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나는 아펠도른 요새에 배치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래 우리 천인대가 배치되어있던 곳 이었으니까.
물론 우리 천인대만 배치된 것은 아니었다.
"일만 명이 이 작은 요새에 모여 있다니. 정말 비좁아 보이는군요. 저희 천인대만 있을 때는 꽤 널널해 보였는데 ."
"그렇지. 뭐."
엘락이 질린 듯 내게 말해왔다.
다른 천인대들 또한 이곳 아펠도른 요새에 배치되었다.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과거 공국전쟁 당시 함께 싸웠던 녀석들이 기에, 눈에 익은 지휘관이 많이 보였다.
물론, 그중에는 나와 친분을 다졌던 천인장 또한 있었다.
"한지훈 천인장. 이게 자네의 요새로군."
"그레드 천인장님."
파트라헴 천인대장 그레드. 그 또한 나와 같은 아펠도른 요새에 배치되어있다.
나는 씩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어떱니까? 제 요새가."
"내 요새보다는 구려 보이는군."
"그거야 어쩔 수 없지요. 그레드 천인장님의 요새는 공국전쟁 때문에 군단 규모로 확장되었지 않았습 니까? 대신 저는 요새가 두 개입니다."
"그래봤자 간이 요새지."
그레드가 시선을 돌려 아델 요새를 바라봤다. 아델 요새 또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지지 않았기 에, 이곳 아펠도른 요새의 성벽 위에서 보였다.
그레드 천인장이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한지훈 천인장. 자네는 아직 내게 존대를 하는군. 이제는 같은 천인장 계급이 되었는데 말이야."
"존대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전 상관인데 말입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그레드가 피식 웃었다.
"이거야 원, 자네는 작위를 가지고 있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나는 자네에게 꼬박꼬박 '경'을 붙여야 한다만. 한지훈 경."
"절대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한지훈 경."
"아, 제발…."
"뭐, 그렇게 하지."
그레드가 클클 웃었다.
그는 잠시 웃고는 문득 말해왔다.
"참 신기한 기분이군."
"생뚱맞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자네가 십인장 시절일 때가 생각나서 말이네."
그레드가 피식 웃으며 나를, 정확히는 내 가슴팍에 박혀있는 천인장 계급장을 바라봤다.
"나는 자네가 십인장이었을 무렵 부터, 언젠가 군 고위층이 되리라 예상했었지. 자네는 그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으니까."
그레드는 그리 말하고는 성벽의 난간 위에 팔을 기댔다. 그의 쌍검 집이 성벽에 부딪혀 철그럭 소리를 낸다.
"하지만 자네의 성장 속도는 내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군. 십인장을 넘어 백인장, 백인장을 넘어 천 인장까지 고작 몇 달이라니.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야."
"뭐.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네 잠재능력이 너무나도 뛰어났던 것이지. 게다가 금성훈장마저 두 개나 수훈받 았으니 ."
그레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지훈. 문득 이런 직감이 들더 군."
"직감이라. 어떤 직감입니까?"
"자네가 이번 전쟁이 끝날 무렵, 군단장이 될 거라는 직감."
그레드가 시선을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다. 그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주시하고는, 이어 말했다.
"한지훈. 군단장이 되게. 아니, 그이상으로 드높은 사람이 되게."
나 또한 그레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보다 진중 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항상 평민들이 군 고위층 으로 올라가는 상상을 하곤 했었지. 군단 참모장, 군단장, 중앙 참모… 장성급 군관 자리 말이네. 그리고 나 또한 언젠가 장성까지 오르지 않을까 하고 희망해보기도 했었지."
그레드는 시선을 돌려 요새 밖을 바라봤다. 요새 밖에는 타 군단들이 진형을 갖춘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그 군세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천인장이 내 능력의 한계였다. 정복 전쟁에 종군하면서, 그리고 공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절 절히 깨닫게 되었지. 만약 내가 귀족 출신이었다 한들 천인장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을 거라고."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 니까?"
"한지훈. 너는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금 나와 눈을 마주친다. 그레드의 갈색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자네는 고작 천인장으로 남을 인물이 아니야. 그리 머지않아 위로 올라가겠지. 참모장, 군단장, 어쩌면 그 위인 야전군 사령관…."
"… 너무 먼 이야기입니다만."
"멀지 않아. 전혀 멀지 않아. 한지훈."
그는 그리 말하고는 검의 손잡이 를 매만졌다. 무언가 만지는 것. 그 가 고민할 때의 버릇이었다.
"한 가지 부탁을 하지. 한지훈."
잠시 고민하던 그레드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지금보다 더, 훨씬 드높 은 자리에 올라선다면. 평민 출신들을 배척하지 말아주게."
"저도 평민 출신입니다. 어째서 배척합니까?"
"사람은 원래 성공하게 된다면, 예전의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는 법 이거든."
그는 피식 웃고는 내 어깨를 두들겼다.
"뭐. 그냥 잊어버리게. 곧 카렌 놈들이 몰려올 거다. 이제 슬슬 천인대를 관리해야겠지."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수다도 이쯤 떨었으면 됐 지. 나는 이만 가보겠네."
그레드는 그리 말하고는 파트라 헴 천인대가 맡은 구역을 향해 걸 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 며 중얼거린다.
"평민 출신을 배척하지 마라… 라."
아마 그레드는 자신의 출신 때문에 한이 맺혔던 게 아닐까. 그래서 자신처럼 평민 출신인 인물이 장성 자리에 오르는 것을 꿈꿔왔던 것이 고.
나는 고개를 돌려 성벽 밖을 바라봤다. 보는 곳은 서쪽 방향. 카렌 왕국 놈들이 쳐들어오는 침공로 방향이다.
"뭐.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겠지."
지금은 비록 천인장에 불과하다 만, 그레드의 말대로 나는 더더욱 높은 자리로 갈 것이다. 천인장을 넘어 군단장, 군단장을 넘어 야전군 사령관. 어쩌면 그이상의 자리까지 갈 것이다.
그때쯤이면 내게는 막대한 영향력이 생길 터. 그렇게 된다면 나는 지금 제국의 귀족주의 기조를 뜯어 고칠 것이다.
뭐. 아직은 먼 이야기다.
"일단은 전투에 집중해야겠지."
나는 서쪽 방향을 노려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저지평선 너머를 주시했다. 그러자 보인다.
머나먼 곳. 먼지구름을 뭉게뭉게 일으키며 이쪽으로 접근해 오는 적.
"카렌 새끼들이 오는군."
- 부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울려퍼진다. 신호 기가 하나둘 솟아오른다. 깃발의 색 은 푸른색. 전투 전 경계 태세다.
나는 서쪽 방향을 주시했다.
카렌 놈들이 이쪽으로 진군해 오고 있다.
"폐하! 황제 폐하!"
제국 황궁의 알현실. 지금 그곳 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알현실의 문이 계속해 벌컥벌컥열리며 병사들이 뛰어 들어온다. 모두 황성 내에 주둔하며 통신을 맡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하나둘 달 려오며 차례로 고한다.
"황제 폐하! 요한바르첸 총독국에서 급보입니다! 카렌 왕국군 병력 약 8만이 월경, 루벤 방면을 향 해 진군해오고 있습니다!"
"북부 리비타 전선에서 연락입니 다! 카렌 왕국군 여섯 개 군단이 제국 북부 본토를 침공해왔습니다! 마법사와 기사가 포함된 대규모 군 세입니다!"
"동부 야전군 사령관의 보고입니 다! 람셀의 군대가 비티베 산맥을 넘어 진군 중, 목격된 적, 여덟 개 군단!"
"서부 파히드 기사단에서 급보입 니다! 트웨인의 기사단이 아군의 병력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현재 네 개의 요새에서 전투 중입니다!"
"남부 해군에서 연락입니다! 코 르자카 공화국이 연안에 상륙을 시도! 현재 해안부대와 남부 해군이 웅전 중입니다!"
병사가 알현실에 들이닥칠 때마다 어김없이 불길한 소식이 울려퍼 졌다.
들려오는 것은 모두 적대국가의 침공 소식들 뿐.
"맙소사, 네 개국가가 한번에 쳐들어오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현실에 자리한 대신들은 아연 한 얼굴로 병사들을 바라봤다.
말 그대로 일시 침공이었다. 한 날한시에 맞춰, 제국과 국경을 접한 네 개국가들이 단숨에 침공해온 것이다.
동부. 대규모 일반보병을 보유한 람셀.
서부. 기병전력이 특출난 트웨인.
남부. 막대한 해상전력을 지닌 코르자카.
북부. 산악 병사들이 강인한 카 렌.
그 모두가 적게는 십 수만, 많 게는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동시 다발적으로 제국의 영토를 향해 밀 고 들어오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사들의 보고 가 켜켜이 쌓여갔다.
물론, 그중 좋은 소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북부 리비타 전선! 대규모 회전에서 패배, 퇴각합니다!"
"동부 야전군 사령관의 연락입니다. 동부 전선 방어 실패, 퇴각 후 후방지역인 리펠시아 산맥에서 전 열을 재정비, 다시 방어선을 펼치겠 음. 이상입니다."
"서부의 네 개 요새가 점령당했습니다! 파히드 기사단이 마지막까지 응전 중이지만…!"
"남부! 적병이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마을과 도시가 약탈당하고 있습니다!"
으드득.
황제가 이를 갈았다.
"염병할 새끼들."
그의 입가에서 욕지거리가 흘러 나왔다.
평소 고고한 모습만을 보여줬던 황제였기에. 그의 입에서 저런 상스 러운 말이 나왔단 것은 그가 그만큼 분노했다는 것을 뜻했다.
"카디르. 국방성 장관."
황제의 황금색 눈동자가 국방성 장관 카디르를 향했다. 그에 카디르는 황급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네! 황제 폐하! 국방성 장관 카 디르, 황제 폐하의 목소리를 기다립 니다!"
"장관에게 묻지. 지금, 우려대로, 네 개국가가 동시에 침공해왔다.
카렌, 람셀, 트웨인, 코르자카! 제각 각 모두 최소한 십만이 넘는 규모다. 전부 다 합친다면, 대충 칠십 내지 팔십만은 되겠군."
후욱. 황제가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이전쟁. 이길 수 있나?"
"…그."
"어서 대답하게, 장관."
국방성 장관 카디르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단 하나의 국가만이 침공해 왔다면 자신 있게 답했을 것이다. 폐하의 제국은 강하노라고, 이쪽에 칼날을 들이댄 건방진 적 따위. 단숨에 짓밟아버릴 수 있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려 네 개국가 가 총력전을 걸어왔다.
모두 정복 전쟁 이전, 남부 대륙 의 패권을 다투던 열강들이었다. 그 들은 정복 전쟁으로 제국에 깊은 원한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오랜 기간 칼날을 갈아 침공해왔다.
더해 그들이 침공해온 방향은 제 각각이었다.
동쪽에서, 서쪽, 남쪽에서, 그리고 북쪽에서. 사방에서 적들이 밀려오고 있다. 전선이 극단적으로 분열 되어버렸다. 병참선이 말도 안 되게 길어졌다.
힘든 전쟁이 될 것은 물 보듯 뻔 한 일.
최악의 경우 제국이 멸망할 것이 요. 최상의 경우라 한들 제국의 국력이 크게 쇠퇴할 것이다.
때문에 국방성 장관은 차마 대답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 후우."
결국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 또한 알고 있다. 이전쟁은 결코 이전 공국전쟁처럼 쉬운 전쟁이 아니라고. 제국의 국가 그 자체가 위태로운 것이 지금의 상황 이라고 말이다.
"… 국무성 장관."
"예. 폐하. 하명하십시오."
제국 국무성. 제국의 외교와 식 민지 관리, 그리고 타국의 정보 수집을 전담하는 조직이었다.
황제가 국무성 장관에게 묻는다.
"놈들에게 통신은 시도해 보았는 가."
"…그게."
"말하게. 어차피 상황은 뻔하니."
"네 국가 모두, 저희 제국과의 통신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라인으로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단단히 노렸다 이거군."
군사 도발에 항의할 때만 해도 제대로 연결되던 마나통신망이었다. 그것이 지금 끊어져 있다. 그말인 즉, 이쪽과의 협상은 없다는 것을 뜻할 터.
황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가소로운 것들."
감았다 뜬 황제의 눈동자에는 이전의 눅눅한 기색이 없었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다시금 총기를 머 금었다.
제국의 위기? 네 국가의 동시 침공?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그가 다스리는 것은 제국이었다. 강대한 국력과 광활한 영토, 수많은 강군을 가진. 그 오르페우스 제국 말이다.
"국방성 장관."
"네! 하명하십시오, 황제 폐하!"
황제의 기색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 국방성 장관이 절도 있게 대답한다.
그가 지시했다.
"각 방면의 야전군 사령관과 집단군 사령관과의 통신을 준비해다오. 전쟁계획을 세우겠다. 재무성 장관?"
"재무성 장관 베네치오 슈라이버. 황제 폐하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전쟁자금을 무제한 동원한다. 황 실내탕고도 완전 개방하지. 전쟁에 모든 것을 동원하라."
"황명을 이행하겠습니다."
"마법성 장관."
"마법성 장관 우르겔. 하명하십시오."
"모든 마법사를 동원한다. 가능한가?"
"제국의 위기입니다. 최대한 협조 를 끌어내 보겠습니다."
황제는 각 조직의 장관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 이번들거린다.
그가 그렇게 각 장관들에게 명령 하고 있을 때였다.
덜컹!
"황제 폐하!"
알현실의 문을 박차고 한 병사가 달려왔다. 역시나 통신 임무를 맡고 있던 병사였다.
헌데 어째서일까. 계속해 알현실을 들락거리던 다른 병사들과 달리, 그의 표정에는 기쁨이 자리해있었다.
병사가 입을 열어 고한다.
"폐하! 요한바르첸 총독령, 제국 북부군에서 보고입니다! 라이젠 남작령에서…!"