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더럽게 많네."
나는 서쪽 방향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부터 대규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정말 까마득하게 많은 수다.
"8만 명이라. 정말 꾸역꾸역 밀 려오고 있어."
8만이라. 무지막지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토록 커다란 먼지구름이 일어날 정도라니.
"처, 천인장님! 적이 너무 많습니다…!"
문득 내 옆에서 있던 엘락이 그리 말했다. 나는 녀석의 표정을 살 펴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 눈동자는 동 공이 흔들리고 있으며, 이마에는 식 은땀마저 흐르고 있다.
평소의 냉철한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 엘락은 이쪽으로 몰려오는 대규모 군세에 완전히 압도당한 듯싶다.
피식.
나는 팔을 휘둘러 녀석의 등을 거칠게 때렸다.
퍼억!
"윽!"
"긴장 풀어 인마. 너는 항상 대규모 전투만 앞두면 쫄더라."
저번 굴라덴 공방전 때도 그렇고, 지금 요새 방어전도 그렇고. 엘 락은 많은 수의 병력이 투입된 전투를 앞두면 꼭 긴장에 몸이 굳곤했다.
나는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쪽에도 6만 명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요새를 끼고 싸우는데 다, 기사나 마법사 같은 고급전력은 오히려 우리 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쪽이 이길 가능성이 높아."
"그,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허리 펴고, 시선 은 똑바로 하고. 겁먹은 티를 내지 마. 백인장이 잔뜩 움츠러들면 그 공포가 부하들에게까지 전염된다. 명심해."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엘락이 제정신을 차린 걸까. 녀석의 안색이 점차 본래의 것으로 돌아온다.
나는 시선을 돌려 카렌 왕국의 군대를 바라봤다.
녀석들이 요새 방향으로 접근해 온다. 덕분에 나는 놈들의 모습을 보다 자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준비성 한번 철저한 녀석들인데. 공성병기까지 완벽하게 만들어놨잖아?"
녀석들은 여러 공성장비들까지 끌고 오는 중이었다.
성벽을 타고 오르는 사다리차와 공성탑,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투석기, 더해 성문을 부수는 충차들 까지.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 상태다. 아마 이곳에 당도하기 전, 공병대를 운용해 공성무기를 만들었으리라.
나는 시선을 돌려 성벽의 한켠, 로브를 입은 인영들을 바라봤다. 그 들 중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제피르.'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단장 제피르. 그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가 전투마법단을 잘 지휘해서 적의 마법을 무력화하고, 공성무기를 제대로 파괴해야 이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본다.
- 부우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제국군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카렌 왕국군 의 것일 터.
놈들이 전투에 앞서 전열을 정비 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놈들은 이쪽으로 밀어닥칠 것이다.
나는 적의 군세를 바라보며, 허리춤에 매어진 장검의 손잡이를 매 만졌다.
* * *
"요새가 두 개라니? 얻었던 정보 랑은 다르군."
카렌 왕국 동부군 총사령관, 도 나드 글리슨 후작. 그는 지도를 바라보며 그리 읊조렸다.
그는 무려 8만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이곳, 요한바르첸 총 독령 루벤 지방까지 진출했다.
그러자 나타난 것은 침공로를 틀어막듯이 자리해있는 두 개의 요새.
그는 시선을 들어 올려 요새의 모습을 살폈다.
둘 다 그리 큰 규모의 요새는 아니었다. 아무리 많이 쳐줘야 각각이 고작 1만여 명을 수용하는 것이 한계일 요새.
그의 시선이 요새 뒤에 도열해있는 적 병력들에게 향한다.
"헌데 제국 놈들. 오히려 요새 밖에 있는 병력이 더욱 많군."
도나드의 눈동자가 요새의 배후에 향했다.
꽤나 많은 수였다. 언뜻 두 개 군단 정도 되는 병력일까. 게다가 개중에는 번쩍이는 전신갑주를 입은 기사들도 다수 포함되어있었다.
그는 적의 진형을 보고는, 추측했다.
"저놈들. 우리를 요새에 붙잡아 두는 동안 측면을 치려 하는군."
정답이었다.
두 개의 요새가 굳건히 버티고 있는 동안 다른 군단들이 우회기동, 측면을 부순다는 것이 제국군이 수 립한 작전의 핵심이었다.
흔하디흔한 망치와 모루 전술. 여기서 평소 회전과는 다른 점이라 면, 모루는 중장보병의 대열이 아닌 요새라는 것이었다.
허허, 도나드가 웃었다.
"그나저나 당했군. 보아하니 제국 놈들은 우리가 이곳 루벤 방면으로 올 것을 미리 예상한 듯싶은데."
지금 제국군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카렌 왕국 전쟁국에서는 제국군 이 루벤 방면이 아닌, 지젠 지방에 방어선을 꾸릴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곳이 여러모로 방어에 용이한 지 형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력을 유동 성 있게 움직이기 쉬웠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제국군은 이곳 루벤 방면에 대규모 군대를 모아 방어선을 꾸렸다.
분명 예상외의 행동.
도나드는 추측해본다.
'정보가 새어나간 것인가.'
단순히 병력을 모아둔 것이라면 몰라도, 요새까지 새로이 축성할 정도라면 분명 제국 측에서 확실한 정보를 얻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는 잠시 제국군의 진형을 노려 보고는, 피식 웃었다.
"뭐. 그래봤자다."
그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은 대단했 으니 .
그가 시선을 돌려 자신의 바로 옆에서있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전 전투마법사. 준비 되었는가?"
"언제든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사령관 각하."
씨익. 청색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가 웃었다.
"저희 마법사 오백의 합동마법. 제국의 마법사들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이름 높은 라브 리에 전투마법단이라 한들 말입니다."
그들이 이끌고 온 마법사 전력은 열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저기 제국군의 두 배를 넘어서는 수준이었으니 .
도나드가 질척하게 웃었다.
"놈들이 옵니다!"
카렌 왕국군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진형을 갖추고, 일렬 씩 차례로 병력을 보내기 시작한다.
정말 무시무시한 수였다.
마치 개미새끼들이 우글거리며 밀려오는 것 같다.
"스케일 한번 더럽게 크네."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에서 이 정도의 전투는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모니터 너머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크게 외쳤다.
"전 병력!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무장 점검하고, 궁병대는 일제사 격 준비해!"
병사들이 제각기 자리를 지킨다. 나는 굳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지면은 지려밟으며 진격해오고 있는 카렌 의 군대. 그 수가 8만.
마법사의 화력이 절실하다.
시선을 돌려 제피르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연초를 입가에 꼬나문 채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마나 어린 웅혼한 음성으로 읊조린다.
- 폭렬폭풍. 준비.
웅웅웅웅웅웅!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스태프 를 들어올리고, 장엄한 마나의 힘을 불러오기 시작한다.
직후 하늘에 떠오르는 마법진. 이미 여러 번이나 봐 익숙한 붉은 색 마법진이다.
라프리에 전투마법단의 폭렬폭풍 마법.
- 처음부터 최대 화력으로 간다. 100중첩이다.
허공에 떠오른 마법진이 더욱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미 하늘에 태양이 떠 있어 대지가 환하 게 밝았음에도. 마법진에서 일렁이는 적색 마나광이 환한 태양빛을 잠시나마 밀어낼 만큼 뿜어내는 빛이 강했다.
제피르가 스태프를 겨눈다.
- 타격점을 조율하겠다. 나와 마나를 동조하라.
쿠르르르르…
마법진이 굉음을 토하며 중첩되 어갔다. 무려 백여 개의 폭렬폭풍 마법. 강대한 화력이 담긴 그 마법 이 눈앞의 대지를 불 싸지를 준비 를 해간다.
그렇게 제피르가 마법을 운용하 려 할 때였다.
번쩍!
갑작스레 빛이 터져 나왔다. 일순간 눈을 멀 정도로 강렬한 폭광 이었다.
마법의 발현광은 아니었다. 빛이 잠잠해지고, 나는 눈을 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분명 방금 전까지 웅혼한 기세를 일렁이며 떠 있었을 거대한 붉은색 마법진. 그것이 산산이 조각나 소멸 해가고 있다.
"뭐…?"
순간 나는 눈앞의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저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다.
마법의 파훼였다. 다른 마법사들 이 시전자의 술식에 간섭, 파괴해, 마법의 발현을 무효화 시키는 행위.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파훼 를 당한 마법사가 적이 아닌, 아군 이었다는 것이었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마법을, 파훼했다고?"
물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마법의 파훼, 적에게 마법사 전력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무려 100중첩 폭렬폭풍이었다. 게다가 라브리에 마법전투단 의 경지를 고려한다면, 적어도 삼백이 넘는 마법사들이 달라붙어야 겨우 파훼할 수 있을 터인데.
헌데 파훼되었다. 그 말은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했다.
"…적의 마법사 전력이 이쪽을 훨씬 상회한다."
내가 그리 중얼거리는 그때.
웅웅응웅웅!
허공에 커다란 마법진이 떠올랐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마법진 은 아니었다. 저것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색의 마법진 이었으니까.
직감했다.
"적의 마법이다."
쿠르르르르…
허공에 떠오른 마법진이 점차 중첩되어간다. 일중첩, 십중첩, 어느덧 백중첩을 넘어서고, 오백중첩이 되어가는 순간.
나는 이전투가 예상 외로 몹시 힘들어질 것을 직감했다.
* * *
"대단해! 정말 대단해!"
제피르가 광소했다. 그는 허공에 떠올라있는 마법진을 바라보고 있다.
무려 오백중첩에 달하는 초대형 마법이다. 그 말인 즉, 저 군세들 속에는 오백 명에 달하는 전투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하고 있다는 것 일 터.
"마법사 오백이라니, 정말 먹음직 스러운 먹이로다!"
제피르는 연초 연기를 내뱉으며 그리 외쳤다.
전투마법사 오백. 강대한 적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정복 전쟁 당시에도 그 정도로 많은 마법사들을 상대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제피르는 뼛속까지 전쟁에 미쳐버린 인간. 강력한 적의 등장과 한계를 넘어서는 투쟁은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그가 마나 어린 웅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전 단원에 게 알린다."
그의 말에, 회색 로브를 입은 전투마법사들이 제피르를 주시한다. 그가 이어 말했다.
"부스터를 투여하라.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종주님."
"명령을 받듭니다."
마법사들이 하나둘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것은 진한 푸른색 액체였다.
언뜻 마나포션과 비슷한 색이었 으나, 그것보다는 훨씬 진하고 질척 한 외양.
제피르가 부스터를 넘겨 삼켰다.
웅웅웅웅웅웅!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푸르른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기사 들이 오러를 발현하는 것처럼. 그의 주위에 은은한 마나광이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변화가 있는 것은 제피르뿐만이 아니었다.
똑같이 부스터를 섭취했던 마법사들 또한 전신에서 푸른색 기운을 돋우기 시작했다. 마나의 파동이 점차 주위로 뻗어나가고, 강대한 기운 이 이 일대를 잠식해간다.
제피르가 스태프를 들어올렸다.
"저기 쪽수만 믿고 덤비는 놈들 따위. 철저하게 부숴버려 주지."
그가 지팡이를 휘저었다. 그러자 웅혼한 기운이 끓어오르기 시작하 며, 스태프가 백열한다.
제피르의 마나 어린 음성이 넓게 뻗어나간다.
- 폭렬폭풍, 오백중첩.
그가 각혈하며 마나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