저곳이 무너져 내려 걸레 짝이 된 성벽. 그사이사이를 타고 왕국 놈들이 밀려들고 있다.
너무나 많은 수의 적병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노 릇.
"이곳이 밀린다면, 사령부까지 점 령당하는건 순식간이다."
우리가 서쪽 성벽에서 철수한다 면 놈들이 더욱 거세게 요새 안으로 들이닥칠 것이고, 놈들이 요새 안으로 들이닥친다면 금방 사령부가 점령당 할 것이다.
그리고 사령부가 점령당한다면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당해, '망치와 모루' 중 '모루'가 붕괴된다.
모루가 붕괴한다면 이전투는 제국군의 압도적인 패배로 끝날 것이다.
그러니 이자리에서 이탈할 수 없다.
"…엘락."
나는 시선을 돌려, 지면에 쓰러 져있는 엘락을 바라봤다. 엘락은 화살이 꽂힌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색색 신음하고 있었다.
"… 상태는 어떻지?"
녀석의 모습을 살폈다.
엘락은 고통에 신음하고, 눈을 감은 채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엘락! 정신 차려!"
나는 녀석의 몸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그에 힘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엘락.
"천인장…님"
"몸은 괜찮나? 포션을 주지. 일단 회복해."
"으윽……"
엘락이 신음하며 몸을 웅크린다. 꽤나 고통스러운 모양.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허리에 박혀있는 화살을 잡았다.
"아플 거다. 이 악물어라."
화살을 잡아 뽑아냈다.
푸슉.
"끄아아아아악!"
화살이 뽑힌 구멍에서 핏물이 울컥 튀어 올랐다. 보아하니 화살이 깊은 혈관과 장기들을 제대로 관통 했던 것 같다.
"아악! 아아아악!"
엘락이 고통에 비명 지르며 눈을 치켜떴다. 눈동자가 넘어가 흰자위 가 드러난다.
정말 더럽게 아픈 모양.
나는 포션을 개봉해 녀석의 상처에 흘려 넣었다.
"걱정마라, 엘락. 너는 죽지 않 아. 포션을 사용했으니까."
"끄으으으으!"
"정신 차려!"
찰싹. 녀석의 뺨을 때렸다. 고통에 반쯤 정신을 잃었던 녀석의 눈동자가 조금씩 이지를 찾는다.
"천인장님…."
"정신은 좀 드나?"
"천인장님. 제게… 어째서 제게 포션을 사용하신 겁니까? 천인장님 께서 쓰실 포션을 왜 제게…."
웃기게도 이 와중에 녀석은 내 포션을 사용한 것에 죄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피식 웃었고,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저따위를 살리는데 쓰시다니… 어째서… 저는 더 이상 전력이 되지도 못할 텐데…."
"주접떨지 말고. 정신줄이나 똑바로 차려."
엘락이 제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락이 전투불능 상태다. 카일이 1번 백인대를 지휘해라."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카일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직후, 내가 각 백인장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려 할 때였다.
우우웅….
품속에 넣어뒀던 통신수정구에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 통신이 들어왔다는 것일 터.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 한지훈 천인장. 군단장 오스카다. 자네 아직 무사한가?
통신을 걸어온 것은 군단장 오스카였다. 나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군단장 각하. 저는 아직 무사합니다."
- 천인대의 상태는?
"절반이 전사했습니다."
- …심각한 피해군.
후욱. 하는 소음이 수정구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지금 오스카는 연초를 빨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고했다.
- 한지훈 천인장. 이제 곧 우리 3군단이 움직일 때가 되었다.
"움직일 때라 하신다면."
- 아군 병력이 마침내 적의 측면 과 배후를 포위했다. 지금은 제압과 정에 들어가 있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우리 요새가 버틸 만큼 버틴 덕분에 아군 병력이 우회기동을 성공. 적의 측면과 후방을 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오스카 군단장이 입을 열어 고한다.
- 그리고 지금은 이 승기를 굳혀 야 할 때. 3군단을 놈들의 전열로 돌진시킬 것이다.
"… 군단장 각하?"
방금 전 군단장이 한 말은, 4, 5군단뿐만 아닌, 요새를 지키고 있던 3군단마저 적과의 회전에 가세하겠 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이어 말한다.
- 곧 돌진이 시작될 것이다. 그때 한지훈, 자네가 우리 3군단의 선봉을 맡아줬으면 좋겠군.
아무래도 그는 내게 선봉장의 역할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나 외에 달리 선봉을 세울 만한 사람은 없을 터다. 나는 강대 한 무력과 풍부한 전술 경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십시오, 군단장님."
- 띠링! 띠링!
[서브 퀘스트 - '아펠도른 요새 방어전'을 '처절하게' 완수했습니다!]
[일정 이상의 점수를 얻었습니다. 포인트가 추가로 정산됩니다!]
[정산 포인트 : 20pt]
[추가 정산 포인트 : 10pt]
(남은 포인트는 30pt입니다.)
[시나리오 외 이벤트 감지!]
[엑스트라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엑스트라 퀘스트]
[카렌 왕국 동부군의 전열로 돌진, 교란시켜라.]
이번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선봉 장 역할이다.
나는 허리춤에 메인 장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